본관은 반남(潘南). 자는 경뢰(景賚), 호는 성암(省菴). 홍문관교리 박의(朴猗)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좌의정 박세채(朴世采)이며, 아버지는 수운판관(水運判官) 박태흥(朴泰興)이다.
9세부터 할머니의 가르침 밑에서 학문에 힘썼다. 일찍이 학행으로 이름이 알려져 천거를 받아 세자시강원자의(世子侍講院諮議)와 세자익위사세마(世子翊衛司洗馬)를 지냈다. 1723년(경종 3)에 내시교관(內侍敎官)을 거쳐, 1725년(영조 1)에 생원이 되고, 공조좌랑을 지냈다. 그리고 외직으로 개령현감(開寧縣監)을 지내다가 1730년에 고향으로 돌아갔다.
1735년에 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에 발탁되어 경연관(經筵官)에 뽑혔으며, 1737년 사헌부장령(司憲府掌令)이 되었고, 다시 외직으로 단양군수가 되어 선정을 베풀었다. 1741년 사헌부집의(司憲府執義)를 거쳐 1749년 세자가 국정을 대리하자 치국(治國)의 도리로서, 첫째 효도를 권면할 것, 둘째 대지(大志)로 분발할 것, 셋째 기강을 세울 것, 넷째 대의(大義)를 밝힐 것, 다섯째 현사(賢邪)를 분별할 것 등의 5개 조목의 소를 올려 크게 칭송을 받았다.
1750년 병조참지·성균관좨주(成均館祭酒)·장례원판결사 등을 거치었다. 특히 성리학(性理學)을 연구하여 예학(禮學)에 밝았던 당대의 대학자 윤증(尹拯)으로부터 인정을 받기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