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9년 경기도 기념물로 지정되었다. 바다에 임한 해발 49m의 산단부(山端部)에서 바다쪽의 경사면을 삼태기 모양으로 축조한 석축의 진영터이다. 성벽은 길이 225m, 높이 1.45m, 너비는 위쪽에서 2.4m 정도를 최근에 보수하였다.
본래 둘레가 1km, 성벽의 높이가 1.5∼2.1m쯤 되는 조선시대의 해안 방비를 위한 수군(水軍)의 보루였다. 산허리와 바다쪽에는 이 보루보다 앞선 시기의 토루 흔적이 남아있고, 계단식을 이룬 평탄지가 건물터로서 깨어진 기와와 그릇 조각이 많다.
기록에 따르면 이곳은 경기수영(京畿水營) 관할의 남양 화지량(花之梁)에 있는 좌도수군 첨사진(僉使鎭) 아래의 초지량영(草芝梁營)으로 수군 만호(萬戶)가 방어 책임을 맡고 있었다. 《세종실록》에서는 초지량 만호의 수군은 안산의 사곶(沙串)에 군선을 정박하며, 중대선(中大船) 5척(隻)과 무군선(無軍船) 4척이 있었고, 장번수군(長番水軍) 8명과 이곳 소속의 각 고을에서 소속된 선군 615명이 배속되어 있었다고 한다.
1656년(효종 7)에 초지량영을 강화도로 옮기었으므로, 이후 진영은 폐지되었으나 별도로 해안을 살피는 곳으로 이용되었을 것이라 여겨지며, 이런 연유로 별망성으로 존속된 듯하다.
우리 나라에서 해안의 진영에 축성이 이루어진 것은 조선시대의 성종 때로부터 시작하여 중종 때에 일단 완성되었으므로, 별망성도 조선 전기에 축조되어 17세기 중엽까지는 진영으로 존재하였다고 여겨진다. 성안에서 발견되는 유물로 보아 고려 후기부터 약간의 시설이 있다가 해안 방어체계가 갖추어진 조선시대에 더욱 많은 건물 등의 시설이 마련되었던 것으로 여겨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