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현상이 복잡하고 위험요소가 상존하는 현대에는 사고나 재난이 누구에게나 닥쳐 올 수 있기 때문에 경제가 발전하고 사회가 발달할수록 보험의 효용은 더욱 커지고 일반화된다.
보험의 주된 기능은 여러 사고에 대비하게 함으로써 보험가입자를 경제적 파멸로부터 보호하고 안전성을 부여하는 것이다. 이는 또한 위험발생에 대한 불안을 제거해 줌으로써 경제적 · 정신적 윤활작용을 하여 각 경제 주체의 활동을 촉진시키는 결과를 가져 온다.
이와 함께 부수적 구실로서 투자기능도 담당한다. 보험은 거대한 자금의 적립을 가능하게 한다. 왜냐하면 보험가입자에게서 받은 보험료는 선납인 반면, 일정기간이 지난 후에 보험사고가 발생하는 것이 통례이기 때문에, 보험사고에 대비한 지급자금은 매우 큰 자본이 되어 국가 경제활동을 촉진하는 투자에 기여하게 된다.
보험의 종류는 내용별로 손해보험 · 생명보험 · 특수보험으로 나눌 수 있고, 운영주체에 따라 사보험 · 공보험으로 분류할 수 있다. 손해보험은 크게 화재보험 · 해상보험 · 운송보험 · 특종보험 등으로 나누어지며, 이 중 특종보험에는 상해보험 · 자동차보험 · 항공보험 · 도난보험 · 신용보험 · 기관보험 · 기계보험 · 삼림보험 · 기상보험 등이 있다.
한편, 생명보험은 보험사고의 내용에 따라 사망보험 · 생존보험 · 양로보험 등으로 나누어진다. 그리고 특수보험은 사회보장제도의 하나로 실시되는 것으로서, 여기에는 보험산업 발전과 신용사회 창조를 위한 보증보험, 국민복지 향상을 위한 국민생명보험과 의료보험, 그리고 근로자의 업무상 부상 · 질병 · 사망 시에 지급해 주는 제도로서 보험가입 의무가 사업주에게 있는 산업재해보상보험 등이 있다.
이 밖에도 농업협동조합 · 수산업협동조합 · 해운조합 · 건설공제조합 등에서 운영하고 있는 공제사업이 있다. 공제사업은 농업 · 수산업 등 비슷한 직종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그 직종에서 발생하는 사고 · 재난에 공동으로 대처하기 위하여 사전에 자금을 축적하였다가 사고 · 재난 발생 때 지급 · 융자받는 제도이다.
우리나라에서 보험의 기원은 일찍이 고대부터 발전해 온 창(倉)이나 계(契)와 같은 원시 상호부조제도에서 찾아볼 수 있으나, 오늘날의 보험과 그 성질 · 내용 · 형태 등에서는 약간 차이가 있다. 우리나라 근대적 의미의 보험이 출현한 것은 강화도조약 체결 이후이다.
1876년(고종 13) 강화도조약을 계기로 조선의 문호가 개방됨으로써, 각 나라와 체결한 통상조약에 따라 외국의 금융기관과 상사(商社)가 대거 우리나라에 진출하게 되었다.
그런데 이들 대부분은 부업으로 자기나라 보험회사의 대리점 구실도 겸하였다. 특히, 1880년대 이후 외국 보험회사의 대리점에 의한 진출은 영국과 일본이 주류를 이루었으며, 또한 이들의 활동지역은 인천과 부산이 각각 중심이 되었다.
영국의 보험회사들은 아편전쟁을 계기로 중국대륙에 본점과 지점을 설치하고, 이를 발판으로 다시 일본과 우리나라에 대리점을 개설하였다.
이들은 주로 화재보험과 해상보험을 중점 경영하였으며, 이들의 한국대리점은 당시 외국상사인 세창양행(世昌洋行, E.Meyer & Co.) · 타운센드상회(W. D. Townsend & Co.) · 홈링거상회(Holme Ringer & Co.) · 이화양행(怡和洋行, Jardine Matheson & Co.) · 광창양행(廣昌洋行, W. G.Bennet & Co.) 등이 대표적이었다.
일본의 보험제도는 서구의 제도를 도입하여 뒤늦게 발전하였는데, 1879년 동경해상보험주식회사가 설립된 것으로부터 시작되어 1900년까지 일본은 보험회사의 난립기였다. 1900년에는 이를 규제하기 위하여 최초로 보험입법이 제정되기도 하였다.
일본 보험회사의 우리나라 진출은 매우 적극적이었는데, 1880년 동경해상보험주식회사가 제일은행 부산지점에 대리점을 개설한 것을 시작으로,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을 거치면서 우리나라에 대한 일본의 침략기반이 굳어짐에 따라 보험업법의 적용을 받지 않는 우리나라에 대거 진출하였다.
개항 이후 진출한 외국보험회사의 업종은 화재보험 · 해상보험 등 주로 손해보험이 중심이었으나, 생명보험 대리점도 일부 진출하여 우리나라에 있는 자국민들을 상대로 계약을 체결하였다. 생명보험의 진출은 일본의 제국생명보험회사가 1891년 부산에 대리점을 설치하면서부터 시작되었다.
1900년 이전까지 부산지방에는 영국과 미국의 생명보험회사 대리점도 여섯 개나 진출하였다. 특히 일본의 생명보험회사는 1900년부터 본격적으로 진출하여 1910년 경술국치 당시에는 생명보험회사의 출장소 및 대리점이 96개소에 이르고 있었다.
1910년 이후 일본이 우리나라 보험시장을 본격적으로 지배하게 되자, 상대적으로 영국 등 서구 보험회사의 활동은 일본 보험회사에 밀려 세력이 점차 약화되었다. 1915년 당시 우리나라에 개설된 총 967개의 보험사업소 중 겨우 51개만이 서구 보험회사이고, 나머지 915개가 모두 일본회사였다.
이때부터 손해보험과 생명보험은 각각 일본회사가 중심이 되어 연합조직을 결성하기 시작했으며, 시장조직도 처음의 대리점에서 출장소 또는 지점으로 확대되었다.
제1차세계대전 이후, 우리나라에도 본사가 설립되었는데, 그것은 1921년의 조선생명보험주식회사와 1922년의 조선화재해상보험주식회사였다. 조선생명보험주식회사는 금융기관의 자금사정을 호전시키기 위하여, 당시 한성은행 경영자인 한상룡(韓相龍) 등 우리나라 실업가가 중심이 되어 자본금 50만 원으로 설립한 것이다.
반면, 조선화재해상보험주식회사는 자본 구성면에서 보면 일본의 보험회사였다. 당시에 조선식산은행 · 동양척식주식회사 및 금융조합연합회 등이 창설되면서 그와 함께 화재보험 본사 설립도 강하게 요구되었는데, 이는 그들이 취득한 부동산 담보물을 화재보험에 가입해야 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한편, 보험회사의 설립과 운영은 원칙적으로 보험업법에 따라 이루어지는 것이 일반적이나, 일제강점기에는 이러한 법률이 존재하지 않았다. 당시에는 다른 산업과 마찬가지로 보험사업도 「조선회사령」의 규제를 받았지만, 이것으로 기술적인 보험산업을 실질적으로 규제, 감독할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보험업의 건전한 발전은 기대하기 어려웠다.
그 한 예로 1925년부터 1930년까지 생명보험계의 계약실적을 보면, 매년 신규계약은 급증했으나 부실계약 등으로 인한 중도해약 · 실효가 많아 매년 유지계약은 매우 저조함을 알 수 있다. 1930년대 이후 우리나라 보험시장은 일본 보험회사가 독점했으며 지점영업의 강화와 더불어 보험업에 대한 전시통제가 전시경제의 일환으로 이루어졌다.
우선 보험산업에 대한 정비 · 통합 책에 따라 조선생명보험주식회사와 조선화재보험주식회사를 제외한 일본 보험회사의 우리나라 지점은 손해보험 16개, 생명보험 19개로 대폭 감소되었으며, 보험자금 대부분은 전쟁자금으로 동원되었다. 특히, 이 기간에는 관영 생명보험인 조선간이생명보험(朝鮮簡易生命保險)이 전시경제의 일환으로 비약적인 발전을 거두었다.
조선간이생명보험은 1929년에 조선총독부 체신국이 주관하여 개설한 것인데, 놀랄 만한 성장률을 기록하였으며 이는 일제가 전비조달책의 일환으로 강제적 대량모집에 주력한 결과였다.
1945년 일본의 패망으로 보험회사의 지점들이 철수하였지만, 장기계약인 생명보험의 경우는 1945년 8월 15일 당시 유효한 계약에 대한 처리가 없었기 때문에 그 뒤에도 계속 문제가 되어 오다가, 한 · 일 국교정상화를 계기로 하여 대일배상 청구권의 일부로 처리되었다. 8 · 15 당시 우리나라 사람의 민영 생명보험계약은 99만 5974건에 이르고 있었다.
광복 후 극심한 사회 변동과 경제 혼란이 지속됨에 따라, 보험사업은 안팎으로 시련과 혼란을 겪는 시기에 접어든다.
1945년 12월 6일 「조선 내 소재 일본재산의 군정청 귀속에 관한 건」(법령 제33호)의 공포에 따라 조선화재보험주식회사를 포함한 일본 보험회사 지점의 재산은 군정청에 귀속되어 관리를 받게 됨으로써, 미군의 보험행정이 시작되었다. 그런데 보험업법이 제정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에 처음에는 법적 근거도 없이 보험회사 신규면허를 내주었다.
그 뒤 1947년부터 군정청 손해보험 고문관 스탠턴(Stanton,C.J.E.)의 지시에 의하여 일본의 보험업법이 도입, 적용되었다. 조선은행을 비롯한 각급 금융기관이 영업을 개시함에 따라 담보물의 화재보험 가입이 필요하게 되어, 1945년 12월 조선화재보험주식회사는 우리나라 사람으로 진용을 갖추어 새롭게 영업활동을 시작하였다.
그 뒤 화재보험회사의 증설이 더욱 필요하게 되자 1946년부터 1948년 사이에 8개의 회사가 더 신설되었다. 한편, 생명보험에서는 과거 일본 생명보험회사의 우리 나라 지점에 근무하던 사람들이 중심이 되어 군정청과 교섭, 보험금 반환을 시도하였으나 별다른 성과가 없었다.
그러한 가운데 1946년 대한생명보험주식회사를 비롯하여 3개의 회사가 더 설립됨에 따라 기존의 조선생명보험주식회사를 포함하여 4개 회사로 증가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업계의 증설에도 불구하고 사회 불안, 물가상승, 과거 생명보험에 대한 피해의식과 인식부족으로 시장 확대에는 어려움이 많았다. 또한 관영 생명보험인 조선간이생명보험은 광복 후 우리 정부에 의하여 국민생명보험으로 개칭되어 체신부에서 운영하였으나, 계약 건수가 대량 효력을 잃는 등 사업이 위축을 면하지 못하였다.
정부수립 이후 보험시장은 화재보험의 강제가입을 중심으로 경쟁이 일기 시작했다. 이때의 보험가입은 은행의 담보물과 귀속재산의 불하에 따른 화재보험 강제가입이 계약의 전부였다.
그리하여 여기에 대한 계약인수 계약이 집중되어 경쟁 배제를 위한 풀(pool)이 결성되었는데, 귀속재산에 대한 관재(管財) 풀의 협정이 준수되지 않아서 일시적으로 해체되는 파란을 겪기도 하였다.
이처럼 보험사업이 제도적으로 정착되지 않은 상태에서 6 · 25전쟁이 발발하게 됨으로써 우리나라의 보험산업은 더욱 크게 위축되었다. 전쟁기간 동안 생명보험은 완전히 자취를 감추었고, 다만 화재보험만이 부산 피난지역을 중심으로 은행을 따라다니면서 영업을 하였다.
당시 화재보험회사는 위험부담 능력이 부족하여 두 차례에 걸친 자본금의 증자가 있었다. 그런데 보험회사가 이러한 증자를 이행하지 못하여 결국 보험회사들의 통합 또는 일시적인 면허정지 사태까지 발생하였다.
이처럼 화재보험회사의 위험부담 능력의 부족 때문에 각 회사의 위험인수 한도를 제한하는 조치가 불가피하였다. 그리하여 1952년부터 회사별, 위험물건별로 등급을 새로 정하였다.
전쟁기간 동안 화재보험을 운영하는 데 가장 어려웠던 것은 두 차례의 화재사건에 대한 보험금 지급이었다. 하나는 1953년 1월 30일 부산 국제시장의 대화재로, 약 12억 원의 보험금이 지급되어야 하였고, 다른 하나는 1953년 11월 27일 부산역을 중심으로 한 지역의 화재로서, 이에는 앞의 것보다 더 큰 보험금이 보상되었다.
한편, 이 처럼 손해보험이 화재보험 단일종목에 대해서만 경쟁이 집중되자, 정부는 적하보험을 중심으로 한 해상보험을 운영할 것을 종용하였다. 그리하여 1953년 1월에는 손해보험회사가 공동으로 대한해상운송보험 공동사무소를 발족해서 처음으로 해상보험을 취급하였다.
보험시장이 재정비되는 한편, 변화도 많았던 시기는 1954년부터 1963년까지 10년 동안이다. 이 기간 동안 화재보험은 손해보험시장의 중심으로서 가장 경쟁이 치열한 분야였다. 이는 은행의 담보물과 귀속재산 등의 의무적인 화재보험가입이 가져 온 결과였는데, 특히 은행의 보험료 미납액이 매년 누적되었다.
한편, 1953년 대한해상운송보험 공동사무소에서 시작된 해상보험 분야는 1955년에 동방해상보험주식회사와 1959년에 범한해상보험주식회사가 더 신설되어 활발히 운영되었다. 이들은 주로 미국의 원조물자(ICA원조)에 대한 적하보험을 인수, 영업하였다.
선박보험은 1959년 9월 태풍 사라호에 의하여 25건의 보험사고가 발생하는 불운을 겪기도 하였다. 이 기간 동안 생명보험 분야도 정부의 적극적인 종용 덕분에 새롭게 정비되었다.
1954년부터 제일생명보험주식회사 · 동방생명보험주식회사 등 4개 회사가 신설되어 상품개발과 모집조직의 정비 등을 통하여 시장개척을 시도하여 1957년부터는 실질적인 영업에 들어갈 수 있었다.
그러나 전쟁 후에도 여전히 경제여건이 호전되지 못하고, 임금근로자 수가 적어 생명보험의 보급에는 애로가 많았다.
1950년대에는 공제사업(共濟事業)이라는 이름으로 실질적인 보험사업을 하는 단체들이 발족하기 시작하였다. 1955년에는 대한수산중앙회에서 어선공제사업이 실시되었고, 1958년 이후에는 한국해운조합에서 선주상호보험의 일환으로 선박공제와 여객상해공제가 실시되었다. 이로써 1960년대 이후 공제사업 발전에 바탕을 이루게 되었다.
한편, 이 기간 동안에는 홍콩 등 영국 무역회사의 국내 대리점을 중심으로 외국 보험회사들도 활발히 진출해 왔다. 특히 미국 계통 보험회사 단체인 American International Underwriters(AIU, 현재 AHA)는 주한미군과 외국인을 상대로 정식면허 없이 영업하고 있었다.
1950년대 후반에 이르러 보험시장이 전쟁의 상처를 딛고 겨우 재건, 정비되었지만, 1960년의 4 · 19와 1961년의 5 · 16군사정변으로 인하여 다시 한번 크게 위축되었다. 특히 생명보험은 치명적인 타격을 받았다.
이러한 가운데 1962년에는 보험업계에 대한 특별감사가 실시되어 자본금의 증자, 보험회사의 정비 · 통합, 국영 재보험회사의 설립 등을 통한 변혁조치가 단행되었다. 이것은 경제개발5개년계획 수행에 보험회사의 구실과 사명을 크게 기대했기 때문에 취하여진 조치로 평가되고 있다.
우리나라 보험산업이 정착되고 발전한 가장 중요한 시기는 1963년 이후부터 최근까지 20년 동안이다.
이 기간 동안 여러 차례에 걸친 경제개발계획이 성공하여 우리나라 경제가 비약적으로 성장하자, 보험산업도 그에 힘입어 크게 발전하였다. 이 기간에 있었던 특징 있는 사건으로는 재벌기업의 보험회사 인수, 「보험업법」의 제정, 보험산업의 근대화시책 등을 들 수 있다.
1960년대 재벌기업이 보험회사를 계열사로 인수하게 된 경위는 다음과 같다. 첫째, 재벌기업의 자기보험계약이 워낙 거액이므로 막대한 보험료가 외부로 유출되는 것을 막기 위한 이유였다.
둘째, 재벌이 소유하고 있던 은행주식이 정부의 조처에 따라 부정축재 환수금으로 국고에 귀속된 뒤 은행지배가 불가능할 뿐 아니라 자금융통도 쉽지 않았기 때문에, 새로운 자금조달의 원천으로서 보험회사를 인수하려고 하였다.
셋째, 1962년 말을 전후하여 보험회사가 합병된 뒤, 정부가 신규면허를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재벌의 보험회사 경영 참여가 기존회사를 인수하는 방식으로 나타났다.
한편, 1962년 1월 15일에는 우리나라에서도 처음으로 <보험업법>이 제정되었다. 이와 함께 「보험모집단속법」 · 「외국보험사업자에 관한 법률」 등 이른바 보험3법이 제정되기에 이르렀다.
그때까지만 해도 우리나라 보험업은 여전히 일제 및 미군정 법령에 의해 규제받고 있었기 때문에, 특히 제1차 경제개발5개년계획의 추진에 필요한 내자동원의 확대와 더불어 무질서한 보험업의 정비 및 근대화를 위해서 새로운 근대적 법령을 수립해야 했다.
「보험업법」의 제정 이후, 보험회사의 자금은 각종 국공채의 매입, 국민투자채권 등의 강제인수 등을 통하여 정부의 내자동원정책에 적극적으로 이바지하게 되었다.
그 뒤 1970년대 초 자본시장의 육성조치가 단행됨에 따라, 정부는 보험회사를 주식공급자 또는 기관투자가로 중시하여 일련의 기업 근대화시책을 전개하였다. 보험회사에 증권투자부 신설, 공동출자로 두 개의 증권회사 설립, 보험회사의 증권투자 촉진, 보험회사의 기업공개 등이 대표적인 예이다.
이러한 개발시책으로 인하여 보험산업 전반에 대한 감독행정을 1970년대 중반까지는 재무부 이재국 보험과에서 주관하였으나, 그 뒤 증권보험국 보험1과(생명보험) · 보험2과(손해보험)로 확대되었다.
또한 당시 「보험업법」이 지닌 많은 문제점 때문에, 1977년 12월 31일에 기존 보험3법을 통합, 전면 개정하여 현행 「보험업법」이 탄생되었는데, 그에 따라 1978년에는 한국보험공사가 설립되었다.
이로써 감독행정이 2원화됨과 동시에 더욱 강화되었다. 이와 같은 여러 가지 개발시책과 더불어 지난 20년 동안의 경제성장 및 사회구조의 변화로 보험시장도 큰 변화와 발전을 겪었다. 즉, 보험상품의 개발 및 개별보험상품이 시장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크게 달라진 것이다.
손해보험의 보험 종목별 시장점유율에도 많은 변화가 있었다. 금융담보물을 중심으로 했던 화재보험이 1964년부터 경쟁배제를 위한 풀체제로 전환됨에 따라, 상대적으로 해상보험과 자동차보험 및 기타 특종 보험이 크게 신장하였다.
해상보험은 1964년부터 전업체제에서 10개 회사로 다원화됨에 따라 경쟁이 생겼으며, 특히 대외무역의 성장에 의한 수출입 화물의 증가와 조선공업의 발달, 선박도입 등으로 선박보험이 크게 성장하였다.
자동차보험은 1957년에 설립한 한국교통보험주식회사가 도산하고, 1962년 1월 풀체제로 재건되었다. 1963년 4월 「자동차손해배상보장법」의 제정으로 자동차보험 가입이 의무화되고 더불어 그 뒤 자동차공업의 발전으로 차량 대수가 증가함에 따라, 자동차보험이 손해보험업계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급격히 상승하였다.
한편, 특종보험은 1963년까지 신용보험으로만 겨우 명맥을 유지하여 오다가 1964년 후반부터 상해보험 · 도난보험 · 항공보험 · 조립보험 · 건설공사보험 · 근재보험(勤災保險) 등이 대량으로 개발, 판매되었다.
1970년대에 들어와서도 손해보험의 양적인 성장 추세는 계속되었다. 특히 당시에 해외건설공사 등에 많은 인력이 진출함에 따라 근재보험이 크게 발전하였으며, 시장 · 주택 · 상가의 건설에 따른 화재보험, 각종 재해에 대한 상해보험의 수요도 급속히 증가하였다.
그리하여 손해보험사업은 자산면에서는 1970년에 257억 원이던 것이 1978년에는 12.8배가 늘어난 3,276억 원이 되었고, 수입보험료는 1970년의 143억 원에서 1978년에는 14.3배나 늘어난 2,046억 원으로 불어났다.
그런데 이처럼 지속적으로 양적 상승을 보여 온 손해보험시장에서 특기할 만한 사항은 1960년대 이후 독과점체제가 지속적으로 강화되었다는 사실이다. 독과점 현상이 강화된 것은 특히 화재보험 분야였다. 이러한 사정 아래에서 보험소비자의 불만은 고조되었지만 아직 조직적인 운동 차원으로는 전개되지 못하고 있다.
생명보험은 1962년부터 「국민저축조합법」에 의한 단체 보험시장의 개척으로 1970년 후반까지 비약적인 상승세를 보여 주고 있다.
생명보험의 보유 계약고는 1962년 말에 312억 원이었던 것이 1982년 말에는 15조 9248억 원을 상회하기에 이르렀고, 자산은 이 기간 동안 20억 원에서 2조 2864억 원으로 증가하는 등 눈부시게 양적 성장을 이루었다.
한편, 관영보험인 국민생명보험사업도 경제개발의 여파로 크게 성장, 발전하였다. 1962년에서 1974년에 이르는 기간 동안 계약 건수가 무려 4.5배나 급상승하였으며, 그 사업규모가 매우 방대하였음을 알 수 있다.
다른 한편, 1960년대 이후 공제사업도 실질적으로 보험사업을 함으로써 민영 보험시장의 영역을 위협하게 되었다. 공제사업은 대한수산중앙회 · 한국해운조합 외에 1961년부터 농업협동조합중앙회에서 화재공제와 생명공제를 전국적인 조직을 통하여 운영하였고, 수산업협동조합중앙회 · 건설공제조합 · 대한교원공제조합 등에서도 운영하였다.
이 시기에 외국 보험회사는 정식면허 없이 영업하는 경우가 많았으나, AIU 등은 1968년에 면허를 받았다. 외국자본의 국내 진출 및 개방경제 체제의 확대로 특히 미국보험회사를 중심으로 국내 진출이 적극적으로 시도되고 있다.
1998년 9월 우리나라 생명보험 회사는 총 29개, 손해보험 회사는 총 17개 사이다. 생명보험사 중에 1998년 8월 보험산업 구조조정시 고려, BYC, 태양, 국제 등 4개 사가 퇴출되어 분리, 33개 사에서 29개 사로 정리되었다. 손해보험사는 11개 원보험사, 1개 재해보험사, 2개 보증보험사, 3개 외국보험사로 구성되어 있다.
국내의 손해보험회사는 1998년 7개 회사이다. 이들 회사 외에 전업회사로서 한국자동차보험주식회사(현 DB손해보험) · 대한보증보험주식회사(현 SGI서울보증) 및 대한재보험주식회사(현 코리안리재보험) 등도 이에 속한다.
또한 손해보험의 유관기관으로는 한국자동차보험주식회사(현 DB손해보험) · 대한보증보험주식회사(현 SGI서울보증) 및 대한재보험주식회사(현 코리안리재보험) 등 3개 단체가 있다. 대한손해보험협회는 손해보험 사업자의 단체이며, 한국화재보험협회는 금융기관 담보물 및 기타 강제가입 화재보험을 전담인수하는 기관이다.
한국손해보험료율산정회는 손해보험사업자들의 협정료율을 산정하는 기관으로서 1974년 해체되었다가 1983년 12월에 다시 발족되었다.
1983년 손해보험 13개 회사가 1998년에는 17개, 자산총액은 회계연도 말인 1983년 3월 말 현재 약 9,200억 원이며, 이 가운데 운용자산은 61.0%로 극히 낮은 비율을 차지하였고, 1989년 3월에는 2조 6400억 원으로 운용자산은 81.9%로 증가하였다.
이는 손해보험회사가 자산 구성면에서 미수금, 기타 비활동자산을 상대적으로 많이 보유하고 있음을 입증하는 것이다. 그리고 회계기간인 1982년 4월 1일부터 1983년 3월 31일까지 손해보험 전체의 원수수입보험료(原受收入保險料)는 6,334억 원인데, 이중 자동차보험의 수입보험료가 2,152억 원으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였다.
1988년 4월 1일에서 1989년 3월 31일까지 손해보험 전체의 원수수입보험료는 1조 8900억 원인데, 이 중 자동차보험의 수입보험료는 9812억 원이다. 그 다음으로는 해상보험, 화재보험, 특종보험, 장기보험, 보증보험의 순으로 되어 있다.
한편, 손해보험의 보험종목별 손해율은 계약 건수와 양이 적기 때문에 월별 또는 연도별로 큰 기복이 있다. 1982년 사업연도를 기준으로 할 때, 화재보험 60.5%, 해상보험 61.5%, 자동차보험 82.8%, 특종보험 86.0%, 장기보험 17.9%이다. 1988년을 기준으로 할 때 화재보험 35.7%, 해상보험 58.9%, 자동차보험 70.2%, 특종보험 47.8%, 장기보험 8.0%이다.
이처럼 전반적으로 보험사고의 발생에 의한 손해율이 높은 이유는 위험 선별능력이 부족하고 해외보험을 재보험(再保險)으로 인수할 경우, 정보 부족으로 불량 보험계약을 많이 인수하기 때문이다.
손해보험 모집시장의 구조는 한국화재보험협회 · 원자력보험 · 보세보험 등과 같이 풀제도에 의하여 계약인수가 독점적으로 취급되고 있는 것과 보험회사의 영업부에서 직접 취급하는 것, 그리고 대리점조직에 의한 것으로 구분되어 있다.
손해보험 시장을 확장하기 위해서는 대리점의 활동이 활발히 전개되어야 하지만, 우리나라에서는 풀제도와 본사의 직접취급에 밀려 대리점의 활동이 상당히 위축되어 있다.
1983년 말 현재 대리점 수는 3,683개로 이 가운데 서울에 2,348개소가 집중되어 있고, 1988년 말에는 대리점이 1만 6465개소로 증가하였다. 1978년 한국보험공사가 대리점의 문호를 개방한 것을 계기로 그 뒤 수적으로는 크게 증가하였으나, 시장여건이 성숙되지 않아 대부분의 대리점 운영실적은 저조한 편이다.
생명보험회사는 1960년대에 정비된 뒤, 1998년에 이르기까지 29개 사의 체제가 그대로 유지되고 있다. 손해보험과 비교할 때 생명보험은 수적으로는 적지만 고도의 성장을 지속해 왔다.
생명보험 관련단체로서는 생명보험협회 · 한국보험계리인회 · 한국생명보험의학회 등이 있다. 생명보험협회는 생명보험 사업자의 단체이며, 한국보험계리인회는 생명보험회사에 종사하는 보험계리인 전문가 단체이다.
한국생명보험의학회는 생명보험계약자의 건강조사와 신체검사 및 위험선택을 담당하는 사의(社醫)와 지방의 촉탁의가 중심이 된 의료단체이다.
생명보험회사의 보험상품은 이름은 극히 다양하지만, 내용으로 구분하면 생존보험 · 사망보험 및 양로보험으로 대별되며, 가입 형태별로 개인보험과 단체보험으로 나누어진다.
1983년 3월 말 생명보험업계의 보유계약고는 22조 7507억 원인데, 그 가운데 생존보험은 18.5%, 사망보험이 33.3%, 그리고 양로보험이 36.2%로 구성되어 있다. 1989년 3월말 현재 보유계약고는 182조8239억 원인데 그 중 생존보험은 24.8%, 사망보험이 36.1%, 양로보험은 32.3%로 구성되어 있다.
또한 1989년 3월의 경우 개인보험과 단체보험을 비교하면 계약 건수에는 개인보험이 1,540만 건 단체보험은 880만 건이고, 보유계약고는 개인보험의 건당 보험계약 금액이 고액이기 때문에 높은 비율을 차지하고 있다.
한편, 우리나라 생명보험회사 전체의 총자산은 1989년 3월 말 17조 550억 원이며, 이 가운데 운용자산이 96.7%로서 손해보험에 비하여 매우 높은 운용률을 나타내고 있다. 총자산의 구성비율은 현금 및 예금 9.3%, 유가증권 25.5%, 대부금 55.1%, 부동산 6.8%, 기타 자산 3.3%이다.
생명보험업계는 본사 조직 이외에 전국적으로 영업점포와 수많은 모집인을 보유하고 있다. 1983년 3월 말 지사 · 영업소 등의 점포수는 4,073개이며, 이 가운데 서울에 1,268개소가 있고, 1989년 3월 말에는 점포가 6,502개소로 늘어났다.
생명보험의 모집인은 약 17만 5000명에 이르고 있다. 그러나 대량모집과 대량탈락이 반복되는 가운데 모집인의 이동과 수의 변동은 매우 유동적이다.
1985년 현재 우리나라에는 8개 손해보험회사와 7개 생명보험회사 등 15개의 외국 보험회사가 진출해 있었다.
7개의 생명보험회사 대리점의 경우는 국내주재 외국인만을 대상으로 영업하고 있으나, 손해보험의 경우에는 지속적 · 단계적으로 영업 범위를 확대해 옴으로써 보증보험취급 · 특수건물화재보험 풀참여 등을 통하여 국내기업과 거의 동등하게 영업하였다.
그 반면 우리나라 보험회사의 해외진출 현황을 보면, 1970년대에 들어서면서 시작되었는데, 1985년 10월 손해보험회사의 경우 지점 4개, 현지합자 2개, 현지법인 1개, 주재사무소 10개 등이 진출하여 주로 현지교민과 현지진출 국내 건설업체를 대상으로 영업활동을 하거나 업무연락 · 정보수집 등, 한정된 업무를 하고 있으며, 생명보험은 해외진출이 전무한 상태이다.
앞으로 우리의 보험산업이 지금까지와 같이 괄목할 상태로 발전을 이룰지는 미지수이다. 왜냐하면 앞으로의 사회 발전에는 보험산업의 발전을 위한 촉진요인과 저해요인이 동시에 내포되어 있기 때문이다.
촉진요인으로는 소득의 증가, 보험에 관한 기술발달, 사회생활이 복잡해짐에 따른 보험의 필요성 증대 등을 지적할 수 있다. 저해요인으로는 사회보장제도의 발달에 따른 민영보험과의 경쟁, 보험산업에 대한 정부의 규제강화, 공제사업 · 외국보험회사 등의 시장침투, 보험소비자운동의 고조 등을 내세울 수 있다.
그 동안 보험산업의 양적 팽창과 함께 내적 부실이 문제되어 왔다. 1998년 8월에 단행된 보험업 구조조정에서는 부실 운영으로 생존이 불가능하다고 판단된 4개 생보사가 정부에 의해 퇴출됨으로써 보험업도 내실을 가하지 않을 수 없는 세대를 맞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적어도 당분간은 규모면에서 양적인 성장을 지속할 것으로 전망된다. 이와 더불어 질적 변화 및 향상이 여러 면에서 요청될 것이다. 따라서 여기에서는 보험산업의 발전을 위하여 반드시 극복해야 할 몇 가지 과제를 검토해 보고자 한다.
첫째, 보험시장 독과점체제의 문제이다. 우리나라에서 보험산업은 다른 어느 산업보다도 독과점체제를 오랫동안 유지해 왔다. 더욱이 정부의 엄격한 면허규제로 이러한 상황은 더욱 강하게 지속되었다.
1982년 이후 정부의 정책도 화재보험과 자동차보험에서 일부 자유경쟁을 요구하고 있지만, 보험료율과 기타 사업자간의 카르텔행위는 대부분 그대로 지속되고 있다.
이러한 보험산업의 폐쇄성은 외국 보험회사의 국내영업을 위한 개방요구와 더불어 국내시장의 자유경쟁을 저해하고 있다. 국제경쟁력 배양이 각종 산업에서 요구되는 이때에 보험산업도 시장 개방정책이 절실히 요망된다.
둘째로, 소비자보호 문제이다. 보험가입자의 보호를 위하여 많은 논의가 있지만, 일반적인 소비자운동에 편승한 보험소비자의 불만해소와 보호대책은 아직도 미흡한 실정이다. 보험소비자 보호는 보험상품의 질과 내용, 보험약관, 보험료율, 서비스 등의 측면에서 문제가 되고 있다.
이것은 특히 기업보험보다는 가계보험인 생명보험에서 더욱 문제가 되고 있다. 생명보험에서는 모집제도의 개선, 해약환급금(解約還給金), 보험상품의 잦은 개폐, 고지의무(告知義務)를 중심으로 한 분쟁, 계약자배당의 빠른 실현, 보험계약 취소 청구제도의 강화 등이 과제가 되고 있다.
셋째로, 보험기술의 향상이다. 보험기술은 상품개발, 합리적인 보험료율의 산출, 위험선택 및 관리와 투자 등 여러 부문에서 발전해야 할 필요가 있다. 보험산업은 장기간의 독과점과 정부의 보호시책에 힘입어 이러한 점을 매우 소홀하게 취급해 왔다.
따라서, 양적인 고도성장과정에서 보험기술의 후진성과 낙후성은 보험소비자의 보호와 직접 관련되고 있다. 결국 앞으로는 소비자 주권 문제가 새로운 시대적 과제로 등장할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