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여 구아리 백제 유적 ( )

목차
선사문화
유적
국가유산
충청남도 부여군 부여읍에 있는 삼국시대 백제의 유물산포지. 천황사터 · 생활유적.
시도자연유산
지정 명칭
부여구아리백제유적(扶餘舊衙里百濟遺蹟)
분류
유적건조물/인물사건/역사사건/역사사건
지정기관
충청남도
종목
충청남도 시도기념물(1993년 07월 20일 지정)
소재지
충남 부여군 부여읍 구아리 64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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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요약

부여 구아리 백제 유적은 충청남도 부여군 부여읍에 있는 백제의 유물산포지로 천황사터로도 알려진 유적이다. 1944년 천왕명 수막새와 연화문 수막새편, 1966년 동제귀형식판, 천왕사명 기와 등이 발견되며 주목받다가 1992년에 발굴조사가 실시되었다. 발굴 당시 추정수로시설과 2기의 우물시설이 발견되었다. 남북으로 360cm 거리를 두고 구축된 우물은 북편 우물 수위가 일정한 높이까지 차 오르면 목제홈통을 통해 남편 우물터로 흐를 수 있도록 고안되었다. 우물터 내부와 주변에서 다량의 유물이 출토되어 백제시대 생활사 연구에 중요한 자료로 평가된다.

목차
정의
충청남도 부여군 부여읍에 있는 삼국시대 백제의 유물산포지. 천황사터 · 생활유적.
내용

1993년 충청남도 기념물로 지정되었다. 1944년 경찰서 신축과정에서 '天王(천왕)'명 수막새와 연화문 수막새편이 출토되어 일본인들에 의해 발굴조사가 실시되었다. 그러나 보고서가 발간되지 않아 정확한 것은 알 수 없었다.

당시 이 곳에서는 중앙에 방형의 이중공(二重孔)이 있는 방형목탑심초석으로 알려진 석재와 천왕명 수막새가 확인되어 이 곳이 천왕사터로 알려지는 계기가 되었다.

또한 1966년에 상수도 송수관공사 때 인접도로변에서 동제귀형식판(銅製鬼形飾板)이 출토되어 중요한 유적지로 주목받았다.

천왕사는 《삼국사기》 의자왕 12년조에 동사찰 기사가 실려 있어 문헌에 있는 백제 사찰의 위치가 확인된 점에서 관심을 모으기도 했다. 그러나 부여읍 남동편의 금성산(金城山) 중턱에 자리한 건물지 조사에서도 천왕사(天王寺)명 기와가 발견됨으로써 원 천왕사의 위치문제는 재검토가 요구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1991년 새 청사 신축에 따른 경찰서의 이전으로 일제 때 건축된 구 건물이 헐리게 되었다. 이에 그 동안 중요 유적으로 주목되어 왔지만 성격이 밝혀지지 않은 전(傳) 천왕사지에 대한 조사의 필요성이 제기되었다. 1992년 9월 18일∼12월 6일 부여문화재연구소에 의해 발굴조사가 실시되었다.

이 유적을 둘러싼 주변은 도로망이 직교형으로 잘 조성되어 있다. 유적은 그 중 간선도로 일부에 해당하는 중앙로의 북편지역에 있다. 유적은 금강의 우회부에 있다. 유적을 중심으로 북편은 표고 106m의 부소산이 금강에 임해 자리하고, 남편은 시가지와 충적저지대가 형성되어 있다. 동편은 금강에 연해 길게 내려오는 표고 50∼250m의 구릉성 저산지를 이루고 곳곳에 자연촌락이 형성되어 있다. 서편은 금강을 건너 약간의 범람원 충적저지가 형성되어 있고 대부분이 차령산맥의 지맥으로 구릉성 저산지를 이루고 있다.

조사는 이 유적 범위 중 발굴이 가능한 1,500평 중에서도 700여 평만 이루어졌다. 이 유적은 일제 때부터 출토유물과 관련되어 천왕사터로 추정되었다. 그러나 조사 결과, 절터나 기타 건물지와 직접 관련시킬 수 있는 유구는 확인되지 않았다. 다만, 추정수로시설과 2기의 우물시설이 발견되었다.

추정수로시설은 동북방향에서 남서방향으로 가로지르는 폭 2∼3m 정도의 물이 흐를 수 있는 시설로 확인되었다. 이 추정수로는 발굴지역의 한계로 전체적인 조사가 이루어지지 않아 수로의 성격이나 전체 흐름방향에 대해서는 확실한 결과를 얻을 수 없었다. 그러나 확인된 수로의 주변 지형이 부소산에 가까울수록 점차 높아지고 있는 점은 수로의 상면이 지형을 따라 높아지고 폭도 좁아져 물이 흐를 수 있는 기능이 보다 컸던 것으로 판단된다.

추정수로 상면은 잔존 구지표(성토층) 상면의 150∼180cm상에서 드러났다. 동북편으로 가면서 점차 높아지고 있었다. 수로 내부에 충전된 유기물층과 뻘층과 유사한 회 · 연두색계의 부식토층은 자연침전물 등에 의해 매몰된 것으로 조사되었다. 이 바닥에 가까운 유기물층에서는 백제 선문경질토기편 1편이 발견되었을 뿐 다른 유물은 발견되지 않았다. 따라서 이 추정수로는 백제의 사비천도 전후 또는 천도 이전시기에 만들어졌다가 그 기능이 상실되면서 오래 존속되지 못하고, 자연적인 침전과 토사밀림 등으로 매몰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2기의 우물시설은 모두 추정수로 바닥면인 풍화암반층을 깊게 판 뒤, 기초를 닦고 석축을 쌓아올렸다. 규모는 북편 우물지가 동서 약 515cm, 남북 약 325cm, 남편 우물터가 동서 약 251cm, 남북 약 257cm 정도이다. 북편 우물터는 모두 석축으로 구축되었다. 반면, 남편 우물터는 하부가 석축으로 구축되고, 상부는 폭 6cm의 판목(板木)을 4단으로 짜 올렸으나 원래 몇 단이었는지는 정확하게 알 수 없으며, 네 모퉁이는 널판을 교차시켜 유동이 적게 배려하였다.

이 두 우물터는 남북으로 360cm 거리를 두고 구축되었다. 그러나 상면에는 목제홈통을 서로 연결해 물매를 둠으로써 북편 우물 수위가 일정한 높이까지 차 오르면 이 목제홈통을 통해 남편 우물터로 흐를 수 있도록 고안되었다. 따라서 남편 우물터는 정화수 기능을 갖춘 셈이다.

유물은 북편 우물터 내에서 수막새, 방추차, 등잔, 토기, 완, 파수부호, 토제벼루, 납석제 용범, 납석제 전, 목기류 2개 체분, 씨앗류 등이 출토되었다. 남편 우물터 내에서는 수막새, 서끼래기와, 등잔, 토기완, 소호 등이 출토되었다. 2기의 우물터는 출토유물로 보아 백제시대에 구축되어 백제가 쇠망하면서 함께 폐쇄된 것으로 여겨져 백제시대 생활사 연구에 중요한 자료로 평가된다.

발굴조사에서 건물지와 관련된 유구의 흔적은 발견되지 않았다. 그러나 우물터 내부와 주변에서 출토된 다량의 유물로 보아, 사찰이 아니라도 관부(官府)나 기타 그와 유관한 건물이 주변에 자리잡고 있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참고문헌

『부여구아리백제유적발굴조사보고서』(부여문화재연구소, 19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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