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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대의혹사건(四大疑惑事件)

    정치사건

     5·16군사정변 이후의 군사정권 밑에서 발생하였던 네 가지의 부정부패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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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새나라자동차 / 4대 의혹사건
    분야
    정치
    유형
    사건
    성격
    정권비리
    관련자
    김종필
    시대
    현대
    영역닫기영역열기 정의
    5·16군사정변 이후의 군사정권 밑에서 발생하였던 네 가지의 부정부패사건.
    영역닫기영역열기내용
    증권파동·워커힐사건·새나라자동차사건·빠찡꼬사건을 일컫는다. 이 사건들은 대개 군정의 고위층과 관련이 있는 것이었으나 그 진상이 명백히 규명되지 못한 채 국민들에게 짙은 의혹만을 남겨 놓았다. 부정부패의 척결과 구악일소를 혁명공약으로 내걸었던 군사정부는 혁명과업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여러 차례 시행착오를 거듭하여 신악(新惡)이라는 유행어를 만들어내기도 하였다.
    그러나 시행착오 가운데에서도, 1963년 2월 15일 군정의 제2인자였던 김종필(金鍾泌) 초대 중앙정보부장을 외유의 길로 떠나게 한 직접적 원인이 되었던 것이 바로 ‘4대의혹사건’이었다. 이 사건들은 1964년 초 제3공화국의 국회에서 야당 측의 정치공세로 국정감사까지 받았다.
    증권파동은 5월 증권파동이라고도 하고, 1962년 5월을 전후하여 일부 증권업자에 의하여 대한증권거래소 주식(일명 대증주) 등 주력주(主力株)가 매점되고 주가조작을 겸한 투기가 과열되어 결재일에 가서 주식거래대금이 결재(決裁)되지 못하여 일어난 일련의 사태를 말한다. 증권파동이 발생하게 된 배경은 1961년 말부터 시작된 대대적인 투기적 ‘증권붐’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러한 ‘증권붐’은 5·16군사정변 이후 정부의 적극적인 증권시장육성책과 국영기업체의 배당률 상승전망 등에 힘입어 증권시장은 활기를 띠게 된 반면, 주식의 공급이 과소하여 주가를 자극하면서부터 투기자금, 즉 유휴자금·대기성자금·사채자금 및 중소상공업자의 사업자금까지 증권시장에 집중되어 주식 수요증가가 주가를 계속 상승하게 만들면서 시작된 것이었다.
    그런데 이러한 증권붐의 와중에서 그 당시 막후의 권력기관이었던 중앙정보부와 증권업자가 결탁하여 윤응상(尹應相)을 중심으로 통일(統一)·일흥(日興)·동명(東明) 등 3개의 증권회사를 창설하였다. 그런데 이들은 증권거래소를 실제적으로 장악하여 무모한 주식매진행위를 감행, 주가를 폭등시켰지만, 결국 수도자금(受渡資金)이 고갈되어 증권파동을 몰고왔다.
    군사정부는 이를 타개하기 위하여 금융통화위원회로 하여금 대출을 승인하게 하는 등 수습을 시도하였지만, 증권파동의 주역으로서 매진(買進)과 투매(投賣)로 책동전(策動戰)을 벌였던 증권회사는 물론 일반의 영세한 투자자들에게도 엄청난 재산상의 손실을 가져다주었다. 투자자 중에는 패가망신하여 심지어 자살한 사람들도 있을 만큼 사회적으로 커다란 파문을 몰고 온 사건이었다. 당시 국가재건 최고회의 의장이었던 박정희(朴正熙)는 특명으로 이 사건을 조사하게 하여 윤응상 등이 「임시조치법」 위반혐의로 입건되기도 하였다.
    워커힐사건은 주한 유엔군의 휴양지를 만들어 외화를 벌어들이겠다는 김종필의 착상으로 1961년석정선(石正善) 중앙정보부 제2국장 등이 주축이 되어 서울특별시 성동구 광장동에 워커힐호텔을 세우면서 일어난 사건이었다. 이들은 교통부가 워커힐호텔의 건설을 주관토록 조처하였고, 워커힐호텔 건설공사가 자금난으로 부진해졌다.
    그러자 교통부장관 박춘식(朴春植)과 관광공사 사장 신두영(申斗泳) 등은 워커힐호텔 건설과는 아무 관련이 없는 정부주금(政府株金) 5억3590만9795원을 워커힐호텔 이사장인 임병주(林炳柱, 당시 중앙정보부 제2국 1과장, 중령)에게 가불케 하여 워커힐호텔을 건립하게 하였고, 그 과정에서 막대한 공작자금이 유용되었다.
    더욱이 교통부장관과 각 군의 공병감들에게 압력을 가하여 각종 장비를 제공하게 하고 인력을 노역시키는 등 정부의 무리한 공권력행사가 행하여진 대표적인 사례였다. 이 사건으로 석정선·임병주·신두영 등이 서울지검에 구속되기도 하였다.
    새나라자동차사건도 워커힐사건과 유사한 유형의 사건이었다. 1961년 10월, 국가재건 최고회의 의장 박정희의 특사자격으로 대만을 방문한 김종필은 대만 자동차공업의 발전상을 보고 우리 나라에도 자동차공업을 육성해야겠다고 생각하였다.
    같은 해 12월 한일회담을 위하여 일본에 건너간 김종필은 재일교포 실업가인 야스타상사주식회사(安田商社株式會社) 사장 박노정(朴魯禎)과 만나 자동차공업에 대한 의견을 교환한 뒤, 그 회사 전무인 안석규(安奭珪)를 국내로 불러들였다. 안석규는 당시 중앙정보부 차장보였던 석정선의 도움으로 우리 나라에 새나라자동차공업주식회사를 설립하였다.
    정부에서는 400대의 관광용 자동차의 수입 및 판매를 새나라자동차공업주식회사에게 맡겼으나, 그 400대의 수입허가절차를 밟는 과정에서 석정선이 공권력을 남용하여 물의를 빚었다. 이에 1963년 4월석정선 등은 업무상 횡령·협박·증여 혐의로 육군고등군법회의에 구속, 송치되었다.
    이 사건은 국산 자동차공업을 발전시킨다는 명목으로 일본 자동차를 수입하는 등 막대한 예산을 낭비하였으나, 결과적으로 국산 자동차공업도 제대로 발전시키지 못하고 도리어 횡령 등 부정행위를 초래하였다는 점에서 책임의 소재가 규명되어진 것이다.
    빠찡꼬사건은 자유당이나 민주당정권하에서는 엄하게 금지되어왔던 도박성을 띤 회전당구, 즉 빠찡꼬가 군사정권하에서 국내에 반입되어 세간의 의혹을 불러일으킨 사건을 말한다. 1961년 12월 중순쯤, 재일교포 김태준(金泰俊) 등이 세칭 빠찡꼬라고 불리는 회전당구대 100대 등을 부산항에 탁송하고 통관에 필요한 귀국증명서 1통을 위조해 재일교포 재산의 국내 반입인 것처럼 속여 국내에 들여왔다.
    군사정부의 계엄통치하에서 도박성이 있는 빠찡꼬가 횡행하자 세간의 여론이 비등(沸騰)해졌다. 이에 당국은 회전당구장 영업허가를 취소하기에 이르렀고 김태준 등은 관세법위반의 혐의로 1963년 3월수도방위사령부 보통군법회의에 송치되었다.
    제3공화국이 들어서기 직전 한동안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4대의혹사건’은 1963년 12월 민정이양이 실시되자 국회의 국정감사까지 받았던 사건이었지만, 엄청난 자금의 행방은 끝내 밝혀지지 않은 채 역사의 흐름 속에 묻혀 버리고 말았다. 이러한 부정부패는 공화당정권이 경제발전으로 자신들의 정당성을 확보하려는 수차에 걸친 경제개발계획의 추진과정에서도 완전히 척결되지 못한 채 확대재생산되어 우리 나라 정치문화의 부정적인 유산으로 남게 되었다.
    영역닫기영역열기 참고문헌
    영역닫기영역열기 집필자
    집필 (1995년)
    윤세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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