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9혁명 ()

마산 앞바다에서 발견된 김주열의 시신
마산 앞바다에서 발견된 김주열의 시신
정치
사건
1960년 4월, 학생이 중심세력이 되어 일으킨 민주주의혁명.
이칭
이칭
4월 혁명, 4·19의거
• 본 항목의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통해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내용 요약

4·19혁명은 1960년 4월, 학생이 중심세력이 되어 일으킨 민주주의혁명이다. 1950년대 말에 반공 이념과 경찰력이란 물리력에 의존하던 이승만식 독재가 한계를 드러내면서 도시지역과 지식인·학생 등 식자층에서는 민주주의에 대한 갈망이 높아져 갔다. 부정선거를 통하지 않고는 정권연장이 불가능한 상황에 이르러 3·15부정선거를 공공연히 자행하자 학생들을 선두로 한 민심은 폭발했고, 시위대에 대한 경찰의 발포도 이를 막지 못했다. 이승만의 하야와 망명으로 독재는 종식됐으나 지도부 부재 등 준비되지 않은 혁명은 완성되지 못한 채 군사 쿠데타의 길을 터주었다.

정의
1960년 4월, 학생이 중심세력이 되어 일으킨 민주주의혁명.
개설

4월혁명, 4·19의거라고도 한다.

4·19혁명의 배경

1948년 대한민국정부가 수립되었을 당시에는 민주적 가치와 실행에 대한 믿음이 한국사회 내의 모든 사람들에게 널리 퍼져 있지 못하였다. 그러나 정부의 실제 행동이 더욱 비민주적으로 되어가고 대규모의 부정선거가 자행됨에 따라 이승만정권의 독재를 규탄하고 많은 사람들이 자유롭고 공정한 선거를 요구하게 되었다. 이와 같은 국민의식의 민주화는 대체로 광범위한 민주적 교육과 6 · 25전쟁 후 급속한 도시화의 결과이다.

1945년 이래로 민주주의 교육이 초등학교중등학교에서 중요하게 다루어졌고, 도시 또는 준도시 사람들이 대중매체를 널리 접촉할 수 있었음은 한국인에게 민주주의의 가치를 인식시키는 좋은 구실을 하였다. 이러한 민주주의 정치교육의 긍정적 결과는 많은 조사결과 젊은층들이 기성세대들보다 좀더 민주적으로 전향되었음이 발견되었다는 사실에서 알 수 있다.

도시화는 일반국민의 민주적 사회화와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 1952년 남한 인구의 17.7%만이 인구 5만 이상의 도시에 살았다. 그러나 이는 1955년에 24.5%, 1960년에는 28%로 늘어났다. 이러한 급속한 도시화는 확장된 교육, 6 · 25전쟁 중 지역에 인구학적 안정의 붕괴, 그리고 사회의 일반적 상업화 등에 기인한다. 정치세력이 여당인 자유당과 야당인 민주당으로 양극화됨에 따라 유권자들은 각자의 정치의식의 수준에 따라 누구를 반대하고 누구에게 투표하여야 할 것인가를 쉽사리 알 수 있었다.

비교적 유동적인 사람들에게는 그들이 새로이 얻은 민주적 가치를 확인하는 가장 쉽고 뚜렷한 유일의 방법은 비민주적으로 행동하는 여당과 그 후보자들에 대해서 반대투표를 하는 것이었고, 정부에 반대하는 사람들에 대해서 지지표를 던지는 것이었다.

1958년 의원 선거에서 자유당 출신의 의원은 인구 5만 이상의 도시에서 오직 13명만 당선되었으나 민주당은 43명이 선출되었다. 반면, 나라 전체를 볼 때 민주당의 79석에 비하여 자유당은 총 126석을 얻었다. 1956년 대통령 선거에서 이승만(李承晩)은 나라 전체로 볼 때 56%의 지지를 받았으나 서울에서는 38%밖에 지지를 받지 못하였다. 도시지역에서 자유당의 약세는 대도시에서 부정선거를 비교적 쉽게 저지를 수가 없었다는 데 기인하고 있다.

하여튼 중요한 점은 이른바 ‘준봉투표(conformity votes)’가 비도시 지역에서 팽배하였다는 것이다. 그러나 사회화와 도시화의 증대에 따라 이러한 ‘준봉투표’는 급속히 감퇴하여갔고, 이러한 현상이 자유당으로 하여금 더 ‘비민주적’ 수단을 강구하도록 부추겼던 것이다. 자유당이 더욱더 강압적 수단을 동원하면 할수록 공정한 선거에서 대중의 지지를 얻을 기회는 그만큼 더 줄어들었다.

1950년부터 1960년 사이에 이승만의 추종자들은 이승만과 그의 정권에 대한 지지를 획득하기 위하여 여러 문제를 내어서 대중시위를 조작해 내었다. 국토를 양분시켰던 공산주의자들과의 휴전협정을 반대하는 대중시위와 행진, 1952년에서 1956년의 기간 중 이승만을 재선에 나서도록 부추겼던 대중시위, 일본 당국의 재일교포 북송결정에 항의하는 대중집회 등이 그것이다.

이러한 관제대중 동원은 1950년대 초반기 동안 어느 정도까지는 이승만의 인기를 회복시키고 유지시켜줄 수가 있었다. 그러나 1950년대 후반에 접어들어 국민들 사이에 이승만의 개인적 인기는 사라졌고, 그의 권력은 오로지 경찰의 강제력에 의하여 유지되지 않으면 안되었다.

4·19혁명의 원인

1960년 3월 부정선거가 극에 달하였다. 이때 실제적으로 많은 공무원들이 이승만의 당선을 위하여 동원되었다. 이전의 선거에서는 경찰의 개입이 후보자등록 · 선전활동 · 투표과정에 국한되어 있었는데 반하여, 내무부와 각 도의 경찰이 이제 실질적인 선거본부가 되어 투표총계를 조작하고 날조하였던 것이다. 1960년 많은 국민들은 민주당 대통령 후보인 조병옥(趙炳玉)의 죽음으로 다시 실망에 빠졌다.

조병옥은 선거에서 이승만의 강력한 대적자로 여겨졌었다. 다른 강력한 대적자가 없는 마당에서 이승만의 재선은 확고한 것이었다. 당시 이승만의 적수가 없었으므로 대통령 선거보다 부통령의 경합이 보다 중요한 문제로 등장하였다. 이렇듯 실제 싸움은 현직 부통령인 장면(張勉)과 이승만이 밀어주는 후보자 이기붕(李起鵬) 사이에 벌어졌다.

선거전에서 야당선거원들은 계속해서 체포되고 탄압을 받았다. 반공청년단의 폭력단원들이 선거 당일 시민들이 투표권을 어떻게 행사하는가 감시하기 위하여 각 투표장에 나타났다. 많은 농촌지역에서는 3인조 · 9인조 등의 ‘조’가 형성되었고, 자유당에 대한 충성심에 의심의 여지가 없는 자가 각 조의 ‘조장’이 되어 ‘조원’들의 자유당 후보자에 대한 투표를 책임졌다. 경찰은 공개적으로 자유당후보를 지원하였다.

그러나 이런 노력이 꼭 필요한 것은 아니었다. 왜냐하면 선거 결과는 경찰 지휘부와 내무부에 의해서 완전히 날조되었기 때문이다. 선거 결과 이승만은 총 투표수에서 당선에 필요한 3분의 1보다 두 배 이상 많은 표를 얻었다. 이기붕은 180만 표를 얻은 장면을 제치고 840만 표로 부통령에 당선되었다.

국회에서는 민주당이 선거가 “불법적인 것이고 무효”라고 주장하였다. 반정부시위가 선거 전후 전국에 걸쳐 대도시에서 일어나기 시작하였다. 이들은 부정선거와 불법선거를 규탄하고 나섰던 것이다. 민심은 이승만의 자유당정권으로부터 거의 완전히 이반되어 있었으므로 대규모의 봉기에 필요하였던 것은 도덕적 분개라는 공통된 감정을 점화시켜줄 수 있는 사건만 있으면 되었다.

4월 초 전국에서 부정선거를 규탄하는 여론이 비등하고 있을 때, 항구도시인 마산의 시민들은 최루탄을 눈에 맞아 만신창이가 된 채로 마산 해변가에 버려진 16세 마산상고생 김주열(金朱烈)의 시신을 발견하였다. 그 소년은 부정선거를 규탄하는 시위에 가담했다가 마산 경찰에 의하여 체포 당했음에 틀림없었다. 시민들과 학생들은 거리로 쏟아져 나왔고, 시위 도중 경찰의 총에 맞아 쓰러졌다.

4·19혁명의 전개

4 · 19혁명 전 수주일 동안 주로 지방도시에서 고등학교 학생들이 불법선거 및 자유당과 경찰의 반민주적이고 억압적인 행위에 항의하는 시위를 산발적으로 행하였다. 그러나 이승만은 상황의 급박성을 이해하려 들지도 않았고, 또 그럴 수 있는 능력도 결여되어 있었다. 마산에서의 시위에 대하여 이승만은 4월 15일, 그 사건은 “공산주의자들에 의하여 고무되고 조종된” 것이라는 내용의 담화를 발표하였다. 이런 사태의 비극에 책임이 있는 “무분별한 사람들”의 죄는 간과될 수 없다고 선언하면서 이승만은 “젊은 청년들”을 폭동으로 유도하고, 선동하는 “정치적 야심가”와 공산주의자들의 선전활동에 대하여 경고하였다.

이승만의 이런 견해는 협박과 강제력행사를 그만두지 않겠다는 것을 분명히 한 것으로 학생들을 더욱 격노하게 하였다. 4월 18일에는 서울에서 시위하고 있던 고려대학교 학생들이 경찰의 비호를 받고있는 반공청년단의 폭력배들로부터 습격을 받았다. 아무리 이승만정권이 합법적인 권위를 지녔다고 주장하더라도 이제는 시민과 학생들의 지지를 완전히 잃고 있었다. 이승만정권이 유지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강력하고 적나라한 폭력을 사용하는 것뿐이었다.

4월 19일 약 3만 명의 대학생과 고등학교 학생들이 거리로 쏟아져나와 그 가운데 수천 명이 경무대로 몰려들었다. 경찰은 데모대에 대하여 발포하기 시작했으므로 학생들의 시위는 폭동으로 화하였다. 전국적으로 부산 · 광주 · 인천 · 목포 · 청주 등과 같은 주요 도시에서 수천명의 학생들이 가세하였다. 서울에서만도 자정까지 약 130명이 죽고, 1,000여 명 이상의 부상자가 발생하였다. 경찰이 시위대에 발포하기 시작한 직후, 우리나라의 주요 도시에 계엄령이 반포되었다. 육군참모총장이었던 중장 송요찬(宋堯讚)이 서울지구 계엄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4월 19일 이후 데모와 폭동이 연일 계속되었다. 이제 학생이 아닌 일반시민들도 가담하였다. 그러나 군대는 유혈사태를 경계하고 재산의 파괴를 방지하는 데 신경을 쓰면서 방관하는 태도를 견지하였다. 이승만은 반정부시위에 관하여 더 이상 “공산주의자들의 선동”이라는 말을 하지 않았다. 4월 21일 내각이 전국의 혁명적 사태에 대한 책임을 지고 물러났다.

다음날 이승만은 당시 정부 내에서 어떤 직위도 가지지 않은 2명의 정치인을 불러들였다. 한 사람은 전 국무총리였던 변영태(卞榮泰)이고, 다른 한 사람은 전 서울시장이었던 허정(許政)이었다. 이승만은 이들에게 위기상황에 대처할 수 있는 도움을 간청하였다.

두 사람은 이승만과 가까이서 일한 적이 있었고, 또 이승만은 이들에게 신뢰감을 가지고 있었다. 이승만과 만난 자리에서 두 사람은 상황이 이미 자기들의 통솔능력을 뛰어넘었다고 말하면서 이승만의 각료로 들어가기를 거절하였다.

그러나 이승만은 이기붕을 설득하여 모든 정치활동으로부터 물러나도록 하는 데에는 성공하였다. 이어 당시 부통령이었던 장면은 이승만이 대통령직에서 사임할 것을 촉구하면서 부통령직을 사퇴하였다. 장면은 부통령으로서 자기가 이승만의 사임으로 대통령직을 이어받도록 되어 있는 한, 이승만은 결코 대통령직을 사퇴하지 않을 것으로 믿었다. 시위대들은 새로운 선거의 실시 대신에 이승만의 즉각적인 사퇴를 요구하였다.

이승만은 자기가 자유당을 비롯한 모든 사회단체와 결별하겠다고 말함으로써 시위군중을 진정시키려고 하였다. 아울러 그는 앞으로 경찰을 포함한 정부관리들이 정치적 간섭을 하지 않을 것이라고 약속하였다.

이승만은 정부의 모든 권력을 이양받으리라는 약속과 함께 허정에게 외무부장관직을 수락하도록 설득할 수 있었다. 외무부장관으로서 허정이 지명되었던 것과 결부된 가장 중요한 사실은 이승만이 사임을 결심할 경우에 부통령이 없는 상황에서 허정이 대통령직을 맡게 된다는 데에 있었다.

시위군중들은 이승만의 약점을 알아차린 이상 더 물러서지 않았다. 그들은 점점 더 광포해지기 시작하여 반공청년단과 자유당간부의 집을 파괴하고 방화하면서 다녔다. 4월 25일 시위의 새로운 물결이 일어났다. 각 대학 300여 명의 교수들이 이승만의 사임을 요구하는 제자들을 지지하면서 서울시내를 행진하고 나섰던 것이다.

결국, 4월 26일 새로 지명된 외무부장관 허정과, 계엄사령관 송요찬, 그리고 주한 미국 대사였던 맥카나기(Macanarghy,D.P.)의 충고를 받아들여, 이승만은 대통령 · 부통령의 선거가 새로 실시될 것이고, 헌법도 대통령 중심제에서 의원 내각제로 바꾸어질 것이라고 약속하였다. 이승만정권의 붕괴는 경찰력에 의하여 유지되었던 정치권력이 학생들이 선봉에 선 반경찰 · 반관료적 대중에 굴복하였음을 의미한다.

경찰력이 자유당의 주요 골격을 이루어왔다는 것은 4 · 19혁명 후 경찰력의 마비로 인하여 자유당이 하룻밤 사이 붕괴됨으로써 명백하게 드러났다. 교수들의 시위로 시작된 시위의 새로운 물결, 미국으로부터의 압력, 경찰력의 붕괴, 그리고 무엇보다도 군으로부터의 지지결여 등등에 직면하여, 이승만은 1960년 4월 26일 사임을 발표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이틀 전에 이승만으로부터 외무부장관으로 임명된 허정은 과도정부의 수반이 되었다.

4·19혁명 이후 과도정부의 수립과 전개

4 · 19혁명 후, 허정은 이승만의 간청에 따라, 희생정신으로 외무부장관직을 받아들였다. 이승만의 사임 후 정부 내 허정의 권력기반이 크게 위태로웠던 것은 분명한 사실이었다. 허정은 한국 사회의 어떤 부문에서도 적극적 지원을 확보할 수가 없었다. 학생과 일반시민의 입장에서 볼 때 허정은 이승만정권의 계속을 의미하였다. 그는 또한 배후에 민주당이나 민족청년단과 같은 조직화된 정치세력을 가지지 못하였다.

송요찬은 허정이 당시 혁명적 상황에 대처하기에는 너무 미숙하고 준비가 없었던 것으로 믿었다. 그리고 어떤 군부의 지도자도 허정이 이끄는 정부에 대하여 전격적인 지원을 하여줄 수도 없었고, 또 그렇게 하지도 않았다. 허정에게 유일한 힘의 기반은 관료기구와 경찰조직을 포함한 이승만정권의 정부기구뿐이었다.

사실상 허정에게는 단 하나 권력기반인 바로 그 정치구조를 깨뜨려야 한다는 모순된 과업이 주어졌다. 허정은 과거 어떠한 정치 조직체에도 가담하지 않았고, 정치권력에 대해서도 그리 큰 욕심이 없는 것으로 보였기 때문에 민주당이나 자유당이 받아들일 수 있었다. 자유당에게는 허정이 과거 이승만과 그의 정부와 긴밀한 관계를 지녔기 때문에, 사회정치적 구조에 급격한 변화는 없을 것으로 생각하였다.

만일 이승만의 사임 후에 허정이 과도정부를 이끌어가는 것을 거절하였더라면 그것은 모든 자유당원의 안전을 위협하는 심각한 정치적 혼란을 의미했었을 것이다. 자유당인사들에게는 허정이 군부를 포함한 사회 내 어떤 단체나 개인보다도 무리없는 존재였다.

또한, 민주당은 당내의 응집력과 일체감을 결여하고 있었으므로, 정권을 인수할 채비가 되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장면이 이미 부통령직을 사임하였기 때문에, 민주당이 정권을 인수할 어떤 합법적인 절차도 없었다. 당내 신구 양파 중 어떤 세력도 정권획득을 위하여 변칙적 수단에 의존하려 하지 않았다. 민주당은 차기선거에서의 승리를 확신하고 있었기 때문에 적만 많이 만들고, 우군은 점점 잃어버리는 ‘혁명적 과업’을 수행할 짐을 떠맡으려고 하지 않았다.

이리하여 국회 내 양당의 지도자들은 허정 자신이 생색 안나고 어려운 과제를 떠맡기에 주저하였음에도 불구하고, 허정이 과도정부의 수반에 앉아야 한다고 촉구하였던 것이다. 허정은 내각에 민주당 의원을 참여시키려 하였으나 그들은 직접 참여하지는 않고, 허정정부에 대하여 막후에서 영향력을 행사하고자 하였다. 결국, 허정이 구성한 내각은 정권에는 욕심이 없어 보이는 사람들로 이루어졌다.

따라서, 그들에게는 일반국민들이나 또는 조직된 정치세력에 대하여 신경을 써야 할 아무런 이유도 없었다. 이들 중 대부분은 제각기의 분야에서 남다른 훌륭한 업적을 남기고 개인적으로 다른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던 시민들이었다. 이들에게는 사전의 정치경험이 없으며, 그렇기 때문에 정치에 관한 한 조직적인 기반이 없었고 또한 어떤 진보적 견해나 혁명적 성향도 없었다. 실로, 널리 알려진 그들의 슬로건 ‘비혁명적 수단에 의한 혁명’이라는 말은 허정정부의 성격을 잘 나타내 주고 있다.

5월 3일 발표문에서 허정정부는 정책기조의 방향을 광범하게 밝혔다. 내정에서는 일상생활과 법 · 사회조직의 근본구조에 미치는 4 · 19혁명의 여파를 극소화하는데 주안점이 주어졌다. 법과 질서를 유지하는 과제에는 반공투쟁이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다. 대외관계에 있어서 과도정부는 강한 반공노선과 미국과의 긴밀한 유대관계를 지속하려는 뜻을 분명히 하였다. 그러나 이승만정권이 초래했던 국제적 고립, 특히 아시아 또는 중동의 중립국들과 일본에 대한 폐쇄적 관계를 지양하는 정책의 길을 터놓았다.

허정의 과도정부는 일련의 모순된 목표를 추구해야 하였다. 과도정부에 대해서 국민들은 군대 내의 부패를 일소하고, 선거에 있어 부정을 저질렀던 자들에 대하여 처벌을 행할 것을 기대하였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군의 고위장성들의 비위를 건드릴 수 없는 노릇이었고, 또한 그들에게 정치에 개입하는 구실이나 자극을 줄 수가 없었던 것이다.

정부는 학생과 언론으로부터 전직 자유당 관리나 부정축재자에 대한 즉각적이고 혹독한 처벌을 내리라는 요구에 직면하고 있었으나, 이러한 조처가 취해진다면 그것은 경찰력의 효율성을 마비시키는 것이며, 우리나라에 있어 경제구조의 근본을 파괴하는 것이었다. 한편, 정치문제에 있어서는 과도정부에게 양당제도의 확립을 위한 조처가 기대되었으나, 과도정부로서는 자유당의 부활이나 혹은 좌익적 정당의 등장을 용인할 수도 없었다.

이러한 상충되는 과제에 부딪힌 과도정부는 문제들을 극히 신중하고도 무난한 방법으로 해결하려 들었다. 사회 내 어떤 부분도 다치게 하지 않으려는 과도정부의 조심성과 무작위는 장면이 이끌게 되는 그 후의 정권에도 심각한 영향을 주었다.

허정이 스스로 술회한 것처럼 그는 군을 어떻게 취급할 것인가에 대하여 몹시 골몰하였다. 그는 자유당정권과 손을 잡고 부정선거를 저지른 고위장성이나 여러 부정사건에 관련된 부패한 장성들을 숙청해야 할 필요가 있음을 인식하였다. 군부에 대한 허정의 첫 번째 조처는 이종찬(李鍾贊)을 국방부장관으로 임명한 것이었다. 일본국방대학을 졸업하고 1951년부터 1952년까지 육군참모총장을 지낸 바 있는 이종찬은 이승만의 미움을 샀는데, 그 이유는 1952년 부산정치파동 때 이승만이 군을 동원하는 것에 대하여 반대하였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그는 이승만정권에 가까이 동화되지 않은 소수 몇몇 장성 중의 한 사람으로서, 많은 군장교로부터 존경을 받았다. 국방부장관으로서 이종찬은 우선 해야 될 일이 군의 정치적 중립성을 유지시키는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는 임명 후 첫 기자회견에서, 군의 정치적 중립의 필요성에 관하여 최대의 역점을 두어 말하였다.

허정 정부의 막바지 무렵, 군의 각급 참모총장들은 전 각료 앞에서 “한국군 참모총장의 한 사람으로서 나는 정치에 있어 엄격한 중립을 지킬 것이며, 조국을 적으로부터 보호하는 신성한 의무에 진력할 것을 엄숙히 맹세합니다.”라고 명시된 서약문을 읽고 서명하도록 요구받았다. 허정은 군부를 개혁하려 하거나, 주요 장성들을 추방하려는 조처를 취하였을 때 생길 수도 있는 군으로부터의 적대적 반응을 두려워하였다.

그래서 그는 고급 군장교들의 지난 실수에 관해서는 지극히 관대한 정책을 추구하였던 것이었다. 군장교들을 섣불리 숙청하려 한다면, 한국 내 미국 대사와 미군 사령관이 같이 쥐고 있는 한국군의 전투능력을 상실하게 할 수도 있다는 게 허정의 견해였다. 허정은 과도정부의 수반으로서 3개월의 기간 동안 때때로, 혹은 정기적으로, 미국관리들과 회동하였다.

미 제8군 사령관인 장군 매그루더(Magruder,C.B.)는 허정에게 한국군의 재편은 현존하는 불안정과 혼란이 종식될 때까지 연기되어야 한다고 말하였다. 결국, 과도정부는 약간명의 장성을 전역시켰을 뿐 근본적인 숙군을 단행하지 못하였고, 이로 인하여 군부내의 정군문제(整軍問題)는 숙제로 남았다.

허정내각의 4 · 19혁명의 뒷마무리 중 중요한 과제는 선거부정행위의 주요 음모자와 이승만 밑에서 불법적이고 강압적인 행동을 자행한 경찰요원들에 대한 처벌문제였다. 이 문제를 다루는 데에 있어 과도정부의 기본적인 입장은 기존의 법적 테두리 내에서의 수단만을 동원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정부는 이승만정부와 자유당의 전직간부에 대하여 기존의 법에 따라 공판을 받게 하였고, 경찰에 대하여는 정상적인 인사정책을 통해서 경찰을 정화하려 하였다.

허정정부에 의하여 체포된 자는 9명의 전직 각료와 15명의 자유당 간부인데, 이들은 3월 15일의 정부통령 선거 때 불법적 활동을 자행한 혐의로 기소되었다. 여러 은행의 장들은 자유당에 거대한 선거자금을 불법적으로 제공한 혐의로 구속되었다. 이승만의 경호실장이었던 곽영주(郭永周)와 수많은 고위경찰관리들은 4월봉기 때 시위군중에 발포한 혐의에 연루되었으며, 하급경찰요원들은 4월 19일 이전에 시위학생들에 대한 잔악한 고문을 가한 혐의로 구속되었다.

또한, 전(前) 서울시장이었던 임흥순(任興淳)과 내무부장관이었던 이근직(李根直)1956년 부통령선거 때 장면을 암살하려던 음모에 관련되었다. 그리고 자유당정권과 공모하여 재계 · 문화계 · 정치계 인사들에 대한 테러를 자행하던 정치깡패의 두목들도 체포되었다. 이들에 대한 공판은 7월 29일로 예정된 국회의원선거 수주일 전인 7월 5일에 열렸다.

공판과정에서 허정정부는 법원과 검찰청의 현직 관리들에 크게 의존하는 수밖에 없었는데, 이들 역시 이승만정권의 정치적 이익을 위하여 봉사하지 않으면 안되었던 자들이었다. 그들이 자유당정권의 효과적인 정치도구로 작동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마치 자유당정권으로부터는 거리가 있었던 것처럼 다른 분야에서 활동하였던 자기네들의 동료들을 기소하여야 하는 임무가 주어졌다.

허정정부는 기존의 정치적 · 이념적 · 법적 기본구조를 파괴할 의사가 없었기 때문에 이러한 모순은 불가피한 것이었다. 따라서, 공판은 ‘혁명적’ 방식으로 진행되거나 끝맺어지지 못하였다. 당연하게도, 주어진 법의 테두리에서 보다 더욱 혹독하게 처벌하기를 바랐던 학생들과 시민들을 만족시킬 수가 없었다. 공판은 장면이 이끄는 다음 정부로 넘겨졌다. 이것은 장면 정권에게는 심각한 고민거리의 원인이 되었다.

부정축재자에 대한 처리도 국민의 기대에 어긋났다. 과도정부는 부정축재자를 처벌하겠다는 방침을 반복해서 밝혔으나, 실제로는 몇 사람에 대하여 과거의 부정을 자진신고하게 하고, 부정축재분을 사회에 환원시킨 데 그쳤다. 7월에 가서야 이승만정권 밑에서 부정축재한 18명의 개인과 기업가 66명의 명단을 공개하고, 이들을 조사하겠다고 선언하였다.

문제 자체의 복합적 성격으로 인하여 장면정부의 출범 이후까지 그들에 대한 실제적인 조처는 취해지지 못했다. 물론, 부정축재자들에 대한 조사처리를 늦추었던 데는 다른 이유가 있다. 이들의 불법적 기업활동이 이승만정권과 광범위하고도 뿌리깊게 결탁되어 있었고, 실제적인 관점에서 완전한 조사라는 것은 불가능했었으며, 만일 그것이 가능하였다 하더라도 이러한 조처는 나라의 경제구조뿐 아니라, 정부의 기본구조의 유지마저 와해시킬 수가 있었을 것이다.

분명히 허정정부는 그러한 모험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국립 경찰의 정치적 중립화와 민주화의 문제에 있어서도 허정정부는 경찰의 현존 기본골격은 그대로 유지하면서 꼭 필요하고 가능한 변화만을 추구하는 기본정책을 적용하였다. 과도정부는 국립 경찰에 대하여 입법이나 인사정책을 통해서 그 목표들을 달성하는 소극책에 그쳤다.

국회에서는 경찰중립화법안을 고려하였으나, 실천에 옮기지 못하였다. 정부는 선거부정이나 정치테러에 책임을 지고 있는 경찰의 최고간부들을 해임시켰을 뿐이며 근본적인 문제해결에는 미흡하였다. 기본적으로 허정정부의 보수적이고 온건한 접근방법으로는 일반국민들을 만족시켜 줄 수가 없었을 뿐더러, 경찰의 권위주의적 성격도 변화시킬 수가 없었다.

짧은 과도정권 기간 중 허정정부는 줄곧 ‘비혁명적’ 방법으로 과제를 해결하려는 입장을 견지한 결과 후계정권에게 제한된 행동의 자유를 가지고 ‘혁명’을 수행하여야 한다는 어려운 숙제를 남겨 주었다. 왜냐하면, 후계정권은 허정정권이 시작한 비혁명적 수단의 맥락 안에서 제기능을 수행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허정정부가 이룩하였던 중요한 정치적 발전의 하나는 정치세력집단으로서의 자유당의 해체였다.

의의와 평가

4·19혁명의 성과를 따지기에 앞서 우리는 당시 상황을 ‘혁명적인 것’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지를 물어보아야 한다. 혁명에 대한 개념은 여러 가지로 이해되어 왔다. 사회과학자들의 다수는 혁명이라는 말을 보다 넓은 의미로 해석하고 있다.

예를 들면, 엑스타인(Eckstein, H.)은 혁명을 “국가정책과 지배자, 또는 제도 등을 기존의 사회규범에서 벗어난 방법으로 변경하려는 모든 시도로서, 폭력적인 성격을 지니고, 정착된 기존제도적 패턴의 심각한 붕괴를 포함하고 있는 것”으로 정의하였다. 브린턴(Brinton, C.)과 페테(Pettee, G.) 같은 역사학자들에게 혁명이란 1789년 프랑스혁명에서나, 1917년 볼셰비키혁명에서처럼 대규모의 사회 · 정치적 재편성을 내포하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정치철학자인 아렌트(Arendt, H.)는 좀더 특색있는 해석을 하고 있다.

그녀에 의하면 혁명은 사회 · 정치적 변동을 의미하는 것으로서 그 변동의 결과 정치과정에 대한 시민참여라는 의미의 정치적 자유를 갖추는 헌법적 구조가 창조되는 것이어야 한다. 이렇듯 서로 다르게 이해된 혁명의 공통된 현상은 사회의 가치체계의 변동에 기인되었거나 또는 그러한 변동을 야기시키는 과격한 사회 · 정치적 변동이라고 할 수 있다. 한편, 존슨(Johnson, C.)은 제도화된 권력구조와 사회가치구조 사이의 조화라는 관점에서 사회적 안정을 정의하고 있다.

존슨은 잠재적 혁명상황이라는 것은 이런 조화가 깨질 때 존재한다고 주장한다. 1960년 당시 한국의 상황은 이승만정권의 권력구조와 정치의식계층, 특히 학생들의 가치관과의 사이에 크고 명백한 균열이 있었다는 의미에서 혁명적인 것으로 간주될 수 있다. 4월봉기는 이승만과 그의 지지세력에 대항하는 반정부세력에 의한 혁명적 시도였다. 그러나 시위학생들과 시위군중들은 그들 스스로의 조직화된 지도력을 가지지 못하였다.

민주당 지도층에서는 자기네들이 시위운동을 일으키는 데 앞장을 섰다고 주장하였지만, 시위대중 사이에서 그들의 실제지도력은 나타나지 않았다. 역설적으로 이와 같이 명백한 지도력의 부재가 이승만의 조속한 사임을 가져오게 하였다. 그러나 이는 이승만정권의 붕괴 후에 ‘혁명’을 완성시키지 못하는 중요한 원인이 되었다.

참고문헌

『4·19의 민중사』(학민사, 1984)
『4·19 그 이후』(동아일보사, 1984)
『4·19혁명론』(한완상 등, 일월서각, 1983)
『한국정치체계』(윤천주, 서울대학교 출판부, 1979)
『4월혁명』(사월혁명동지회, 1965)
『4월혁명청사』(성공사, 19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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