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쪽은 동해안 해안선과 북쪽은 동해시, 서쪽은 정선군과 태백시, 남쪽은 경상북도 울진군과 접하고 있다. 동경 129°21'∼128°57', 북위 37°02'∼37°28'에 위치한다. 면적은 1,186.5㎢이고, 인구는 7만 839명(2015년 현재)이다. 행정구역으로는 2개 읍, 6개 면, 4개 동, 160개 행정리(101개 법정리)가 있다. 시청은 강원특별자치도 삼척시 교동에 있다.
우리나라의 주산맥인 태백산맥의 동편에 위치한 지역으로 해안선과 병행하여 남으로 뻗어 있는 지형지세를 나타내고 있으며, 대부분 고지대 산간지역으로 형성되어 있다. 태백산맥이 동쪽으로 급격히 내려오면서 동해안으로 흘러 들어가고 서쪽으로는 고원 구릉지대를 형성하여 광동댐이 위치하는 등 도처에 동류(東流)하는 많은 하천이 골고루 발달되어 있다. 지형지세는 험준한 태백산맥과 넓고 긴 해안선, 그리고 많은 항포구를 가지고 있어 깨끗한 백사장과 천혜의 자연경관으로 빼어난 천연 해수욕장, 그리고 수많은 계곡, 명산과 더불어 동굴관광의 고장, 삼척의 아름다움을 더 한층 빛내주고 있다.
표고는 4개 동지역과 원덕읍, 근덕면, 노곡면, 미로면, 가곡면, 신기면이 400m이하로 위치하고 있으나, 도계읍, 하장면 일부지역은 해발 800m이상 고원지대로 형성되어 있다. 이러한 지형적 영향으로 전국에서 가장 많은 55개의 석회동굴을 보유하게 됨으로써 2002년도에는 삼척세계동굴엑스포를 성공적으로 개최하여 "세계적인 동굴도시"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58.4km의 긴 해안선은 단조롭고 완만하여 간척사업이나 수산양식사업에는 다소 불리하나 해안을 따라 넓게 펼쳐진 송림과 모래사장, 동해의 맑은 청정해수가 많이 분포되어있어 전국 제1의 국민휴양관광지 및 향후 국제적인 해양동굴관광도시로 발전 가능성이 풍부하다.
하천은 대체로 위의 분수령을 중심으로 서쪽에는 남한강의 원류인 골지천(骨只川)이 태백시의 검용소(檢龍沼)에서 발원해 북류하면서 정선군으로 흐른다. 동쪽으로는 짧은 급류가 흘러내리는데, 그 중 오십천(五十川) · 가곡천(柯谷川) 및 마읍천(麻邑川)이 비교적 크다.
특히 오십천은 육백산(六百山, 1,244m) 남쪽에서 심포리 부근에서 발원하여 심한 곡류를 하면서 동북류해 도계읍 · 사기면 · 미로면을 지나 삼척 시내를 남북으로 가르면서 동해로 흘러든다.
시의 하안에 발달한 하안단구가 주요 생활무대이며, 하곡을 따라 영동선 철도와 삼척∼태백간의 38번 국도가 있어 태백산지 자원의 중요한 수송로가 되고 있다.
육백산 남쪽 신리부근에서 발원한 가곡천은 남쪽으로 흐르다가 가곡면 풍곡리에서 동쪽으로 방향을 바꾸어 흐르면서 유역에 규모는 작으나 충적평야를 형성하고 동해로 흘러든다.
사금산(四金山, 1,092m)에서 발원한 마읍천은 심한 곡류를 하면서 북동류 상 · 중 · 하 마읍리를 지나 근덕면 동막리에서 부남리, 교가리를 지나 동해로 흘러든다. 이 하곡을 따라 427번 지방도가 개설되어 있고 동막리 하류에는 규모는 작으나 기름진 충적평야가 형성되어 농업의 중심지를 이루고 있다.
석회암층이 분포된 성남, 우지, 여삼리 및 오십곡 등지에는 카르스트 오목지형이 형성되어 있는데, 특히 여삼리 일대에서 남한에서 가장 대규모의 카르스트 오목지형이 발달되어 있다.
해안선은 단조로운 편이고, 해식애(海蝕崖)와 해안단구가 곳곳에 발달되었으나, 후진 · 맹방 · 호산 등지에는 비교적 긴 사빈(砂濱)이 펼쳐져 있어서 해수욕장으로 개발되고 있다.
또한 정라진(汀羅津)을 비롯해 초곡리 · 장호리 · 임원리 · 호산리 등지에 소규모의 만입이 있어 어항으로 이용되고 있다. 연안은 수심이 깊고 계절에 따라 한 · 난류가 교류해 어족이 풍부하다.
태백산맥과 동해안에 입지하여 해양성 기후의 특징인 온난다습하며 고산지대의 영향으로 수직적 기온분포를 인접산지에서 볼 수 있고, 지리적으로 영동과 내륙지방간의 기온차이가 약30일 간격으로 나타난다.
해양성으로 온화하며, 사계절동안 한류와 난류가 교류한다. 어족자원이 풍부한 삼척지방의 기상개황을 살펴보면 과거 12년간 평균기온이 12.5℃로 영서지방의 다른 지방에 비해 다소 높은 편이다. 최고기온은 지난 1992년 7월 29일 37.5℃였으며, 최저기온은 지난 1990년 1월 26일 -13.5℃를 기록하였다.
기온 분포는 하계 8월에 평균 24.1℃, 동계 1월에 평균 0.5℃를 나타내어 여름에는 서늘하고 겨울에는 온난한 기온을 나타내고 있다. 강수량은 연평균 1,284.5㎜로 7월 8월의 강수량이 50%이상 차지하여 하계에 집중하고 있는 편이다. 일일최대 강수량은 지난 2002년 8월 31일∼9월1일(2일간) 태풍 루사로 인한 집중호우시 819㎜(노곡)를 기록하였다.
삼척 지역에 사람이 살기 시작한 것은 구석기시대부터이다. 삼척시 원덕읍 노경리에서 구석기 유적이 출토되었다. 신석기시대 유물과 유적은 아직 삼척에서 발견되지 않았으나 인근의 동해시 송정동 일대에서 출토되었기에 삼척지역 역시 신석기 유적이 발견될 가능성은 매우 높다. 청동기 유적은 원덕읍 호산과 근덕면 장호, 오십천유역의 봉황산 일대, 교동과 성북동 일대에서 돌화살촉과 돌도끼, 석검, 민무늬토기 등이 발견되고 있어 당시 삼척 지역에는 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철기시대 유적과 유물은 삼척 오십천 하구의 오분동, 맹방리, 노경리 등에서 조사되었다.
삼한시대에 이곳은 실직국(悉直國) 또는 실직곡국(悉直谷國)이었는데, 102년(파사왕 2)에 신라에 합병되었다. 그 후 고구려 장수왕의 남하정책으로 468년(장수왕 56) 일시 고구려의 영토가 되었으나, 505년(신라 지증왕 6) 신라가 다시 회복해 실직주(悉直州)를 설치하고 군주(軍主)를 파견하였다.
757년(신라 경덕왕 16) 삼척군으로 개칭되고, 태수가 파견되어 죽령(竹嶺) · 만경(滿卿) · 우계(羽溪) · 해리(海利) 등 4개 현을 영현으로 하였다.
995년(성종 14) 지방행정구역이 10도체제로 개편되면서 삼척군은 척주(陟州)로 승격되어 삭방도(朔方道)에 소속되었으며, 단련사(團練使)가 파견되었다. 현종(顯宗) 때 5도양계체제가 확립되면서 동계 소속의 삼척현이 되어 현령이 파견되었으며, 이때 속현인 우계현(羽溪縣)은 강릉부에 이속되었다. 1373년(공민왕 22)에는 현령대신 안집중랑장(安集中郞將)이 파견되었고, 1377년(우왕 3)에는 지군사(知郡事)가 파견되었다.
삼척지역은 외적의 침입은 물론이거니와 북방에서 거란과 몽고의 침입도 있었다. 따라서 군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위치였다. 북방으로부터 외적의 침입은 먼저 성종과 현종 연간에 거란의 침입이 있었으나 삼척지역에서는 별다른 전투가 없었다. 그러나 고종 연간의 몽고침입 때에는 이승휴가 삼척주민들과 함께 요전산성에서 항전하였으며, 조선 태조 이성계의 선조인 목조 이안사도 항전했을 정도로 전투가 치열하였다. 몽고군이 삼척을 비롯한 영동지역을 침입한 것은 제4 · 5차 침입인 1247∼1253년이었다.
한편 이 무렵 동해안에는 왜구의 침입 또한 빈번하였다. 이처럼 동해안을 통한 왜구의 침입이 잦았던 원인은 일본 내부의 사정으로 굶주린 일본인들이 많았기 때문이며, 주 침입경로가 영동지역이었던 까닭은 동해안의 해류가 일본에서 곧바로 영동 해안지역으로 흘렀기 때문이다. 왜구의 침입은 공민왕 이후 극성을 부리는데, 이들은 동해안 연안으로 들어와 농민들을 약탈하는 등 큰 피해를 입혔다. 이러한 환경의 영향으로 이 지역의 주민들은 미륵신앙에 몰입하게 되고, 천년 후의 극락세계를 염원하며 갯벌에 향을 묻는 매향(埋香)의식이 확산되었다. 동해안에서도 매향의식이 행해졌는데 『척주지』에 의하면 1309년 8월 강릉도 존무사 김천호와 강릉부사 박홍수 · 삼척현위 조신주 등 동해안의 지방관들이 모여 미륵부처님께 서원하며, 평해 해안언덕에 100조 · 삼척 맹방촌물가에 250조 · 강릉 정동촌물가에 310조 · 울진 두정에 200조 등 동해안 5개소에 모두 1,500조의 향나무를 묻었다고 전한다.
1393년(태조 2)에는 태조의 5대조인 목조(穆祖)의 외향이므로 부(府)로 승격되어 부사가 파견되었다. 1413년(태종 13) 8도제가 확립되면서 도호부로 승격되었다.
1631년(인조 9) 부사 이준(李埈)이 삼척도호부의 관내를 부내(府內) · 매곡(邁谷) · 노곡(蘆谷) · 덕번(德蕃) · 북평(北坪) · 박곡(璞谷) · 미로(眉老) · 소달(疏達) · 장생(長生)의 9개 리로 나누었는데 읍성을 중심으로 동쪽을 부내, 서쪽을 매곡이라 한 것이 삼척시를 이루고 있는 지역이다. 1660년(현종 1) 부사 허목(許穆)이 매곡을 말곡으로 고쳤다가 다시 매곡이라 하였다.
허목이 부사로 있을 당시 삼척은 조석간만의 차가 격심한 해파로 조수가 읍내에까지 올라오는가 하면, 여름에는 홍수로 삼척의 오십천이 범람해 피해가 극심했는데, 허목이 이를 안타깝게 여겨 척주동해비(陟州東海碑)를 세우니 재해가 사라졌다고 한다. 이 비는 현재 정상동에 있다.
『여지도서(輿地圖書)』에 의하면 1759년(영조 35) 당시 삼척도호부는 12개 면과 3,985호 1만8,102인을 관할했던 것으로 나와 있으며, 현재의 삼척시인 부내면과 매곡면은 934호 3,802인이었다. 1840년(헌종 6)에 매곡면은 말곡면으로 고쳐졌다.
수군의 경우 태조 때부터 부사가 삼척의 수군본부인 삼척포의 만호를 겸직하였는데 1419년(세종 1) 부사가 삼척만호를 겸직하던 것을 폐지하고 별도의 수군첨절제사를 파견했으며, 1457년(세조 3) 진관체제로 바뀔 때 삼척진관을 설치하고 삼척포 첨사가 첨절제사로 되는데 그 아래 안인포, 고성포, 울진포, 월성포를 두었다. 그후 1627년(인조 5) 각 도의 지방군대를 관할하기 위한 진영의 수장인 영장이 파견되면서 삼척포진은 영장이 영동지역의 속오군을 다스리고 울릉도의 치안을 담당해 오다가 1898년(고종 35) 삼척포진이 폐지될 때 함께 없어졌다.
조선시대의 삼척지방 행정관청은 동헌을 중심으로 인접해 있었으므로 동헌터가 있는 지금의 죽서루 부근이 행정의 중심을 이루었던 지역이다. 삼척부사가 공무를 보는 동헌(東軒)인 칠분당(七分堂) 옛 이름은 매죽각(梅竹閣) 또는 역근당(易近堂)이다. 내아(內衙), 향서당(鄕序堂), 장관청(將官廳), 이방(吏房)이 공무를 보던 좌기청(坐起廳), 아전들의 집회소인 작청(作廳), 낭청방(郎廳房), 군기청(軍器廳), 뇌옥(牢獄), 수재민 구호를 위한 보민청(補民廳), 경사재(敬思齋), 진주관(眞珠館), 칠장방(漆匠房), 기소(妓所), 저양장(猪洋場), 강릉 삼척 울진 평해 관내의 15개 역참(驛站)을 관할하던 산호관(珊瑚館) 등이 있었다.
1895년 5월 26일 8도제가 폐지되고 23부제가 실시되어 강릉부 삼척군이 되었다가, 그 다음해인 1896년 8월 4일에는 23부제가 폐지되고 다시 13도제가 실시됨에 따라 강원도 삼척군이 되었다. 1914년 삼척 관내 12개 면 중 부내(府內) · 말곡(末谷)을 합하여 부내면이라 하였고, 도상(道上) · 도하(道下) · 견박면(見朴面)을 합하여 북삼면(北三面)이라 하였다. 부내면은 1917년 삼척면으로 고쳤다가 1938년 10월 1일 삼척면이 읍으로 승격되었고, 1945년 7월 1일 북삼면이 북평읍으로 승격되었다.
1960년 1월 1일에 상장면이 장성읍으로 개칭, 승격되었고, 1963년 1월 1일에 소달면이 도계읍으로 승격되었다. 1973년 7월 1일에 하장면의 가목리와 도전리가 정선군으로 이관되었고, 노곡면 금계리가 근덕면에 편입되었다. 같은 날 황지출장소가 황지읍으로 승격되었다.
1980년 4월 1일에 삼척군 북평읍과 명주군 묵호읍을 통합해 동해시를 설치했고, 같은 해 12월 1일 원덕면이 읍으로 승격되었다. 1981년 7월 1일 장성읍과 황지읍을 통합해 태백시가 설치되었으며, 1982년 9월 30일에 군청사를 삼척읍 성내리에서 교리로 이전하였다.
1986년 1월 1일 삼척읍이 삼척시로 승격되면서 삼척군에서 분리되었다. 1991년 10월 23일 시청사를 남양동에서 교동으로 이전하였다. 1992년 10월 15일에 월계동의 명칭을 당저동으로 변경하였다. 1995년 1월 1일 도농통합에 의해 삼척시와 삼척군이 통합되어 새로운 삼척시가 되었다. 같은 해 5월 19일에는 원덕읍 축전리가 산양리로 개칭되었다. 1998년 10월 26일 사직동과 도원동을 폐지하고 당저동을 성내동으로 개칭하였다. 1999년 9월 9일 하장면 역둔출장소와 노곡면 마읍출정소가 폐지되었다.
삼척시 관내 지정유산은 국가지정유산 13건, 강원도지정유산 29건이 있다. 국가지정유산은 보물 1, 사적 2, 명승 1, 천연기념물 5, 국가민속문화유산 4건이 있고, 강원도지정유산은 유형문화유산 9, 기념물 8, 민속문화유산 1, 무형유산 1건이 있고, 문화유산자료 10건과 등록유산 4건이 있다.
구석기시대의 유물 · 유적으로 1999년 원덕읍 축전리 산양마을 뒷산 언덕에서 발견되었다. 유적의 정상부에는 자갈층이 일부 잔존해 있으며, 자갈층을 포함하여 그 상부 층위는 괴립상으로 갈라지고 회백색의 수직 · 수평 층리현상이 있는 적황색 점토층이 덮고 있다.
고토양층은 매우 일부에만 노출되어 있는 데, 모판용 흙 채취 등에 의해 점점 사라지고 있는 형편이다. 현재 고토양층의 단애면과 구릉 정상부 일대에서 석기를 채집할 수 있다. 신석기시대의 유적도 현재 정확한 곳은 없으나 오십천 · 마읍천 · 추천 · 마천 등의 하천유역에서 발견될 가능성이 많다.
청동기시대의 유적으로는 교동에서 민무늬토기편과 간돌화살촉, 성북동 갈야산 유적에서 간돌칼과 민무늬토기, 남양동 남산 유적에서 간돌칼, 정상동 봉황산 유적에서 간돌도끼 · 간돌끌, 월암산기슭에서 간돌도끼, 근덕면 교가리 유적에서 간돌칼, 원덕읍의 장호리 유적에서 간돌칼 1점 · 간돌화살촉 4점, 호산리 유적에서 간돌화살촉, 옥원리 유적에서 민무늬토기편 등이 출토되었다.
이러한 사실로 청동기시대에 많은 사람들이 삼척지역에는 거주했으며 농경 · 어로로 생활했던 흔적이 많은 유적으로 남겨져 있음을 알 수 있다.
초기철기시대의 유적으로 오분동 유적, 근덕면 하맹방리 유적, 원덕읍 노경리 유적에서 민무늬토기 · 돗자리무늬토기편이 발견되어 2천 년 전을 전후로 해 연맹왕국단계의 사회구조가 삼척지역을 중심으로 형성되어 있었음을 보여 준다.
삼국시대의 고분유적으로는 성북동 고분군이 9기 이상 발견되었는데 신라고분군으로 추정되며 굽다리 토기등 수십 점의 토기가 발견되었다.
원당동 고분군에서 굽다리토기편과 함께 철제과대 3점, 가락바퀴 1점, 귀거리 1점등이 출토되었고, 사직동 고분군은 3기로서 횡구식석실묘(橫口式石室墓)이며, 하장면에 삼척숙암리고분군(강원도 기념물, 1988년 지정)은 훼손이 심각한 상태이다. 원덕읍 옥원리 고분군에서도 토기편이 많이 흩어져 있어 그 축조시기가 삼국시기임을 알려주고 있다.
산성지로는 삼척읍성 · 삼척포진성지(三陟浦鎭城址) · 갈야산성지 · 요전산성(寮田山城) · 옥원성지(沃原城址) · 죽령현성(竹嶺縣城) · 광태리고성(光泰里古城) · 맹방고성(孟芳古城) · 월계촌고성(月桂村古城), 봉수지는 광진산(光津山)양야산(陽野山) · 초곡산(草谷山) · 가곡산(柯谷山), 임원산(臨院山) 봉수지가 있다.
도요지로는 천은사 청자도요지 이외에 기와 굽던 곳이 여러 곳에 남아 있다.
능묘로는 성북동 갈야산에 실직군왕릉(강원도 기념물, 1971년 지정)과 사직동에 실직군 왕비릉이 있고, 근덕면 궁촌리에 고려의 마지막 왕인 삼척 공양왕릉(강원도 기념물, 1995년 지정), 미로면 활기리에는 삼척 준경묘 · 영경묘(사적, 2012년 지정), 자지동 태봉산에 연산공주(燕山公主)의 태실묘가 있다.
이 지역에는 고분 · 능묘 이외에도 삼국 · 통일신라시대의 고분이 많이 산재해 있으나 아직 체계적인 학술조사가 이루어지지 않아 정확한 분포나 수량이 밝혀지지 않았으나 앞으로 더욱 많은 고분이 발견될 것이다.
이밖에도 원덕읍 산양리 843번지 산양서원묘정비, 노곡면 여삼리 산148번지 박걸남묘역 등이 있다. 산양서원묘정비는 1998년, 박걸남모역은 2000년 문화재자료(현, 문화유산자료)로 지정되었다.
불교 유산으로는 근덕면 궁촌리의 영은사(靈隱寺) 경내에 삼척 영은사 대웅보전 · 삼척 영은사 팔상전 · 삼척 영은사 괘불, 도계읍 흥전리 산92-1삼척 흥전리 삼층석탑재, 하장면 역둔리 산2-1역둔리 철비(문화재자료, 1996년 지정) 범일국사가 창건했다는 죽장사(竹藏寺), 미로면 내미로리에 있는 천은사(天恩寺)는 758년(경덕왕 7년) 창시되어 고려 말 이승휴(李承休)가 이곳에 은거하면서 제왕운기(帝王韻紀)를 저술한 곳이고 그 곳 일대에도 비와 부도가 많이 있고, 근덕면 동막리에 삼척 신흥사 설선당 및 심검당(강원도 문화재자료, 1988년 지정), 도계읍 흥전리의 한산사(寒山寺), 근덕면 교곡리의 백양사(白楊寺) · 백운암(白雲庵), 사지로는 근덕면 상맹방리의 심방리사지(尋芳里寺址), 광태리의 민태사지(敏泰寺址), 정상동의 호대사지(虎大寺址), 미로면의 구방사지(九房寺址) 등이 있다. 영은사 대웅보전과 영은사 팔상전은 1982년, 영은사 괘불은 1986년, 흥전리 삼층석탑재는 2000년 강원도 유형문화재(현, 유형문화유산)로 지정되었다.
유교 유산으로는 교동에 삼척향교(강원도 유형문화재, 1985년 지정), 원덕읍 축전리에 산양서원(山陽書院), 근덕면 하맹방리의 정양재(正養齋), 모현사(慕賢祠), 치엄당(致嚴堂), 도원재(桃源齋) 등이 있으며, 효열각으로 이상효(李尙孝) 충효문 · 최연(崔連)효자각 · 김구정(金九鼎)효자각 · 최봉래(崔鳳來)효열각 · 김시천(金時千)효자각 등이 있다.
누정으로는 성내동에 삼척 죽서루(보물, 1963년 지정), 근덕면 하맹방리에 삼척 교수당(강원도 유형문화재, 1979년 지정)이 있으며, 비석으로는 정상동에 삼척 척주 동해비 및 평수토찬비(강원도 유형문화재, 1971년 지정), 원덕읍 노곡리에 소공대비(강원도 문화재자료, 1986년 지정) 등이 있다. 그 밖에 당저동에 홍서대와 그 보존각인 운한각(雲漢閣)이 있다. 홍서대는 1979년 강원도 민속문화재(현, 민속문화유산)로 지정되었다.
전통가옥으로는 원덕읍 옥원리의 삼척 삼성헌 고택(강원도 유형문화재, 1985년 지정), 미로면 고천리의 삼척 고천리 고택(강원도 문화재자료, 1985년 지정), 근덕면 무릉리의 김인주 가옥, 정면3칸 측면2칸의 너와집인 이종옥 가옥, 신기면 대이리에 굴피집인 이종순 가옥이 있다. 도계읍 신리에 1975년 중요민속문화재(현, 국가민속문화유산)로 지정된 삼척 신리 소재 너와집 및 민속유물 등이 있다.
천연기념물로는 도계읍 도계리의 긴잎느티나무(천연기념물, 1962년 지정), 하장면 갈전리에 삼척 하장면의 갈전리 당숲(천연기념물, 1982년 지정), 근덕면 궁촌리의 음나무(천연기념물, 1989년 지정), 교가리 느티나무(강원도 기념물, 1971년 지정)와 삼척 대이리 동굴지대(천연기념물, 1966년 지정), 근덕면 금계리의 삼척 초당굴(천연기념물, 1970년 지정), 도계읍 한내리의 삼척 저승굴(강원도 기념물, 1980년 지정), 무건리의 태백 용연굴(강원도 기념물, 1980년 지정), 미로면 활기리의 삼척 활기굴(강원도 기념물, 1980년 지정), 삼척 안의리 모과나무(강원도 기념물, 2005년 지정) 등이 있다.
미로면 내미로리 785번지 삼척 두타산 이승휴 유적(사적, 2000년 지정)가 있다.
조선시대의 교육기관으로는 1398년(태조 7)에 처음으로 삼척향교가 설립되었다. 이 향교는 처음에는 고사리재(古寺音谷) 동쪽 기슭에 건립되었다가, 1468년(세조 14)에 교동으로 이전해 현재에 이른다.
서원으로는 경행서원(景行書院), 산양서원(山陽書院) 등이 있다. 경행서원은 1631년(인조 9)에 교동의 북정산 아래에 건립되었으며, 김효원(金孝元)과 허목(許穆)을 배향하였다. 산양서원은 원덕읍 산양리에 설립되었다. 이것은 1824년(순조 24)에 홍면섭(洪勉燮) 등 사림들이 소동사(召東祠)를 짓고 황희(黃喜)를 제향한 데서 비롯된다. 이것은 1857년(철종 8)에 산양서원으로 승격되어 삼척 남쪽지방의 유일한 교육기관이 되었다.
교육기관으로는 근덕면 하맹방리 도촌에 정양재가 있었으며, 근덕면 상맹방리 심방골에 모현사(慕賢祠)가 있었다. 이 서원들과 정양재 및 모현사는 1868년(고종 5)의 서원철폐령으로 모두 철폐되었다.
근대 교육기관으로는 1907년 김동호(金東鎬) 등이 설립한 계동학교(啓東學校)가 있었다. 이것은 삼척향교의 재원을 모체로 하여 개교했으나, 일제의 탄압으로 1911년 삼척공립보통학교로 변경되었다가, 지금의 삼척초등학교가 되었다.
이 밖에 정명서당(正明書堂), 덕흥서당(德興書堂), 남양서당(南陽書堂), 이천학원(理川學院), 운주학원(運舟學院), 소원학원(所遠學院), 활로학원(活路學院) 등 많은 서당과 학원들이 있었으나, 일제에 의해 강제로 폐지되거나 공립학교에 병합되었다.
2015년 현재 교육기관으로는 초등학교 19개 교, 중학교 13개 교, 고등학교 9개 교 그리고 삼척대학교가 있다. 삼척대학교는 1939년에 삼척공립직업학교로 출발해 현재에 이르는데, 삼척시와 주변지역의 광공업에 필요한 인력을 양성하고 있다.
그리고 1956년에 설립된 삼척문화원은 매년 정월대보름에 개최되는 죽서문화제(竹西文化祭) 등 지역의 문화행사를 주관하며, 각종 사회교육을 담당하고 있다.
기타 교육 및 문화시설로는 2000년 개관한 삼척시립박물관, 삼척도서관, 도계도서관, 원덕도서관 등 공공 도서관, 공공 공연장, 민간 공연장, 영화관, 여성회관,복지회관 등이 있다. 체육시설로는 실내체육관, 종합경기장이 있다.
삼척의 대표적인 민속놀이는 기줄다리기이다. 1976년 6월 강원도 무형문화재로 지정되었는데 당시 강원도 문화재위원(현, 문화유산위원)이었던 김일기선생님의 고증과 기줄다리기 기능보유자 장봉식선생님의 지도로 1986년 강원도민속예술경연대회에 출연, 우수상을 수상했다. 삼척기줄다리기의 기원은 1662년 삼척부사 허목이 농자는 치국의 근본이요 식자민지본이라 하여 농민의 사기를 앙양하기 위해서였다 하는데, 정월대보름을 기하여 오십천을 중심으로 서북쪽지역을 말곡(末谷), 남동쪽 지역을 부내(府內)로 나누어 어린이들의 속닥기줄로 시작하여 어른들의 큰기줄다리기로 절정을 이룬다. 전하여지는 이야기로 기줄다리기에서 이긴 쪽은 풍년 풍어가 되고 그해 1년 동안은 질병에 걸리지 않으며, 진 쪽은 1년간 부역을 전담하지만 이긴 쪽과 한마당 놀이를 통해 만사형통한다고 한다. 삼척기줄다리기는 정월 초하루부터 대보름까지 15일 동안 어린이들은 속닥기줄로, 청소년들은 중기줄로, 최종적으로 어른들의 큰기줄로 절정에 이른다.
정월대보름 다음 날인 16일 저녁에는 “귀신쫓기”날이라 해서 대문 입구에 머리카락 · 고추 · 생대 등을 태우는데 그 냄새가 독하고 소리가 요란하여 귀신들이 도망간다고 믿고 잡귀를 쫓는 행사를 했다. 이날 신발을 엎어놓고 채를 문에 걸어놓는 풍습이 있는데 그것은 귀신이 채의 그 많은 작은 구멍을 일일이 다 헤아리다 보면 날이 밝아 침범하지 못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삼월 삼짇날이면 주로 부녀자들이 진달래가 만발한 산골짜기에 가서 진달래전을 부쳐 먹으며 시도 짓고 노는 화전놀이가 성행하였다. 오금잠은 『신증동국여지승람』 권44 삼척도호부 풍속으로, 1575년 삼척부사 김효원의 『성암유고』, 『척주지』 그리고 『척주선생안』 등 사료에 기록된 삼척고유의 민간신앙이다. 1천여 년 동안 5월 단오를 전후, 무격에 의하여 성대하게 거행되었던 제례행사와 주민의 놀이로서 흥겨웠던 한마당 잔치였다고 볼 수 있는데, 삼척시에서는 1993년 강원도민속예술경연대회 때 오금잠민속을 재정리하여 민속놀이부문으로 출연, 종합우수상을 받았다. 칠월 백중날은 남녀노소가 온갖 음식과 과일을 먹으며 씨름대회를 거행하고 장치기 등도 하였다. 이 밖에도 다른 지방과 마찬가지로 연날리기 · 그네뛰기 · 복달임 등의 민속놀이가 있다.
대표적인 동제로는 근덕면 장호리의 서낭제와 원덕읍 갈남리의 백호서낭제, 신남리의 해신당제(海神堂祭) 등이 유명하다. 이들 서낭제는 정월 대보름을 전후해 지내는데, 신남리 서낭제의 경우 정월 대보름과 음력 10월 첫 말날[午日], 곧 춘추로 지낸다. 제의 방식은 유가식(儒家式)으로 하고 있다.
이 밖에도 기우제는 두타산사(頭陀山祠), 근덕면 하맹방리 초당골의 소한연(蘇瀚淵), 가곡면 삼방산(三方山)의 용담(龍潭), 노곡면의 용소(龍沼) 등에서 제사를 지냈다.
서낭제는 서낭제사, 서낭고사, 동네치성 등으로 불린다. 자연마을마다 서낭당이 있어 행정적으로 구분되는 한 리에 여러 개의 당이 있는 경우가 흔하다. 예를 들어 미로면 동산리에는 세 개의 서낭당이 있어 반별로 고사를 모시고 있는데, 서낭은 할머니나 할아버지로 남녀를 구분하고 있고, 해안마을에서는 마을을 수호하는 서낭당과 해사를 주로 돌보아주는 해서낭으로 나뉘어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서낭제는 마을마다 정해진 달이나 날짜가 있다. 달만 정해져 있는 경우에는 따로 날을 받아 모시게 된다. 서낭제의 시기는 정월 초나 정월 보름이 가장 많고 단오나 삼월 시월 중에 하는 경우, 또는 칠월 칠석에 지내기도 한다. 일 년에 단 한번 지내는 마을도 있지만 두 번 내지 세 번 지내는 마을도 상당수 있다. 초곡리의 경우를 보면 정월 대보름과 오월 단오날에 서낭제를 지내고, 그 외 동짓달 초사흗날이 성황당 입주 상량한 날이어서 성황님 생일로 정하고 제사를 모시고 있다.
삼척지역의 서낭당은 나무와 당집, 돌무더기나 바위로 된 형태가 가장 많다. 당집 안에는 위패가 모셔져 있는데 ‘성황지신 신위(城隍之神 神位)’라고 쓴 단순한 위패도 있고, ‘성황지신(城隍之神)’, ‘토지지신(土地之神)’, ‘여역지신(勵疫之神)’을 함께 모시는 경우도 있다. 이와 함께 흙이나 쇠로 만든 말을 모시는 마을도 많다. 말은 한 마리인 경우도 있고 여러 마리를 함께 모시기도 한다. 대개는 다리 하나가 부러져있는데 서낭을 위해 호랑이와 싸우다가 다쳤기 때문이라고 한다.
해안마을의 서낭제는 특별히 해사를 돌보는 신을 따로 모시는 마을이 많다. 즉 마을을 수호하는 서낭신과 해사를 돌보는 신으로 갈라져 있다는 점이 특징이다. 이때 해사를 돌보는 서낭은 대부분 여신이지만 남신일 때도 있다. 용화리에는 본서낭당이 1리에 있고 바닷가의 해신당은 2리에 있다. 본당에서의 제사는 1리와 2리의 주민 모두가 지내고, 해신당은 어민들만 제사를 올린다. 또한 노곡에는 서낭당 외에 댕두, 또는 댕우서낭이 있어 해사를 보호해준다. 댕우서낭은 바닷가 백사장에 약 2m 정도 높이의 작은 바위가 신체로 향나무가 자라 있는 한쪽 면의 아래에 가로 세로 30cm 정도의 단을 시멘트로 발라 만들어놓았다. 댕우서낭에는 바닷일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고기를 많이 잡게 해 달라고 개인적으로 와서 빈다고 한다.
갈남에는 두 개의 서낭당이 있는데, 첫째는 호서낭이라고 믿는 마을의 당이고 또 하나는 해서낭이다. 서낭당은 국도를 질러 마을을 굽어보는 야산 중턱에 있다. 서낭당은 기와지붕에 정면은 넉넉한 한 칸으로 3미터쯤 되고, 측면은 두 칸인데 역시 3미터 정도이다. 안에는 ‘城隍之神’이라고 쓴 위패와 촛대하나만이 있다. 신격은 할아버지라고 하며 또한 온 몸이 하얀 호랑이라고도 생각한다. 옛날에는 서낭님 치성을 모시기 3 · 4일 전이면 호랑이가 나타나 돌아다니는 것을 보았다는 사람이 적지 않았다고 한다. 지금도 주민들은 함부로 호랑이란 말을 하지 않고 큰 짐승이라고 하며 조심하는 것을 볼 수 있다.
해서낭은 여서낭, 해당할머니라고도 한다. 1반 마을 집 사이에 있는데 신체는 오래된 소나무와 아래에 있는 바위이다. 나무에는 창호지로 예단을 바쳤고 열기머리를 걸어두었다. 아래에 시멘트를 발라 제단을 마련하고 지름 50㎝ 정도의 남근석을 모셨다.
삼척에는 천제(天祭)를 올리는 마을이 있다. 신기면의 고무능리, 미로면의 내미로리가 대표적이다. 10년에 한번씩 모시는 내미노리 천제봉 제사에는 반드시 왼소 한 마리를 잡아 생고기를 제물로 써야 한다. 그러나 오랫동안 재정문제상 소를 잡지 못하다가 35년만인 1993년 7월에 지냈던 제사 때는 소 한 마리를 잡았다. 소를 잡을 때는 살아있는 소를 천제당에 데리고 가서 그곳에서 직접 잡는다. 천제는 밤 12시를 기해 지내는데 이때는 남자주민들만 참석한다. 생기를 맞추어 선정한 삼헌관을 중심으로 제사를 모시는데 제주를 올린 후 축문을 읽고 경건하게 지낸다. 제사가 끝나면 마을 사람들과 함께 음복을 하기 위해 음식을 골고루 돌려 복을 함께 나눈다.
초곡리에도 상천지신을 모시는 천제당이 산꼭대기에 있다. 지금은 성황당에서 망제로 대신하고 있지만 예전에는 천제당에서 제사를 지내고 난 후에 성황당에서 제사를 지냈다고 한다. 하월천리는 마을 입구의 숫서낭과 마을 끝에 있는 암서낭 그리고 마을 뒤편 봉화산의 천제당을 모신다.
원덕읍 갈남2리인 신남은 남근을 모시는 것으로 유명한 마을이다. 지금도 신남의 서낭당에는 나무로 깍은 남근이 수십 개 잘 엮어진 채 걸려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남근은 서낭제를 올릴 때 깎는다. 신남의 서낭제는 정월 대보름날과 시월의 첫 오(午)일에 지낸다. 제사를 오(午) 일에 모시는 이유는 처녀의 기가 세다고 하여 가장 기가 센 말날로 잡은 것이라고 한다. 서낭당은 본당인 해신당이 바닷가에 있고, 큰 당은 산 속에 있는데 큰 당은 최근 산불에 소실되어 다시 지었다.
해신당은 처녀가 해물을 따기 위해 장차 그녀의 남편이 될 사람이 애바위에 데려다 주었는데 거기서 폭풍우를 만나 죽게 되자 죽은 처녀의 혼을 위로하기 위해 당을 만들어 제를 지내준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처녀가 죽은 뒤 고기가 안 잡혔는데 한 어부가 술에 취해 해신당 자리에 오줌을 누었더니 그후 만선이 되었다고 한다. 그 후부터 어부들이 바다에 나가거나 해신당 치성을 드릴 때는 신(남근)을 깎아 해신당에 걸어놓았다고 한다.
당주와 제관은 서낭제 올리기 2주 전에 정한다. 제관은 큰 당으로 3명이 가고 해신당으로 2명이 가서 동시에 제사를 주관한다. 당주는 제사에 쓰일 음식을 준비하여 큰 당으로 가게 된다. 금줄은 서낭제 지내기 3일 전에 당주집과 두 서낭당에 친다. 제관은 제사 지내는 날 향나무를 베어다가 저녁에 해신당에 걸어놓을 신을 깎는다. 신은 세 개나 다섯 개, 일곱 개 등의 홀수로 깎는데, 보통은 다섯 개다.
제물은 일반제사와 같은 음식을 사용한다. 육고기는 소고기를 올리고 돼지고기는 제물로 쓰지 않는다. 메는 큰 당과 해신당에 각각 하나씩 올린다. 또한 시루떡을 양쪽 당에 하나씩 놓는다. 옛날에 정월 보름 제사 때는 소를 잡아 미역국을 끓여 동네 사람들이 모두 모여 음복을 하였다 한다. 제사비용은 어민들이 전복이나 해삼 등의 해물을 채취하여 적립한 동네 자금으로 충당한다.
짐대서낭은 원덕읍 임원과 미로면 고천리, 활기리에서 모시고 있다. 짐대는 흔히 다른 지역에서 솟대라고 부르는 것으로 긴 나무 위에 새 모양을 깎아 세운 것이다. 짐대는 대개 마을에 들어오는 액을 막아준다고 믿는다. 먼저 임원리의 짐대를 보면 3m 정도 높이의 소나무 기둥에 나무로 새를(이곳에서는 갈매기라고 부릅니다) 세 마리를 깎아 올려놓은 모습이었고 새들은 모두 북쪽 방향을 바라보고 있다. 짐대의 몸통에는 20cm 너비의 검은 띠와 붉은 띠가 마치 용이나 뱀이 올라가는 나선형 모습으로 그려져 있다. 짐대는 바다로부터 오는 재앙을 막기 위해 세워졌다고 한다.
짐대 옆에는 성황당 건물이 있는데 남성황이라고 한다. 1리에는 두 명의 처첩인 여서낭이 있어 굿을 할 때에는 대를 내려다가 모신다. 풍어제 하루 전날 무당이 칼을 들고 짐대에 가서 짐대 몸체에 종이를 걸어놓고 칼을 짐대에 던져 꽂히면 ‘성황님 오셨다’고 한다.
대방골이라 부르는 미로면 고천리 5반에도 짐대가 있다. 짐대 위의 오리는 1983년 이전까지 나무로 깎아 만들어 올렸으나 지금은 슬라브로 바꾸어 달아 놓았다. 역시 마을로 들어오는 액을 막기 위한 것이라고 믿는다.
이 고장의 설화로는 「백년금관전설(百年金棺傳說)」 · 「정랑총전설(鄭娘塚傳說)」 · 「살해재전설」 · 「자명죽전설(自鳴竹傳說)」 · 「아기장사설화」 · 「해망산의 부용선녀」 · 「동해척주비」 등이 있다.
「백년금관전설」은 이안사(李安社 : 뒤에 穆祖로 추존됨.)의 아버지 묘터에 관한 이야기이다. 이안사가 아버지의 상을 당해 묘지를 구하던 중, 한 도승이 혼잣말로 이곳이 명당이라면서 소[牛] 100마리로 개토제(開土祭)를 지내고 관은 금으로 싸서 장사를 지내면 왕이 될 귀한 자손이 나게 될 것이라고 하였다.
이를 엿들은 가난한 이안사가 흰 소[白牛]로 제물을 쓰고 금빛이 나는 보리짚으로 금관을 대신해서 묘를 썼다. 이 묘가 준경묘인데, 과연 그 뒤 도승의 예언대로 그 후손인 이성계가 나라를 세웠다고 한다.
「정랑총전설」은 도계읍 대평리 정씨 집안에 절세미인 정랑의 묘에 관한 것이다. 이 정랑에게 장가만 들면 첫날밤에 반드시 신랑이 죽어나와 혼인을 할 수 없는 숙명을 지녔다. 그런데 이것을 감당해 내겠다는 총각이 나타났다. 그러나 정랑은 젊은 선비를 비명에 가게 하기 싫어서 구혼을 거절하였다.
혼인을 거절당한 젊은 선비는 이를 악물고 공부해 과거에 급제해 우연히 이 마을을 지나게 되었는데, 이 소식을 들은 정랑은 분함을 이기지 못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이 여인이 죽은 자리에 묘를 만들어 주었는데 이것이 정랑의 무덤이다.
「살해재전설」은 고려의 마지막 임금 공양왕이 두 왕자와 추종자 500여명과 함께 살해된 곳이라 하여 불리는 근덕면살해재[殺害峙]에 관한 이야기이다.
「자명죽전설」은 근덕면덕봉산(德峯山)에 있는 대나무에 관한 이야기이다. 덕봉산에 밤마다 소리내어 우는 대나무가 하나 있었는데, 맹방(맹바우)에 사는 홍견(洪堅)이라는 사람이 신령에게 제사지낸 뒤 자명죽을 찾아 그 대나무로 화살을 만들어 무과에 급제, 홍씨가문을 유명하게 만들었다고 한다.
또한,「아기장사설화」는 근덕면 동막리 지은(地隱)의 아기장사에 관한 슬픈 이야기이다. 이 동네의 권씨부부 사이에서 학봉(鶴峰)이라는 장사가 태어났으나 멸문의 화를 당할까 두려워한 나머지 귀한 자식이지만 네 발 달린 큰 떡안반으로 누르고 맷돌을 얹어 죽이니, 그날 밤 빗내곡[飛川谷] 용소에서 용마가 나와 밤새도록 슬피 울다가 죽었다고 한다.
「해망산(海望山)의 부용선녀」설화는 삼척시 원덕읍 호산리 해변에 외따로 우뚝 솟은 해망산과 관련된 것이다. 고려 때 부용이라는 선녀가 와서 놀다가 갔다 하여 일명 ‘부용산’이라고도 한다. 서남쪽 주위가 강물과 바닷물이 맞닿는 갯목으로 호수가 되었는데 그 이름 또한 부용호이다. 이 태조 2년의 기록에 의하면 송곡은 옥원 동쪽에 있고 송곡 북쪽에 부신당이 있으며, 당전에 해망산이 있고 부신당 남쪽에는 죽현이 있다 하여 조선 초기에 이 호수를 부신당이라 불렀음을 알 수 있다. 이 해망산에 대한 전설로 양양에 삼형제 산봉우리가 있다. 해상으로 떠서 남쪽으로 흘러오다가 그 중 맏이는 근덕면 덕산리 해수욕장에 있는 덕봉산이고, 둘째가 원덕읍 호산리에 있는 해망산이며, 셋째는 울진에 있는 비래봉이라 한다.
「동해척주비」관련 설화는 다음과 같다. 조선 후기 미수 허목이 삼척부사에 부임하여 왔을 때 동해의 조수(潮水)가 들이 닥쳐 삼척죽서루와 삼척향교 근방까지 바닷물이 밀려 들어와 피해가 막심하였다. 이에 미수는 삼척 육향산에 퇴조비(退潮碑)를 세우고 조수의 피해를 막았다고 한다는 내용이다. 그런데 일제강점기에 일본사람들이 이를 미신이라 하면서 퇴조비를 없애버렸는데 이후 조수가 다시 발생하여 도헌마리라는 곳에 묻혀있던 퇴조비를 다시 세워 조수 피해를 막았다고 한다.
「박걸남(朴杰男)장군」 설화는 삼척시 노곡면(盧谷面) 여삼리(閭三里)와 관련 있다. 부친의 나이 40세가 되어도 자식이 없어 근처의 금태봉(金태峰)이라는 명산에 들어가 100일 기도를 드리던 마지막 날 밤 꿈에 백발노인이 나타났다. 큰 칼 한 자루를 내어 주며 이는 용천검(龍泉劍)이니 잘 기르면 반드시 쓸 곳이 있을 터이니 조심하라고 당부하였다. 깜짝 놀라 깨어 보니 꿈이었으나 신기하게도 두 내외가 같은 꿈을 꾸었던 것이다. 과연 그 달부터 태기가 있어 열달 후에 출생을 앞두고는 기도를 드렸던 금태봉산이 3일을 끙끙 울더니 걸남장군이 태어났다. 전하는 말로는 선녀가 내려와서 바라지를 하고, 그 집 대문에 피를 칠하여 표를 해 놓고 갔다고는 하나 믿을 만한 근거는 없다.
박걸남 장군은 담도 세지만 기골이 장대하고 음성이 마치 백호가 산 위에서 우는 소리 같았다. 그의 나이 30세가 되었을 때는 한말 밥을 먹고, 술은 동이 채로 마셨다 한다. 그는 매우 황잡했으나 주위에 말 할 사람이나 해칠 사람도 없었으며, 그는 책도 보지 않아 무식한 농부였지만 힘은 천하장사였다.
때는 이조 선조 25년경이었는데 근처 산전에 가서 황소 두마리로 밭갈이를 하던 중 나라에서 난이 일어나 군대 동원령이 내렸다는 소문을 듣고 박걸남장군은 “때는 왔다.” 하면서 소에 씌운 멍에를 벗기지도 않고 쟁기가 달린 채 황소를 끌고 집으로 왔다. 부친 앞에서 무한히 기뻐하며 점심도 안 먹고 전쟁터로 떠난다 하니 아버지가 “전쟁은 한창인데 네가 무슨 용맹이 있겠느냐?” 하니, 박장군은 “소자, 비록 기운은 없으나 아버님 보십시오.” 하며 앉았던 방에서 왈칵 치솟으니 천장과 지붕 말기를 뚫고 나와서 그 길로 바로 한양 길에 올랐다. 때마침 당나라 장수 이여송과 이여백, 이여매의 3형제와 해군으로 이이진이 10만 대군을 인솔하고 왔을 때이다. 군에 입대하여 여송군대의 지휘관으로 한 일은 첫 육박전을 겪게 되었다. 박장군은 교전하다가 왜장 가등청정의 말 왼쪽 다리를 베었다. 그래서 왜장 청정은 우리 장군의 말을 빼앗아 달아났다고 전한다.
7년 후, 전라도 지방은 왜적이 그곳에 농사를 지으면서 물러가지 않더니 왜국의 풍신수길이 죽으며 철병령이 내려 왜적은 물러가고 우리나라는 완전히 평란되었다. 전란 후 선조는 태평연을 베풀고 노고를 치하하며 벼슬을 하사하였다. 그 때 박걸남 장군은 국고에 들어가 엽전 500냥을 몸에 감고 마루에 올라서니 마루의 널빤지가 부러졌다. 그걸 본 왕은 “박장군은 가진 돈만 해도 공의 대가가 되었으니, 벼슬을 그만두라.”고 하니 박장군의 7년 동안 애쓴 공은 수포로 돌아갔다. 그 후 대신들이 박장군의 공이 크다고 상신하니 왕이 병조판서의 관직을 수여하였다. 박장군의 묘를 3백년 뒤 이장할 때 백골은 황금 같고 두골부터 족골까지는 환골인데 두골을 드니 족골까지 연결되어 있었다는 후손들의 설이 전한다.
그 후, 박걸남장군의 묘는 수년 전에 국고 보조를 받아 대대적인 정화를 하였다. 묘는 노곡면 여삼리에 있고 그 앞에 사당이 있어 매년 후손들이 제사를 올린다.
이 밖에도 「석화총전설(石花塚傳說)」 · 「용추폭포전설」 · 「애바위전설」등이 전한다.
삼척시는 바다를 끼고 있기 때문에 「노젓는 소리」 · 「가랫소리」와 같은 어업요가 원덕읍 신남 · 갈남리 등에 널리 전하고 있고, 산간지역에서는 임목 벌새와 관련하여「목도소리」인 노동요가 불려진다. 범선의「노젓는 소리」는 다음과 같은 식으로 불린다.
“어이싸 어이싸(노를 저을 때 반복)/ 지∼ 지∼(힘을 더 써서 속도를 내라)/ 이어싸 이어싸(힘드나 천천히 저으며 쉬자)/ 지어차 지어차(쉬었으니 다시 젓자)와 같다.
「가랫소리」는, (일 동) 어리둥 가래야/ (앞소리) 고기 많이 들었다/ (뒷소리) 어∼이∼둥∼가리∼/ (앞소리) 에이 깊이 넣어봐라/ (뒷소리) 에∼이∼둥∼가리∼/ (앞소리) 안죽 멀었다. 한번 더 넣어봐라/ 아이쿠 좋다 놀려라/ (뒷소리) 어이싸 에∼이∼둥∼가리∼”
아라리도 「삼척아라리」라 하여 부르는데, 정선아라리조로 부르기도 하고, 보통 아리랑타령으로 부르기도 한다. 또한, 아라리를 주고받다가 엮어서 길게 나가는 민요로 「사리사리야」가 있는데, 그 가사는 “아∼해야 사리야/ 정월달에 드는 달은/ (후렴) 아∼이 사리야/ 이월 연등에 막아주소/ (후렴) 아∼사리 사리야/ 삼월삼질에 막아주소…….”와 같이 달거리로 되어 있다.
그리고 「까마귀경문」이라는 민요는 까마귀를 보면 재수가 없기 때문에 외워대는 주술적 노랫말로, “까마귀 까/ 진우상/ 사 바스스기/ 사바세이”와 같이 간단한 노랫말로 되어 있다. 이 밖에 「엿장수노래」가 있는데 그 내용이 매우 익살스럽다.
「목도소리」는 산 아래로 내려 온 통나무를 줄과 목도채를 이용하여 어깨에 메고 운반할 때 부르는 소리이다. 「목도소리」의 주된 기능은 두 명이나 네 명, 또는 여덟 명이 서로 걸음을 맞추어 무거운 물건을 운반할 수 있도록 박자를 맞추는 것이다. 두 명이 메고 운반할 때는 걸음이 빨라서 소리도 빠르지만 여덟 명이 메고 운반할 때는 걸음이 느리고 따라서 소리도 느려진다고 한다. ‘목도소리는 나무가 무거울수록 소리가 잘 되고 듣기가 좋은데 소리가 맞지 않으면 발도 맞지 않아서 일을 하기가 곤란하다’고 하는데 그 만큼 기능과 밀착되어 있는 소리라고 할 수 있다. 가창방식은 집단 반복창으로 항상 앞소리와 뒷소리가 맞물려서 진행된다. 집단반복창이지만 가끔은 박자에 어긋나지 않는 범위에서 자유롭게 잡담을 넣기도 한다.
허영차/ 저어어/ 하여차 하자/ 하정 하자/ 아이고나/ 이야하 하야/ 이야차 하자 하자/ 하이야 하야/ 아이고나 하자/ 하여 하여/ 어여차 허여/ 어허여 허여/ 어이구나 허저 하자/ 이야하 하야/ 아이구 아이구 허여차 하정/ 하정 하정/ 어여차 하정/ 이야하 하야/ 하정 하정/ 이야하 하야/ 얼씨구나 아이구나 하정 하야/ 어야하 하아/ 하정 하야/ 이야하 하정/ 아이고 히야차 하정/ 하정 하자
가곡면은 옛날부터 산판이 성행했던 곳이다. 특히 삼방산 등에서는 경복궁 대들보로 쓰이던 황장목이 나오기도 했다. 이 소리는 산에서 산판을 할 때 통나무를 산 아래로 끌어내리며 불렀던 소리이다. 써루(통나무를 들어주는데 쓰이는 도구)를 잡은 사람이 앞소리를 메기면 도비(통나무을 찍어 당기는데 쓰이는 도구)꾼들이 뒷소리를 받는 선후창 일노래이다. 뒷소리는 자유롭게 받지만 도비꾼들이 가장 많이 받는 소리는 ‘어이 산호’이다. 요즘 소리는 좀 빠르다고 한다. 예전에는 나무가 커서 자리를 잡는데 시간이 걸려 소리도 길고 늘어졌지만 요즘은 나무가 작고 일의 속도가 빨라서 소리도 빨라졌다고 한다. 앞소리의 사설은 대부분 일을 지시하는 내용이지만 산판하는 사람들의 애환도 잘 드러나고 있다.
(앞소리)태산같은 공고시가/ (뒷소리)어야 산호/ (앞소리)세 살 먹은 어린 아기처럼/ (뒷소리)어야 산호/ (앞소리)살금살금/ (뒷소리)어야 산호/ (앞소리)걸음마를 타는구나/ (뒷소리)어야 산호/ (앞소리)어디 보자 이때 도비상/ (뒷소리)어야 산호/ (앞소리)들구 마 채 보자/ (뒷소리)어야 산호/ (앞소리)아이고나 잘도 하네/ (뒷소리)어야 산호/ (앞소리)그 도비상이가 어데서 왔는고/ (뒷소리)어야 산호/ (앞소리)일본서 왔는가야/ (뒷소리)어야 산호/ (앞소리)우리 한국 사람이가 하는가야/ (뒷소리)어야 산호/ (앞소리)잘도만 한다야/ (뒷소리)어야 산호/ (앞소리)선줄쟁이가 기분이 좋네/ (뒷소리)어야 산호/ (앞소리)일루 도비가 어데 있는고/ (뒷소리)어야 산호/ (앞소리)내오기만 하면은/ (뒷소리)어야 산호/ (앞소리)못할 일이가 없네야/ (뒷소리)어야 산호/ (앞소리)내레간다 내레간다/ (뒷소리)어야 산호/ (앞소리)낭기가 내레간다/ (뒷소리)어야 산호/ (앞소리)잘도만 하는/ (뒷소리)어야 산호/ (앞소리)우리도비상이가 고맙네요/ (뒷소리)어야 산호/ (앞소리)어이도 산호야/ (뒷소리)어야 산호/ (앞소리)너무 당겨서/ (뒷소리)어야 산호/ (앞소리)마구라를 돌리고/ (뒷소리)어야 산호/ (앞소리)너무 당겨서/ (뒷소리)어야 산호/ (앞소리)발비로 모시자/ 어야 산호/ (앞소리)너무 당게서/ (뒷소리)어야 산호/ (앞소리)소풍으로 모시고/ (뒷소리)어야 산호/ (앞소리)너무 당게서/ (뒷소리)어야 산호/ (앞소리)대풍으로 모시자/ (뒷소리)어야 산호/ (앞소리)우리는 무슨 죄로/ (뒷소리)어야 산호/ (앞소리)죽은 낭게 목을 매고/ (뒷소리)어야 산호/ (앞소리)사시장창 이러는가/ (뒷소리)어야 산호/ (앞소리)태산같은 공고시가/ (뒷소리)어야 산호/ (앞소리)덤불겉이도 하강하네/ (뒷소리)어야 산호/ (앞소리)이놈도 통안으로/ (뒷소리)어야 산호/ (앞소리)저놈도 통안으로/ (뒷소리)어야 산호/ (앞소리)잘들이 하는구나/ (뒷소리)어야 산호.
산지가 넓게 차지하고 있는 관계로 산업별 구조는 1차 산업의 비중이 매우 높다. 총 경지면적 71.9㎢ 중 논이 15.4㎢, 밭이 56.5㎢로 밭이 많고, 농가가구 및 농가인구는 감소 추세에 있다.
주요 농산물로는 쌀이 좁은 해안 평야와 각 하천하류의 충적지에서 생산되는데, 근덕면과 원덕읍에서 약 70% 이상을 생산한다. 겉보리와 밀은 미로면과 원덕읍에서 60%를, 옥수수를 중심한 잡곡은 하장면 · 도계읍 · 미토면 · 노곡면에서, 두류는 미로면 · 도계읍 · 하장면 · 근덕면에서, 고구마는 하장면 · 근덕면 · 노곡면 등지에서 많이 생산된다.
근래에 이르러 채소의 생산이 증가하고 있는데, 특히 하장면은 고랭지채소를 중심한 생산이 많아 70% 이상을 차지한다. 특히, 원덕읍에서 마늘을 집단 재배해 소득증대에 큰 몫을 하고 있다. 한편, 농기계의 보급은 계속 증가하고 있다.
산간지대가 많아 목초지 조성이 쉬워 축산업은 한우, 젖소의 사육 외에, 돼지 · 사슴 · 산양 · 닭 등의 사육이 증가되고 있다. 임야면적은 1045.3㎢이고, 주요 임산물은 밤 · 대추 · 도토리 · 잣 · 호두 · 은행 등의 종실류와 약초 · 산수유 · 버섯류 등이다.
수산업은 계절에 따라서 한류와 난류가 교류해 어종이 풍부한 편으로 오징어 · 꽁치 등이 주된 어획물이며, 미역의 생산도 많다. 어업가구 및 어업인구는 계속 감소하고, 어선은 대부분 5톤 미만의 소형 어선에 의한 연안어업에 의존하는 실정이다.
따라서 영세어업 또는 반농반어(半農半漁)의 형태를 보인다. 주요 어항으로 정라항 · 임원항 외에도 호산 · 장호항 등이 있고 그밖에는 소규모이다.
이 지역에는 무연탄을 비롯한 각종 지하자원이 풍부히 매장되어 있다. 무연탄과 석회석은 도계읍을 중심으로 한 지역에서, 금 · 은 · 연 · 아연 · 납석 및 장석 등은 원덕읍에서, 고령토는 원덕읍과 노곡면, 규사는 근덕면에서 산출된다. 제조업은 시멘트를 비롯해 기계 · 섬유 · 제빙 · 냉동업 등이 이루어지고 있고, 도계읍과 근덕면에는 농공단지가 조성되어 있다.
상업활동은 예로부터 이루어져 1770년대에 읍내장이 2 · 7일에, 근덕의 교가장이 1 · 6일, 장성의 대전장이 5 · 10일에 개설되었고, 1830년대에는 대전장이 폐쇄되어 2개장 만이 남았으며, 이는 1912년대까지 계속되었다. 1923년대에는 읍내, 교가장 외에 원덕의 호산장이 3 · 8일에, 하장의 광동장이 4 · 9일에, 도계에 고사장과 5 · 10일에, 상장에 황지장이 5 · 10일 에 개설되는 등 4개가 증가되었다.
1926년대에는 앞의 6개와 함께 미초에 미초장이 4 · 9일에, 노곡에 월산장이 5 · 10일에 개설되는 등 총 8개의 장이 개설되었다. 1938년대에는 앞의 8개 중 황지장이 4 · 9일로 바뀌고, 원덕에 오저장이 2일 · 12일 · 22일에 장호장이 5일 · 15일 · 25일에, 하장에 역둔장이 5 · 10일에 개설되는 등 총 11개의 장으로 증가되었다.
1963년대에는 읍내 · 교가 · 광동 · 미호 · 월산장 등은 그대로 지속되었고, 원덕에 임원장이 1 · 6일에, 호산장이 5 · 10일에, 도계읍에 도계장이 4 · 9일에, 장성에 장성장이 5 · 10일 및 황지장이 5 · 15일 · 25일에 개설되는 등 10개장으로 1개가 감소되었다. 1976년대에는 읍내장이 상설로 되고, 교가 · 호산 · 도계장 등 4개로 감소된 이후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교통은 7번 국도가 해안선을 따라 시를 남북으로 통과해 북으로는 동해시, 남으로는 포항시까지 고속화되어 연결되고, 35번 국도가 하장면을 남북으로 달려 태백시∼강릉과 연결되며 38번 국도가 오십천 계곡을 따라 태백시와 연결된다. 지방도는 424번이 하장∼사북과 하장 · 미로 · 노곡 · 근덕, 427번이 도계 · 노곡 · 근덕, 416번이 도계 · 가곡 · 원덕이 있다.
한편, 시 · 군도가 9개 노선이 있어 각 읍 · 면지역과의 교통이 이루어지는데, 이들 노선을 보면, 1번 상정∼사둔, 2번 도계∼호산, 3번 동막∼금계, 4번 고사∼궁촌, 5번 덕구∼용화, 6번 역둔∼맹방, 7번 풍곡∼석포, 8번 신기∼대이, 9번 노곡∼조비 등이 있다.
철도는 동해와 삼척사이에 부설된 삼척선이 동해안을 따라 지나고, 영동선이 시의 서북부 도경역에서 오십천하곡을 따라 부설되어 태백선과 연결된다. 이곳에서 미로, 상정, 신기, 마차리, 고사리, 도계 등의 역이 있다.
서쪽으로 높은 산지와 동쪽의 긴 해안선 사이에 오십천(五十川)울 끼고 있어, 자연 경관이 다양하게 나타난다. 관광지로는 수심이 얕으며, 넓고 깨끗한 백사장이 있는 삼척해수욕장, 명사십리백사장과 울창한 송림, 덕봉산 및 기암괴석이 절경을 이루는 맹방해수욕장, 초당석회동굴, 초당저수지 등의 관광자원이 있다.
그리고 앞으로 골프장, 관광농장 등을 갖춘 국내 최대의 관광단지가 될 근덕면의 초당 관광지, 용화 · 장호해수욕장과 한국의 나폴리라고 불리울 만큼 아름다운 해안선이 있는 원덕읍의 장호 관광지가 있다.
중요 관광자원으로는 죽서루(竹西樓) · 회강정(廻江亭) · 척주동해비 · 실직군왕릉(悉直郡王陵) · 대이리 석회동굴 · 미인폭포, 환선굴 등이며, 원덕읍의 임원과 울릉도간에는 관광객을 위한 쾌속선이 다닌다.
삼척시 신기면 대이리에 위치한 환선굴은 1966년 6월 15일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었고, 1997년 10월 15일 일반에게 개방되었다. 총연장 6.2㎞, 개방구간은 1.6㎞, 관람시간은 약 1시간, 동굴규모는 입구 폭 14m, 높이 10m, 내부 폭 20∼100m, 높이 20∼30m이다. 동굴 내에 여러 개의 크고 작은 폭포가 있으며, 많은 동굴수가 흐르고 있다. 동굴 내부에는 수많은 작은 휴석으로 이루어진 기형 휴석(옥좌대), 규모가 아주 큰 종유석(도깨비 방망이), 휴석, 유석, 커어튼 등 많은 동굴생성물이 뛰어난 경관을 보이며 성장하고 있고, 종유관, 동굴진주, 동굴산호, 월유 등의 아름다운 동굴생성물이 큰 규모의 광장과 힘차게 흘러내리는 동굴수와 조화를 이루며 화려한 장관을 이룬다. 동굴의 천장에는 과거 지하수가 흘러내리면서 석회암을 녹인 흔적인 용식공이 많이 발견된다. 지금까지 환선굴에서 발견된 동굴동물은 모두 47종이며, 이 중에서 환선장님좀딱정벌레 등 4종이 환선굴에서만 발견되거나 환선굴이 모식산지로 기록되고 있다. 동굴 입구에서 첫 번째 광장에 있는 동굴수 내에 꼬리치레도롱뇽이 서식하고 있다.
고려 충렬왕 때 이승휴가 세운 죽서루는 관동팔경의 하나로 ‘관동제일루(關東第一樓)’라는 현판이 붙어 있고, 누각에는 율곡과 많은 명사들의 강산풍월(江山風月)을 읊은 시가 있다. 누각의 절벽 아래는 맑고 깨끗한 오십천이 흐르고, 누각 부근 오십천의 석벽 위에는 450년 전에 죽서루의 풍치림으로 심었다는 괴화나무가 있다.
오십천이 방향을 바꾸는 도경리에는 조그마한 바위섬이 있고, 이 곳에는 척주팔경(陟州八景)의 하나인 회강정이 있었는데, 지금은 정자의 옛 터만 남아 있다. 이 섬은 아무리 큰 홍수가 있어도 물에 잠기지 않는다 하여 명당의 못자리로 알려져 있다.
오십천을 따라 하류로 내려가면, 육향산(六香山) 중턱에 척주동해비가 있다. 이 비는 매년 조수(潮水)가 오십천으로 밀려 올라와 이를 막기 위해, 1662년 삼척부사 허목(許穆)이 세웠다고 한다. 이 비문의 내용은 동해 해신(海神)에게 동해의 안전을 기원하는 것이다.
2002년 삼척세계동굴엑스포의 주행사장에 있는 대표적인 시설물인 삼척엑스포타운은 1, 2층 동굴신비관에서는 세계유명동굴과 영화 속의 동굴, 동굴의 문화연출, 동굴의 과거, 현재, 미래 디오라마, 동굴의 파괴와 보존 디오라마와 환생교 및 학술관련자료, 동굴 내 서식동물인 박쥐의 생태, 기념사진촬영코너 및 전망대, 박쥐의 일생을 디오라마로 연출하고, 3, 4층 주제영상관에서는 대형 I · MAX영상으로 환상의 동굴을 체험할 수 있다.
계곡으로는 가곡면 풍곡리덕풍계곡, 가곡면 동활리동활계곡, 하장면 중봉리중봉계곡, 도계읍 심포리미인폭포, 원덕읍 이천리이천폭포 등이 수려한 자연풍광을 자랑한다.
삼척시 개최 축제는 해맞이축제, 정월대보름축제 등이 있다. 해맞이 축제는 새해의 소망을 기원하는 행사로 소망의 탑에서 바라보는 동해의 일출이 장관이다. 매년 12월 31일∼1월 1일 (2일간)에 새천년도로와 소망의 탑에서 진행된다. 정월대보름축제는 정월대보름에 실시했던 이 고장 특유의 기줄다리기를 주축으로 천신, 농신, 해신에게 소재 초복과 풍년, 풍어를 기원하는 삼원제와 기타놀이를 곁들여서 정원대보름에 거행하는 제전이다. 1973년 음력 정월 15일에 사대광장의 옛터인 구시청 앞 대로에서 제1회의 막이 올랐다. 이 행사는 해를 거듭할수록 주민들의 호응도가 높아지고 전국에 널리 알려져 삼척시의 민속제전이 아니라 전국적인 특유한 민속행사로 발전하게 되었다. 1978년 제67회에 접어들면서 삼척시민 중심의 정월대보름제가 범국민축제로 발전 확대되어 삼척민속놀이위원회는 죽서문화제위원회로 변경되었다. ‘정원대보름제’가 ‘죽서문화제’로 개칭되었다가 다시 정월대보름축제로 명명하여 행해진다.
시의 중서부에 위치한 읍. 면적 164.71㎢, 행정구역은 1읍 27개 행정리(17개 법정리), 240개 반이다. 인구 1만 2870명(2015년 현재)이다. 읍 소재지는 도계리이다.
본래 1631년(인조 9) 소달리면(所達里面)이라 부르다가 줄여서 소달면이 되었고, 1963년 소달면이 도계읍으로 승격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1989년 신기출장소를 면으로 승격시켜 이 읍에서 분리되었다.
태백산맥 동사면의 평균높이 300m 이상의 고산지대로, 산지지형이 험준하고 오십천의 상류유역을 차지하고 있으나 평지는 거의 없다. 읍내에는 육백산 등 1,000m 이상의 높은 산이 여러 개 있다. 내륙 산간지대이므로 한서의 차가 크고 여름철에도 냉량하다.
관내 식생은 침엽수가 가장 많고, 혼효림, 활엽수림 순으로 되어 있다. 주민의 3분의 2이상이 도계리를 중심으로 하는 흥전리와 전두리에 모여 살고, 산악지대에는 인구가 희박하다. 경지면적은 극히 적으나 밭이 대부분이다.
주요 농산물은 콩 · 옥수수 · 보리 등이고, 버섯 등이 생산되며, 한우사육이 성하다.
전국적으로 유명한 탄광읍으로 무연탄 생산이 중심이나 정부의 석탄산업 합리화정책의 시행으로 민영탄좌는 폐광이 되었다. 그 밖에 소규모의 석회석광산이 있다. 농공단지가 개발되어 있다.
교통은 38번 국도가 외십천 하곡을 따라 발달되어 있고, 427번 지방도 및 2번, 4번 및 6번 시 · 군도가 지나고 있으며, 전철화된 영동선 철도가 있어 많이 개선되었다. 심포리와 태백시의 통리 사이에 급경사의 지형을 극복하기 위해 인클라인(incline) 시설이 있었으나 황지선의 터널이 완공됨으로써 1963년 철거하였다.
그러나 지형적인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해 도계 · 나한정 · 흥전 사이에 Z자(字)모양의 스위치백(switch back) 시설이 있었다. 스위치백 구간 또한 2012년 개통된 루프형 터널인 솔안터널로 대체되었다.
문화유적은 도계리에 긴잎느티나무, 신리에 너와집 및 민속유물, 한내리에 저승굴, 눌구리에 은행나무 등이 있다.
도계(道溪) · 발리(發里) · 차구(次口) · 무시(武市) · 고사(古士) · 산기(山基) · 눌구(訥口) · 점(店) · 신(新) · 마교(馬橋) · 전두(田頭) · 흥전(興田) · 상덕(上德) · 황조(黃鳥) · 심포(深浦) · 구사(九士) · 한내(汗乃) 등 17개 법정리가 있다.
시의 남동부 동해안에 위치한 읍. 면적 175.99㎢, 행정구역은 1읍 30개 행정리, 147개 반, 1개 출장소로 나뉘어져 있다. 인구 5,985명(2015년 현재)이다. 읍 소재지는 호산리이다.
1629년(인조 7) 현재의 근덕면과 원덕읍 합쳐 덕번면(德藩面)이라 불려오다가 1662년(현종 3)에 다시 근덕면과 원덕면을 분리시켰다.
1943년 매원리와 초곡리를 근덕면에 이속시켰고, 1980년 읍으로 승격되었다. 1986년 오저출장소를 가곡면으로 승격시켜 이 읍에서 분리되었으며, 1987년 용화 · 장호리를 근덕면으로 이속시켰다. 1995년 축전리가 산양리로 개칭되었다.
원덕읍은 경상북도 울진군과 접경 지역으로 강원도 최남단에 위치하며, 강원도청으로 부터 276㎞의 원거리에 위치한다. 산촌, 농촌, 어촌, 및 소도읍이 함께 있다. 5개의 해수욕장과 1개의 마을관리 하천유원지가 있고, 임원회센타, 신남 해신당공원 및 어촌민속전시관 등이 있다. 또한, 19km에 달하는 긴 해안선의 절경과 감성돔 바다낚시터는 많은 낚시관광객을 찾는 곳이다. 원덕읍은 다른 지역과 달리 보리, 마늘을 재배한 후 벼를 재배하는 도내 최대의 이모작 농경지역이다. 특히, 원덕왕마늘은 6쪽으로 육질이 단단하고 맛이 좋아 많은 사람들이 선호하고 있으며, 산송이도 유명하다.
강원도와 경상북도 경계선 부근에서 발원하는 가곡천과 북서부 산지에서 시작한 호산천 및 임원천이 동류해 동해로 흘러 들어간다. 각 하천의 하류지방에 약간의 평지가 있을 뿐 대부분이 산악지대이다.
해안지방은 한서의 차이가 잘고 겨울철이 비교적 온난하나, 내륙 산간지대는 한서의 차이가 크고 여름철이 냉량하다. 관내의 식생은 침엽수가 가장 많고 활엽수 · 혼호림 순으로 되어 있다. 대부분 산간지역으로 논보다 밭이 훨씬 많다.
교통은 7번 국도가 고속화도로로서 해안을 따라 남북으로 달리고, 416번 지방도가 가곡∼도계지역과, 2번 시 · 군도가 옥원∼도계, 5번이 사곡∼근덕의 용화까지 연결되는 등 해안지방과 내륙지방을 원활히 연결하고 있다.
문화유적은 옥원리에 김낙륜가옥 · 성지, 산양리에 산양서원, 노곡리에 소공대비 등이 있다. 이 밖에 산봉수지(柯谷山烽燧址), 임봉수지(臨院山烽燧址)와 해안에는 임원해수욕장 · 호산해수욕장 · 월천해수욕장 등이 있다.
호산(湖山) · 노곡(魯谷) · 이천(理川) · 옥원(沃原) · 노경(魯耕) · 월천(月川) · 사곡(沙谷) · 산양(山陽) · 기곡(杞谷) · 임원(臨院) · 갈남(葛南) 등 11개 법정리가 있다.
시의 남부에 위치한 면. 면적 152.41㎢, 행정구역 1면 6개 행정리(5개 법정리) 30개 반이다. 인구 752명(2015년 현재)이다. 면 소재지는 오저리이다.
원덕읍 오저출장소로 있다가 1986년 행정구역개편으로 원덕읍에서 분리되어 독립, 가곡면으로 승격되었다. 2001년 9월 3일 풍곡1,2리를 통합하여 풍곡리로 변경하였다.
면의 남부에는 중봉산이 있고, 덕품(德品), 동활계곡(東活溪谷) 등의 산자수려한 기암절벽의 계곡이 있다. 대부분이 산지이고 가곡천 유역에도 평지는 적다. 주민의 90% 이상이 농업에 종사하며, 농경지는 논보다 밭이 훨씬 많아 밭농사 위주의 농업을 행한다.
주요 농산물은 고추 · 보리 · 콩 · 감자 · 옥수수 · 약초는 당귀 등이고, 특히 고추 · 마늘 등은 이 고장의 장려작물이다. 이 밖에 토종꿀 및 산나물 등이 많이 산출된다. 광산자원은 풍곡리에 연 · 아연광이 있다. 가곡자연휴양림이 조성되어 있다.
교통은 가곡천을 따라 416번 지방도가 있어 도계와 원덕 방면과 연결되고 7번 시 · 군도 1개 노선이 있다.
문화유적은 오저리에 성지(城址)가 있다.
오저(梧低) · 탕곡(湯谷) · 오목(梧木) · 동활(東活) · 풍곡(豊谷) 등 5개 법정리가 있다.
시의 중동부에 위치한 면. 면적 133.43㎢, 행정구역은 1개 면 38개 행정리(14 법정리) 140개 반이다. 인구 5,818명(2015년 현재)이다. 면 소재지는 교가리이다.
본래 고구려의 해리현(海利縣)인데, 1629년(인조 7) 근덕면과 원덕읍지역을 합해 덕번면(德蕃面)이라 부르다가 1662년(현종 3) 다시 근덕과 원덕으로 나누어 근덕면은 맹방 · 덕산 · 교곡 · 종장 · 동막 · 적치 · 교가 등을 관할하였다. 1973년 노곡면 금계리가, 1987년 원덕읍의 용화, 장호리가 편입되었다.
면의 서쪽에 위치한 태백산맥이 동쪽으로 급경사를 이루어 구릉의 기복이 심하다. 사금산에서 발원한 마읍천이 노곡면을 지나 본면에 이르러 동막리 · 부남리 · 교가리 일대에 약간의 충적지를 형성하고 동해로 흘러든다. 해안선은 단조롭고 해식애와 해안단구, 사빈 등이 발달해 있다.
주요 농산물은 채소, 마늘 등이고, 감의 생산도 많다. 맹방리 · 궁촌리 등의 어촌을 중심으로 어업이 행해지고 있으나 대부분이 영세적이어서 연안어업이 중심이다. 근덕미역은 질이 좋기로 유명하고, 마읍천에서는 은어가 잡힌다. 초당저수지(草堂貯水地)에는 도립연어양식장이 있다. 동막리에는 동막지구농공단지가 있어 점차 활기를 찾고 있다.
교통은 7번 국도가 고속화되어 해안 가깝게 접근하면서 남북으로 연결되고, 427번 지방도가 도계쪽으로, 424번 지방도가 노곡∼미로∼하장쪽으로 이어지며 3 · 4 · 5 · 6번 시 · 군도가 각 방향으로 연결되어 비교적 편리하다.
문화유적은 궁촌리에 음나무 · 영은사대웅보전 · 영은사팔상전 · 영은사괘불 · 공양왕릉, 금계리에 초당굴, 하맹방리에 교수당, 교가리에 느티나무, 동막리에 신흥사와 대웅전 · 신흥사설선당 및 심검당 등이 있다. 이 밖에 양야산봉수지(陽野山烽燧址), 덕봉산봉수지(德峰山烽燧址) 등이 있다. 그리고 맹방 · 덕산 · 부남 · 궁촌 · 용화 · 장호해수욕장 등이 있으며, 장호 · 용화지구는 관광지로 지정된 곳이다.
고유 민속으로서 교가리에 느티나무를 대상으로 풍년과 무사를 기원하는 제가 있었으나 지금은 없어졌다. 맹방리에 삼척심씨(三陟沈氏)와 남양홍씨, 양성이씨의 동족마을이 있다.
교가(交柯) · 상맹방(上孟芳) · 하맹방(下孟芳) · 교곡(橋谷) · 덕산(德山) · 부남(府南) · 광태(光泰) · 동막(東幕) · 궁촌(宮村) · 매원(梅院) · 초곡(草谷) · 금계(金鷄) · 용화(龍化) · 장호(莊湖) 등 14개 법정리가 있다.
시의 중앙부에 위치한 면. 면적 144.70㎢, 행정구역 1개 면 16개 행정리(16개 법정리) 35개 반이다. 인구 793명(2015년 현재)이다. 면 소재지는 하월산리이다.
본래 삼척부의 계곡방(溪谷坊)이었으나 1662년(현종 3)에 노곡이라 개칭해 말읍(末邑) · 군천(軍川) · 오을산(五乙山) · 고자(古自) 등을 관할하였다. 1964년 설치되었던 마읍출장소가 1999년 10월 25일 마읍민원중계소가 변경 설치되었다.
면의 경계를 따라 응봉산(鷹峰山, 1,267m) · 사금산(四金山, 1,092m)이 있고, 면내에 두리봉(頭理峰, 1,072m) 등이 솟아 있는 험준한 산간지역이다. 남쪽에 동해로 흐르는 마읍천(麻邑川) 상류가 있으나, 산간내륙이므로 농경지가 협소하다. 여삼리는 석회암이 용식(溶蝕)되어 형성된 카르스트 오목지형 안에 발달된 마을이다.
거의가 밭농사를 하며, 주요 농산물은 감자 · 옥수수 · 콩 · 파 · 마늘 · 당귀 등의 밭작물을 주로 생산하며, 산지를 이용한 한우의 사육이 성하다. 특산물로는 여삼리에서 재배한 산삼인 장뇌를 심어 소득을 올리고 있다.
교통은 남쪽에 427번 지방도가 있어 도계∼근덕과 연결되고, 북쪽에는 424번 지방도가 있어 미로∼근덕과 연결되며, 2 · 4 · 6번 시 · 군도가 사방으로 이어져서 편리해지고 있다.
명승지로는 상반천리에 용소굴폭포가 있고, 고유 민속으로는 농경지 대부분이 밭으로 되어 가뭄이 심하므로 기우제가 매년 행해진다. 상천기리에 삼척김씨, 고자리에 영월정씨의 동족마을이 있다.
하월산(下月山) · 여삼(閭三) · 상천기(上川基) · 하반천(下班川) · 상반천(上班川) · 우발(宇發) · 고자(古自) · 개산(開山) · 상월산(上月山) · 하군천(下軍川) · 상군천(上軍川) · 둔달(屯達) · 중마읍(中麻邑) · 상마읍(上麻邑) · 주지(舟旨) 등 16개 법정리가 있다.
시의 북부에 위치한 면. 면적 99.43㎢, 1개 면 19개 행정리(14개 법정리) 61개 반으로 구성되어 있다.인구 2,047명(2015년 현재)이다. 면 소재지는 하거노리이다.
본래 삼척부 지역으로 미노리 또는 미누리라 했는데, 1662년(현종 3) 미로면으로 개칭했고, 1738(영조 14)에 미로면으로 개칭하고 조전(照田) · 고천(古川) · 동산(洞山) · 활지(活只) 등을 관할하였다. 그 뒤 여러 차례의 행정구역개편을 거쳐 오늘에 이르렀다.
서쪽으로는 태백산맥이 남북으로 달리고, 면의 경계상에 위치한 두타산이 동남쪽으로 경사를 이루어 대부분 산간지역이다. 그러나 오십천의 중류지역인 양곡 하안에 규모는 작으나 하안단구와 약간의 충적지가 형성되어 생활의 중심을 이룬다. 또한 쉰우굼(五十谷) 등지에는 석회암의 용식지형인 오목지형(돌리네)이 발달해 있다.
밭농사가 중심이며, 주요 농산물은 감자 · 옥수수 · 마늘 등이고, 특산물로는 약초 · 삼베 · 벌꿀 · 버섯류 · 회양목이 있으며 한지(韓紙)도 생산된다.
교통은 오십천 계곡을 따라 38번 국도가 있어 동해∼도계와 연결되고, 424번 지방도가 하장∼근덕과 1번 시 · 군도가 상정∼사둔을 이어 편리하다. 한편, 영도선 철도가 계곡을 따라 개설되고 면내에 미로, 상정역 등이 있다.
문화유적은 활기리에 활기굴 · 준경묘 · 영경묘, 고천리에 김영우가옥, 내미로리에 천은사의 이승휴유허지 등이 있다. 상거로리에 삼척심씨, 사돈리에 삼척김씨의 동족마을이 있다. 또 미로 8경이 있는데 다음과 같다.
미로 제1경 : 두타산 해발 1,353m 두타산은 태백산맥의 주봉을 이루고 있다. 청옥산은 암산, 두타산은 숫산으로 불리는데 마주보는 부부산으로서 빼어난 산세와 그 속에 잠재되어 있는 문화유적 및 희귀 동식물들이 비경으로 감추어져 있는 곳으로 해마다 많은 등산객들이 찾아오고 있다.
미로 제 2경 : 쉰움산두타산 중턱에 오십정에 있다. 천은사 뒷산 주봉 산마루에 있고 수 백명이 앉을 수 있는 반석이 있고 기암괴석이 솟았는데 그 반석 위에 원형의 크고 작은 우물이 50여 개가 있어(공룡 발자국이라는 속설도 있음) 가뭄에도 물이 줄지 않아 쉰움산이라 부른다. 근방에 신사가 있어 각지에서 찾아와 소원하는 곳으로 알려져 있다. 또한 내미로 주민 성씨별로 산 메기기 치성을 올리고 있다. 맞은 편 탑골에는 황소상, 미운 얼굴상, 좌변기 등 만물상이 있다.
미로 제 3경 : 구룡골 미로 삼거리에 있으며 대방골과 함께 두타산 동쪽의 3대 명소의 하나임. 깊숙하게 파인 세거리 협곡 안에는 크고 작은 용소폭포 등이 즐비하며 옥류동을 지나 구룡소 왼편 물골에 3형제 바위와 9마리 용이 승천했다는 9개의 폭포와 소는 그 풍경이 금강산 구룡연을 연상케 한다. 많은 폭포중 Y 자 형으로 낙수되는 제 3폭포가 미관을 자랑하며 폭포의 높이는 약 20m 에 달하고 구룡소의 깊이는 아직도 수심을 알 수 없다. 두타산 정상에서 구룡골로 흐르는 제일 높은 곳 1,20m 고지에서 떨어지는 흰 물줄기는 70m의 수직폭포로서 그 웅대 무비함은 이곳 예술 작품의 하나이다.
미로 제 4경 : 대방골 고천리에 있으며 입구에 두타사가 있고 주변에 돌탑과 공룡 발자국, 폭포 등으로 장관을 이루며 창조의 신비를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천하의 대승지요 절경이다. 넓은 반석이 도처에 펼쳐져 있으며 수많은 폭포를 비롯하여 선불동계곡, 신선암 그리고 이곳의 최대의 장엄광대한 넓적 바위와 기름암, 벽은동 계곡의 백은 폭포, 용소를 지나면 옛 선녀들의 놀이터인 12선녀탕이 있고 정상에 오르면 두타산이다.
미로 제 5경 : 준벽산과 적병산 하정리에 있는 준벽산은 깍아지른 듯한 절벽 아래 오십천이 흐르고 이곳은 외가리 등이 서식하는 곳으로 유명하며 준벽산 밑에 송어, 뱀장어 등이 서식하여 강태공들의 낚시터로 이용된다. 오십천 굽이 흐르는 물과 고천내가 합류하는 지점에 적병강 위로 깍은 듯한 절벽이 붉은 자루 모양으로 병풍처럼 우뚝 솟아 있어 적병산이라 한다.
미로 제 6경 : 연추골 하정리 연추골 입구에 연추사가 있고 상정리 동북쪽에 석회암층으로 형성된 4km의 험준하고 높은 협곡으로 하늘 높이 치솟은 절벽 밑에 연추동굴이 있다. 동굴 안에 여러 가지 음을 내는 물이 흘러 명산 유곡이라 하여 부정한 사람이 오면 해를 본다는 설이 있으며 옛날에 가뭄시 기우제를 지냈던 곳이다.
미로 제 7경 : 마룡 폭포 활기리 댓골 입구에 있는 폭포로 용마가 하늘로 등천하였다는 전설이 있으며 댓골은 하장면 댓재 정상에서 시작되는 저승골과 단물내기 골짜기 및 태백시 귀내미골 등 3개의 큰 계곡물이 합치되며 거리는 10㎞ 에 달한다. 골마다 크고 작은 폭포가 즐비하며 용마가 나왔다는 용소와 폭포, 수덕이 소 및 주변계곡 경관이 빼어난 곳으로 과거에 황장목, 반출로가 있어 삼림욕 장소로서 적합하다. 수덕이라는 총각 장사가 소에 빠져 죽자 용마가 나와 3일 동안 울다가 빠져 죽었다는 아기장수와 용마 유형의 설화가 전하여 온다.
미로 제 8경 : 큰골 두타산에서 동쪽으로 뻗어 내리는 무릉계곡대방골과 함께 3대 계곡의 하나로 두타산 산록에 발원하는 물은 500m 너럭바위를 굽이굽이 돌아 고천 마을 큰골 입구에 2단 폭포를 이루고 있으나 계곡 중간은 건천이 되어 홈이 된다. 이 지역은 희귀 동식물이 자생하며 두타산 밑자락까지 도로가 있어 두타산 까지 가장 근거리나 등산로로서는 제일 험준한 코스이다.
하거로(下巨老) · 무사(武士) · 사돈(士屯) · 상거로(上巨老) · 하정(下鼎) · 상정(上鼎) · 천기(川基) · 활기(活耆) · 하사전(下士田) · 상사전(上士田) · 동산(東山) · 삼거(三巨) · 고천(古川) · 내미로(內未老) 등 14개 법정리가 있다.
삼척시 소재지에서 19㎞ 서남부에 위치하며 동쪽은 육백산 산줄기가 북으로 달리면서 노곡면과 경계를 이루고, 서쪽은 두타산의 산줄기가 남으로 달리면서 하장면과 경계하고, 북은 미로면에, 남은 도계읍과 경계하고 있다. 면적 56.31㎢, 행정구역 1개 면 8개 행정리(8개 법정리), 22개 반으로 구성되어 있다. 인구 734명(2015년 현재)이다. 면 소재지는 신기리이다.
본래 삼척군 도계읍 지역으로 1970년 신기출장소가 설치되고, 1989년 이 출장소가 신기면으로 승격되었다.
태백산맥의 동쪽 밑에 위치한 내륙산간지대이고, 면의 동쪽은 오십천 상류에 해당되며, 하안에 소규모의 하안단구를 중심으로 농업에 종사한다.
주요 농산물은 보리 · 마늘 · 콩 · 고추 등이다. 주변의 도시지역에 공급하기 위한 고등소재의 재배도 성하다. 특산물로는 장뇌 · 송이버섯 · 약초 · 송어 등이 있으며, 특히 국내 최적지의 송어 양식장이 유명하다. 한편, 양질의 석회암 등 풍부한 지하자원이 매장되고 있어 앞으로의 개발이 기대된다.
교통은 오십천 하곡을 따라 38번 국도가 있어 동해∼태백과 연결되고 8번 시 · 군도가 신기∼대이를 이어준다. 영동선 철도가 계곡을 따라 개설되고 면내에 신기, 마차리역 등이 있어 편리하다.
도로는 1987년에 개통한 38호 국도가 면 중심을 통과하고 있으며 또한 1937년 동해시에서 태백시를 통하는 영동선의 철도가 본면의 중심부를 통과(신기역)하고 있어 교통이 편리하다.
문화유적은 일괄 1989년 중요민속문화재로 지정된 너와집, 통방아, 굴피집이 있으며, 명승고적은 1966년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삼척 대이리 동굴지대는 국내 최대 규모의 석회동굴로서 수직 및 평면굴로 되어 있다. 특히, 굴입구의 넓이가 10여 가구의 건물이 들어설 수 있고, 높이는 14.5m나 되며 굴속에 폭포가 있고 내가 있는 동굴이다.
신기(新基) · 서하(西下) · 고무릉(古武陵) · 대이(大耳) · 대기(大基) · 안의(安衣) · 대평(大坪) · 마차(馬次) 등 8개 법정리가 있다.
시의 서북부에 위치한 면. 면적 205.72㎢, 행정구역 1개 면 16개 행정리(16개 법정리), 53개 반으로 편제되어 있다. 인구 1,391명(2015년 현재)이다. 면 소재지는 광동리이다.
본래 장생면(長生面) 또는 장성면(長省面)이라 했는데 1738년(영조 14)에 금대산(金臺山)의 동쪽을 경계선으로 하여 남쪽을 상장성면(上長省面), 북쪽을 하장성면으로 나누었으며, 하장성면은 아곡천(牙谷川) · 조탄(助呑) · 사미(士美) · 원동(院洞) · 아곡(牙谷) · 갈전(葛田) 등을 관할하다가 1801년(순조 1) 하장면으로 개칭하였다.
1973년 가목(柯木), 도전리가 정선군으로 이속되고, 1994년 원동 · 상사미 · 하사미 · 조탄 등 4개 이가 태백시로 이속되었다. 1999년 10월 25일 역둔출장소가 폐지되었다.
태백산맥의 청옥산(1,404m) · 두타산 · 중봉산 · 대덕산(大德山, 1,307m) · 덕항산(德項山, 1,071m) 등이 둘러싸고 있는 평균높이 600m 이상의 산악지대로서 영동과 영서의 분수령을 이룬다. 고원성(高原性) 산악지역이고, 남한강의 상류인 하장천(下長川)이 면의 중앙부를 지나 북서쪽으로 흐른다. 이와 같은 지형적 이유 때문에 경지율이 낮고 기후가 한랭하다.
경지면적의 96%가 밭이어서 주요 농산물은 감자 · 옥수수 등이고, 최근 교통의 발달로 고랭지채소를 재배해 높은 소득을 올린다. 갈전리를 중심한 지역은 대마(大麻)의 생산이 많고, 특산물로는 당귀 · 황기 등의 약초와 산채 등이 있으며, 양봉도 성하다. 임상이 잘 발달해 임목 축적령도 시내 제일이며, 목재의 생산이 많다.
교통은 35번 국도가 하장천 계곡을 따라 남북으로 달려 강릉∼태백과 연결되고, 424번 지방도가 정선군의 덕우∼미로와 완전 포장도로로써 연결되는 등 편리해져 이 지역에서 생산된 산물의 수송에 크게 이바지하고 있다.
문화유적은 숙암리에 고분군, 광동리에 광동굴, 역둔리철비 등이 있다. 갈전리에 영양남씨, 어리에 안동권씨, 조탄리에 영월신씨의 동족마을이 있다. 매년 가을 하장고랭지배추축제가 펼쳐진다.
광동(廣洞) · 중봉(中峰) · 번천(番川) · 숙암(宿巖) · 장전(長田) · 추동(楸洞) · 갈전(葛田) · 토산(兎山) · 역둔(易屯) · 둔전(屯田) · 대전(大田) · 어(於) · 판문(板門) · 한소(汗沼) · 용연(龍淵) · 공전(公田)등 16개 법정리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