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업 ()

장승포시장
장승포시장
산업
개념
상품을 사고 팔아 생산자와 소비자 사이에서 재화를 전환시키며 이익을 얻는 경제활동.
• 본 항목의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통해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내용 요약

상업은 상품을 사고 팔아 생산자와 소비자 사이에서 재화를 전환시키며 이익을 얻는 경제활동이다. 인류가 정착생활을 시작하면서 생긴 수공업 생산품과 농업잉여 생산품을 교환하기 위해 상업이 시작되었다. 고대국가 시대 이후에는 국가간 공적·사적 무역도 발전했다. 처음에는 행상의 형태였다가 5일장과 같은 장시, 시전과 같은 상설 점포들이 생기고 인구가 도시로 집중하면서 상업도시가 발전했다. 더불어 상업세 징수, 숙박소·객주 같은 상업 관련 기관들이 형성되었다. 오늘날은 국제무역과 전자상거래까지 형식 면에서 많은 변화와 다양화가 이루어졌다.

정의
상품을 사고 팔아 생산자와 소비자 사이에서 재화를 전환시키며 이익을 얻는 경제활동.
개설

개념

경제상의 여러 현상에 대해서 상업이라는 말이 사용되나, 그 개념은 고정 불변한 것이 아니고 경제발전단계에 조응하여 변화, 발전하여 온 사회적 · 역사적 산물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오늘에 이르기까지 그 개념에 대한 완전한 정립은 명확하지 않다.

즉, 18세기 중엽까지는 농촌과 도시의 재화유통이 주로 당사자간의 직접교환에 의하여 이루어졌으므로 교환을 상업이라고 하는 화물교환설(貨物交換說)이 나타났고, 18세기 후반에서 19세기 초두까지는 상인의 업무가 전문화하려는 단계였으므로 재판매구입설(再販賣購入說)이 대두되었다.

19세기 후반 산업혁명 이래 모든 산업은 이윤추구를 목표로 하였으므로 영리매매업설(營利賣買業說)이 출현하였으며, 20세기 초두 독점자본주의단계에 돌입하자 자본주의의 제반 모순이 격화되고, 종래의 영리주의에 대한 반성이 요청되면서 자본주의 수정론과 아울러 국민 경제적 기능설이 등장하게 되었다.

제1차세계대전 이래 1929년의 세계경제공황을 계기로 유통과정의 합리화가 고조되면서, 상품의 사회적 유통 또는 상품을 사회적으로 유통시키는 노동을 상업이라고 하는 배급조직체설이 나타났다.

그러나 이러한 다양한 주장 모두가 교환 내지 상품유통과의 관련에서 상업을 규정하려 한다는 점에서는 공통적이며, 따라서 상업은 교환 또는 상품유통의 특정형태를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종류

현대의 상업은 단계별 · 부문별 · 기능별로 분화되어 있다. 단계별로는 도매상업과 소매상업으로 나누어진다. 소매상업이란 개인적인 최종소비자에게 상품을 판매하는 상업이며, 그 외는 모두 도매상업으로서 이는 수집 · 중계 · 분산의 여러 단계로 다시 세분화된다.

부문별로는 지역에 의한 전문화와 상품종류에 의한 전문화, 그리고 수요목적에 의한 전문화 등으로 구분된다. 지역에 의한 분류로는 국내상업과 국제상업(무역)이 있다.

수요목적을 기준으로 할 경우, 시간과 공간에 의해서 규정지을 수 있는 수요를 충족시키기 위하여 수급의 적합을 도모하는 수요상업과 시장의 기세에 의해서 발생하는 위험을 영업의 목적으로 하는 투기상업으로 나누어진다. 후자는 기후 또는 사회경제상의 변천 등 불안정한 요소가 많은 거래대상에 한해서만 발생하는 것이다.

기능별 분화란 상인의 활동 중 어느 부분이 특수한 형태로 행하여지는 것을 말한다. 가령 상품의 취득이 없는 수수료상업, 금융의 활동을 특수한 형태로 행하는 월부판매상, 운송 · 보관의 활동을 행하지 않는 직송도매상 등은 모두 기능별 분화의 결과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재화의 매매 외 금융 · 보험 등 수급을 매개하는 부문이 있고 비영리적 경영인협동조합도 있다.

이와 같이, 분화된 각종의 상업이 각자 활동하면서 형성하는 하나의 전체가 상업조직이며, 이 상업조직을 통해서 사회적인 상품유통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원시사회의 상업

우리 나라의 지리적 조건은 대개 원시삼림지대였으므로 산간 · 계곡 · 해변 등지에 산재하여 수렵생활을 주로 해왔다. 어로생활에 있어서는 담수의 어패류 채취로부터 신석기시대에 와서는 개량된 석도구(石道具)에 의한 어획의 기술도 점점 진보하였을 것이다. 요컨대, 신석기시대의 지배적 생산부분은 수렵과 어획이었을 것이다.

석도구의 제작기술의 발달과 골각기 및 도기(陶器)의 제조, 직포(織布)의 기술도 점차로 시작되었을 것이다. 그들이 남긴 유물과 유적을 조사함으로써 그와 같은 흔적을 확인할 수 있다. 특히, 패총의 출토품에서 잘 알 수 있는데, 김해패총은 가장 풍부한 출토품을 내고 있다.

그들의 생활상태는 수렵 · 채취생활 당시는 방랑생활이었으나, 차차 일정한 지대에서 농경생활을 영위함에 따라 정주생활(定住生活)의 형태를 이루어 촌락이 이곳 저곳에 생겨나게 되었다.

평지에는 움집 · 귀틀집을 지어 살며 농업생산을 하게 되었으니, 오곡(五穀)의 생산방법과 기술도 발전되었다. 특히, 김해패총에서 출토된 탄화미(炭化米)는 원시농업발전사에 있어 중요한 표지가 된다.

이처럼 각종 곡류의 재배와 소 · 말의 가축사육, 각종 직물원료생산 등이 이루어졌던 사실로 미루어 원시부족사회에 있어 각 부족공동체 내에 거래인 상업이 존재하였음을 알 수 있다.

부여의 상업

한민족 최초의 근간적 요소가 예맥족이었으며 그 분포행렬을 지역적으로 분별하면, 이른바 남방행렬(南方行列, 조선[낙랑] · 진번[대방] · 진[삼한])과 북방행렬(北方行列, 부여 · 고구려[玄兎] · 옥저 · 동예[전의 臨屯])의 둘로 나눌 수 있다. 북방(후방)행렬의 부족사회는 그 칭호상으로나 전설상으로 보아 부여 계통의 부족이 역사적으로 분열, 발전하여 점차 광대한 지역에로 분포된 것이었다.

그들은 일찍부터 외래 금속문화를 섭취함으로써 경제적인 성장을 이룰 수 있었다. 흉노족의 청동기 및 목축문화는 기원전 3세기경 이미 부여에 전파되었고, 한족(漢族)의 철기 및 농경문화도 거의 같은 시기에 유입되었다.

다만 농경문화는 이곳에서 그다지 발전하지 못하였는데, 그것은 제반 기후의 차이 때문이었을 것이다. 대신 목축업이 그들의 생산에서 주요한 지위를 차지하게 되었다.

부여족이 금속문화를 섭취함에 따라 부여 내부에서는 부(富)의 축적과 계층분화가 촉진되었으나, 외부로 향하는 강력한 부족동맹체의 결합력을 불러오지는 못하였다. 하지만 수공업이나 농업 · 목축업에 의하여 축적된 잉여생산물의 증가에 따라 부여의 부의 발전은 필연적으로 교환관계의 발전을 촉진시켰다.

더구나, 부여는 침략을 일삼는 호전적인 부족이 아니라, 경제적으로 양호한 조건하에 평화를 사랑하는 부족이었기 때문에 시초부터 중국민족과의 대외무역이 행해졌다. 뿐만 아니라 같은 발전 정도를 이루고 있던 고구려 및 선비족(鮮卑族)과의 빈번한 접촉과 한족과의 교통관계를 통해 상업의 진흥을 이룩하였다.

예컨대, ≪후한서 後漢書≫ 부여조에 의하면 이미 419년 부여에서 공물(貢物)을 중국에 바치고 중국에서도 이에 답함으로써 매년 통상을 계속하게 되었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120년 부여에서 위구태(尉仇台)를 한나라에 보내어 예물을 헌납하게 하였는데, 후한왕(後漢王)은 그에 답해 많은 물품을 교환하였다고 한다.

여기서 보이는 ‘봉공(奉貢)’ · ‘헌(貢獻)’ 등은 단순히 피종속자가 종속자에게 바치는 의무적 예물이 아니라, 고대 국제간의 공적 무역을 의미한다.

부여와 중국과의 무역이 가장 성했던 때는 후한 광무제(光武帝) 때였는데, 이때 양국간의 공적 무역은 당시의 어느 사회보다도 성행하였던 것이니, 이러한 사실은 ≪진서 晉書≫ 부여전에 잘 나타나 있다.

고구려의 상업

고구려의 신분제는 대체로 두 계급으로 나누어진다. 상층계급은 토지 및 노예를 사유하였으며, 불로좌식(不勞坐食)하였다. 그러나 하층계급인 하호(下戶)는 직접 생산노동에 종사하여 상호(上戶)에 대한 물품공급을 부담하였다.

원거리로부터 식량 · 어염(魚鹽) 등의 생활필수품을 운반했다는 사실은 단순히 신분관계에서 예속된 의무적 부담만이 아니라, 고대인의 직업적 신분의 특수형태라고도 생각된다.

비단, 고대뿐만 아니라 우리 나라 중세사회의 직업적 신분을 보더라도 주로 서민층 이하에서 농업과 상업에 종사하였음이 사실이다. 이와 같은 것은 일종의 상행위(商行爲)로서, 동시에 행상으로서 고대의 상업형태를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한편, 당시 고구려는 북방의 부여와 인접해 있었고, 한군현(漢郡縣)과도 교섭이 잦았다. 즉, 32년(대무신왕 15) 고구려와 후한 사이에 국제무역이 행해졌으며, 이는 약 70여년 간 계속되었다.

당시 화폐의 유통에 관해서는 뚜렷이 나타나지 않으나, 화폐는 상품의 교환을 전제로 하는 만큼 고구려의 상업으로 미루어 볼 때 화폐가 상당히 유통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그 화폐의 형태 · 종류에 관해서는 알 수 없다.

고구려의 장례 때 ‘금은재폐 진어후장(金銀財幣盡於厚葬)’한 습속이라든지, 혼인습속으로 ‘방돈전백(傍頓錢帛)’한 사실로 미루어 상층계급에서는 금은재폐를 많이 보유하였던 것을 알 수 있다.

옥저와 동예의 상업

동옥저의 상업

동옥저는 ≪후한서≫ 동옥저전의 기록에서 보이는 바와 같이, 지금의 함경남북도 지방에 걸쳐 있었다. 동쪽으로는 동해에 접하고, 북으로 읍루(挹婁) · 부여, 남으로는 예맥과 접하고 있어, 그 지형은 동서가 좁고 남북이 길다. 그 호수(戶數)는 총 5,000호에 이르며, 본래 고구려와 같은 계통의 예맥족으로, 언어와 음식 · 거처 · 의복 등 풍속은 고구려와 유사하였다.

이 나라는 토지가 비옥하기 때문에 농업이 발달하고, 동해에 접하고 있기 때문에 어업이 주된 생산 부문이었다. 그리고 이들은 고구려 태조왕 때 고구려에 신속(臣屬)되어 그 지배를 받게 된 후부터는 고구려의 수요량까지 부담하게 되었다.

어업에 필요한 조선(造船) 및 제망(製網), 식염(食鹽)의 제조, 기타 생산력의 발전에 따라 화폐의 유통단계에 도달했던 것이니, 이들의 혼인습속에 화폐를 사용하였음을 볼 수 있다. 그러나 당시의 화폐유통은 비단 혼인에만 한한 것이 아니라, 상품유통에 있어서도 사용하였으리라 생각된다.

동예의 상업

동예의 지리적 위치는 남으로는 진한, 북으로는 고구려 · 옥저와 접하고, 동으로는 대해(大海)에 접해 있는, 고조선의 동쪽 대부분의 지역을 차지하는 나라로, 그 중심지는 대개 지금의 안변 · 덕원 부근으로, 그 영역은 북으로는 함경남도에서 남으로는 강원도 북부에 걸쳤으며, 그 호수는 2만이나 되었다고 한다.

≪삼국지≫ 예전(濊傳)에 의하면, 이들은 농경생활에서 마포(麻布)와 면포(綿布)를 직조하였고, 또한 명주를 짰음을 알 수 있다. 동예의 특산품이 유명한 단궁(檀弓)과 반어피(班魚皮, 海豹皮) · 문표(文豹) · 과하마(果下馬) 등이었음을 볼 때, 목축과 어로 · 수렵 · 수공업생산력의 정도를 짐작할 수 있으며, 그것들은 대개 중국에 대한 무역품이었다. 그러나 동예는 끊임없는 외세의 침략으로 말미암아 늘 세금부담과 부역에 시달려야만 했다.

삼한의 상업

삼한은 그 지리적 조건이 평탄하고 기후가 온화한 농업지대를 점거하고 있는 데다가, 외래종족으로부터 유입되는 금속문화를 농구의 개량에 이용하여 농업생산력을 높였다.

이들은 왜(倭)와도 교역하고 한사군을 통하여 한(漢)의 문화를 섭취하였는데, 한의 문화는 이들의 수공업발달을 자극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수공업을 토대로 상업의 발달도 점차 증진되었다.

특히 국제간의 무역과정에서 교환방법으로 화폐가 통용되었다. 금석병용기의 유적에서 발견된 왕망화천(王莽貨泉) · 명도전(明刀錢) 등은 대륙과의 국제무역에서 화폐가 유통되었던 사실을 말해 주는 것이며, 이전에 김해패총에서 발견된 자안패(子安貝) 또한 고대교역의 흔적을 증명해 준다.

삼한 가운데 특히 변진은 철이 생산됨으로써 멀리 한(韓) · 예(濊) · 왜(倭) 등과 이를 무역거래하였다. 각종 물품의 시매(市買)에는 철을 화폐로 삼았다는 사실로 보아, 변진의 철은 종전의 장식화폐(裝飾貨幣)로서가 아니라 실용화폐로서의 가치를 가지고 있었던 듯하다.

이 철화(鐵貨)의 모양은 자세히 알 수 없으나 정세(精細)한 주화는 아니더라도 아마 편평한 철편이나 또는 괴상(塊狀) · 봉상(棒狀)의 철편이었을 것이다. 어쨌든 교역에 철화폐가 사용되었던 사실에서 당시 교환경제가 왕성했음을 충분히 알 수 있다.

≪삼국지≫ 한전(韓傳)에 의하면, 지금의 제주도 주민이 마한 연해에까지 상품교역을 위하여 승선내왕(乘船來往)했던 것을 볼 수 있다. 변한에서 생산되던 철의 교역을 위해 육로로는 멀리 한 · 예 등의 부족국가가 내왕하였으며, 해로로는 중국 · 왜국 · 주호국(州胡國:제주도) 등의 상선(商船)이 찾아왔다. 이로 인해 육 · 해로교통이 모두 왕성하였다.

고대국가사회의 상업

고구려의 상업

고구려의 국내외 상품교역은 일찍부터 발달하여, 국내에서는 계속성 없는 행상(行商)에 의한 물품교역이, 국제간에는 공적 무역과 사적 무역의 형태로 행해졌다.

공적 무역은 조정과 조정간에 행해진 예물의 증답(贈答)이며, 사적 무역은 상인간에 행해진 교역을 말한다. 예로부터 중국의 역대 황제에게 행해진 이른바 조공은 공적 무역의 한 형태였다.

고구려와 중국과의 조공무역을 살펴보면, 31년(대무신왕 14) 12월 한나라 광무제에게 사신을 보내어 조공품을 교환한 데서부터 비롯하여 날로 성해지며, 19대 광개토왕의 영토확장에 따라 국내외의 무역활동은 더욱 융성해졌다.

장수왕 때인 431년(장수왕 19) 국도(國都)를 지금의 압록강 유역인 통구(通溝:國內城 · 丸都城)로부터 대동강 유역인 평양으로 옮겨 경제적으로 한층 더 풍부한 조건을 갖추게 됨으로써, 외국통상의 물품수량도 증가되었다.

그리하여 고구려는 가까이는 백제 · 신라를 비롯하여 왜 및 중국의 진(晉) · 연(燕) · 위(魏) · 송(宋) · 남제(南齊) · 양(梁) 등을 거쳐 수(隋) · 당(唐)에 이르기까지 정규적인 조공무역을 행하였음은 물론, 행상을 통한 사적 무역도 행하였으리라고 생각된다.

고구려의 역대 중국과의 중요한 수출품을 열거하면, 말 · 초피(貂皮) · 할계피(鶡鷄皮) · 황금 · 백은(白銀) · 각궁(角弓) · 단궁(檀弓) · 천리마(千里馬) · 생웅피(生熊皮) · 장니(障泥) 등이며, 수입품으로는 의관(衣冠) · 복물(服物) · 거기지식(車旗之飾) · 검패단(劒佩緞) · 수우(水牛) · 능언마(能言馬) 등이었다. 또한, 일본과의 무역품 중 수출품으로는 철순(鐵盾) · 철적(鐵的) · 황금 등의 공상물(貢上物)을 들 수 있다.

고구려를 포함한 삼국시대의 국제 교역로는 대개 육로보다 해상교통로가 더욱 발달하였다. 이는 당시 육상교통보다는 수로교통이 중요시되었기 때문이다.

더욱이, 우리 나라는 지리적으로 산악지대가 많고 3면이 바다에 임한 반도일 뿐만 아니라, 바다 건너에는 중국과 일본이 자리하고 있었기 때문에 특히 국제교역에 해로를 많이 이용하였던 것이다.

특히, 중국의 육조시대(六朝時代)에 무역이 왕성하였는데, 대부분 해상도(海上道)를 이용하였다. 육조시대 남조(南朝)와의 통상에는 3국이 모두 해로를 통해 교역을 하였으며, 진대(晉代)부터는 중국에서 고구려 · 백제에 올 경우 의레 양쯔강(揚子江)을 빠져 내려와 등주대양(登州大洋)을 건너는 해상로를 이용했다.

고구려에 이르렀던 양국의 사신 또한 때에 따라서는 해중(海中)에서 서로 수여(授與), 교역함으로써 원거리노정(遠距離路程)을 단축한 사실도 있었다.

육로교통을 통한 교역 또한 초기에 더러 행해졌음을 볼 수 있다. 그것은 육조 중 북조(北朝)와 접하고 있던 관계로 육로를 통하여 통빙(通聘)하였다고 하며, 그 밖에도 전진(前晉) 또는 연(燕)과도 육로통상을 하였다. 한편, 고구려와는 달리 남쪽의 백제와 신라는 지리상의 이유로 모두 해로를 이용하였음은 어찌할 수 없는 현실이었다.

백제의 상업

재화유통의 가장 오래된 형태를 부족간의 물품교역이라 하면, 이들간에는 필연적으로 어떤 형태의 상행위가 이루어질 것이다.

그 이유는 자급자족의 영역을 넘어 잉여제품을 제공하는 대가로 다른 부족으로부터 귀한 물품을 획득하고자 하는 경향이 자연적으로 생기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 고대사회에도 장시(場市)가 생기기 이전에 이미 행상이 행해졌으리라고 추정하는 것이다.

행상이 장시와 더불어 재화의 유통에서 중요한 지위를 차지했음은 추측하기 어렵지 않다. 행상은 광범위한 지역에 걸쳐 행해졌으며 그 규모도 자못 컸으리라고 추측된다. 이들 행상은 대개 부족과 부족의 경계, 중립지대나 경계선, 하천변 등지에서 서로 집산하였을 것이다.

물화교역(物貨交易)이 점차 확대되면 그 교환 횟수도 증가되며, 따라서 부족간의 전통적인 장벽도 물품교역으로 인하여 무너지게 되어, 비교적 자유로운 교환관계가 형성되게끔 되는 것이다.

2세기경 마한의 사회상으로 보아 그때부터 이미 촌락과 촌락 사이에, 또는 교통이 편리한 곳, 또는 밀집촌락의 가로(街路), 또는 촌락주민의 공동제사를 거행하는 부근 등에는 자연히 시장(市場)이 설 수 있었을 것이다.

≪삼국지≫에는 주호국의 사람이 배를 타고 자주 중한(中韓:마한의 땅)에 내왕하며 물품교역을 하였다고 전하는데, 당시의 마한 시장의 양상을 엿볼 수 있는 예이다.

또한, 정복국가로서의 백제가 성립된 이래 많은 노예노동력의 사역으로 인한 잉여생산물은 국제교역의 범위를 더욱 확대시켰던 것이다. 그리하여 관부(官府) 소재지에는 상당한 규모의 시장이 서게 마련이었을 것이다.

가령, 그것을 성읍시(城邑市)라 한다면 백제멸망기에 전국의 군현이 37개, 성(城)이 200개였으니, 백제의 시장수효도 이로 미루어 추정할 수 있을 것이다. 국도인 고마성(固麻城)에는 관설시장(官設市場)이 있었는데 도시부(都市部)란 시사(市司)로 하여금 관장하게 하였다.

백제는 중국의 남조 및 일본 등과 국제적 조공무역도 적지않게 하였는바, 중국에 대한 수출품은 주로 금포(錦布) · 해물(海物) · 과하마 · 명광개(明光鎧) 등의 공물이며, 중국으로부터는 불전(佛典) · 금포(錦袍) · 채백(彩帛) 등을 수입하였다.

또한, 일본으로는 박사(博士) · 불사(佛師) · 직공(織工) · 단공(鍛工) · 봉녀(縫女) 등의 인적 자원이 흘러들어갔다. 또한, 일본에 채견(綵絹) · 각궁(角弓) · 전(箭) · 철정(鐵鋌) · 불상 · 불전 · 복서(卜書) · 역본(曆本) · 약물(藥物) 등을 수출하였고, 양마(良馬) · 견사(絹糸) · 포 등을 수입하였다.

백제에서는 산맥의 배산(背山)과 서해의 넓은 해안선에 면하고 있던 지리적 조건으로, 그리고 중국과 일본에 해로를 거쳐 내왕해야 하는 현실적 요인으로, 수로의 개척이 성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해동역사≫에 의하면, 중국과 백제와의 교역은 진(晉)나라 때로부터 육조를 거쳐 남북조 때까지 해로를 이용하였다고 한다. 해상교통의 왕성한 발달로 백제의 어민 기타 상민(商民)의 항해술도 발전하였음은 물론이거니와, 해항(海港)의 개설도 보았으리라고 생각된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498년(동성왕 20) 8월 왕은 탐라국의 조공미납(朝貢未納)을 구실로 무진주(武珍州)에까지 친정하였으나, 이를 알게 된 탐라가 항복하여 왔으므로 거병진격(擧兵進擊)을 중지하였다는바, 이 사실로 미루어볼 때, 당시 병선(兵船)의 보유와 항해술의 발달 및 전선(戰船)의 진보된 건조술을 추측할 수 있다.

신라의 상업

신라의 상업조직으로는 경시와 향시(鄕市)의 두 조직을 들 수 있다. 경시는 신라의 수도 경주에 설치된 도시적 교환조직인 시전(市廛)을 말한다.

고대국가로서 집권체제를 확립한 신라는 발전을 거듭하여 국내적으로는 고구려와 백제를 엿보게 되었고, 대외적으로는 수 · 당(隋唐) 및 일본과의 교역이 잦아짐에 따라 문화적 향상을 이룩하는 동시에, 경제생활이 날로 풍성해지면서 수도 경주의 인구는 점차 증가하였다.

신라의 수공업생산품과 농업잉여생산품들은 국내시장에서 교역됨으로써 상업의 발달을 촉진하며, 대 · 소도시의 시장 · 상점 · 행상 및 해상(海商)의 수를 늘게 하였다.

수도 경주는 행정적 중심지이며 인구의 집중 등으로 상업도시로서의 면모를 갖추게 되었으니, 490년(소지왕 12) 1월 시전을 설치하여 사방의 물자를 유무상통(有無相通)하게 하였던 것이다.

시전이라 함은 도시의 상업기관으로서 공랑상점(公廊商店)인 것이며, 항시 상설점포를 설치하여 구매자를 상대로 부단히 교환관계를 이루었다. 이들 좌상(坐商)들은 직접생산자인 경우도 있었으나, 대체로는 전업 상인이며 구매자는 소비자층이었다. 좀바르트(Sombart,W.)는 이런 교환관계를 도시적 교환이라 하였다.

490년 1월의 경시 개설 이래 19년이 경과한 509년(지증왕 10), 다시 수도에 동시(東市)를 설치하였고, 또한 동시전(東市典)을 두어 시전 및 장시의 감독을 맡아보게 하였다.

또, 그 뒤 695년(효소왕 4)에는 서시(西市) · 남시(南市)를 설치하였으며, 아울러 서남양시전(西南兩市典)을 두어 시장감독을 맡게 하였다. 신라시대의 이와 같은 경시는 그 뒤 고려나 조선시대도 계속 존속되었다.

919년(태조 2) 봄, 고려 태조 왕건은 송도(松都)에 도읍을 정하며 수도건립의 3대요건으로 “시전을 설치하고 궁궐을 창건하며 행정구역을 편제해야 한다(立市廛 創宮關 辨坊里).”고 하여, 상설시전을 세웠다.

그 후 조선시대에 들어 1399년(정종 1) 한양에 시전을 설치하기로 하고, 1410년(태종 10) 본격적인 시전설치에 주력하여, 상인을 유치하여 도시의 상업교역을 영위하게 하였다.

이와 같이, 고대나 중세의 집권국가에서 시전을 직접 건설하여 상인에게 대여하고 상행위를 하도록 한 것은 전제군주와 봉건귀족사회의 재정적 조처로서 취해진 것이라 할 것이다. 고대나 중세에는 그 재정조직이 현물경제를 중심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국가는 필요한 현물을 조세의 형태로 백성으로부터 수납하게 하고, 또 관영공장(官營工場)에서 제작한다. 왕실 및 각 관아의 소요품, 군대의 유지, 관료에 대한 봉급 등 일체는 조세수납과 관영공장 제조로 국가가 보유하고 있는 물품 중에서 현물로 지변(支辨)하는 것이다.

이러한 재정조직에서는 국가가 절대적으로나 혹은 시기적으로 다량의 잔여품을 가지게 된다. 이러한 재정적 잉여물은 교역적 방법으로 처분되게 마련이다.

중국 및 일본과의 교역에서 수입되는 물품도 왕실 · 귀족에게 분급되는데, 그 물품은 그들의 기호에 따라 상호교환이 필요하게 된다. 따라서, 그들은 시전을 통하여 매각 또는 구입할 수 있게 되어, 시전은 그들의 경제생활에 필수 불가결한 가치를 가지게 되었다.

경주의 시전은 일본 경도(京都)의 동시(東市) · 서시(西市)와 당나라의 정(町)과도 같은 성질을 가진 도시상업기관인 것이다.

신라사회 또한 다른 사회와 마찬가지로, 자급자족의 정도를 벗어난 잉여생산품을 다른 종족사회에 매각하고 그 대신에 그들에게 없는 물자를 획득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일찍부터 행상이 발생하여 물자판매의 전문업무를 맡았던 것이다.

우리 나라 부상(負商)의 연혁을 보면 그 창설연대는 상세하지 않다. 다만 고사(古史)에 조금 드러난 바에 의하면, 기자조선(箕子朝鮮) 때 이미 부상에 관한 기사가 있다고 하며, 신라 때는 부상을 동원하여 돌을 운반하고 다듬어 무너진 성을 보완하여 보축하였다고 한다. 행상인 부상을 동원하여 국가적 노무사역까지 시킬 정도라면, 그 수가 적지 않았음을 짐작할 수 있다.

신라의 행상 중에는 부녀자들이 있어 당시 외국인의 관심을 끌었던 사실을 볼 수 있다. ≪신당서 新唐書≫ 신라전에 부녀자들에 의한 상품교역 사실이 기술되어 있으며, ≪계림잡사 雞林雜事≫에는 부녀자들이 1일에 조석으로 열리는 저자에 유상(柳箱:항아리)을 휴대하고 와서 각기 물자를 매매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물가의 표준은 패미(粺米)로써 정하여 교역했다고 하므로, 패미가 화폐 구실을 하였으리라고 생각된다.

향시는 대개 교통의 교차점, 성읍의 내외 등 특정한 장소에서 일정한 날을 정하고, 수요자와 공급자가 모여 교역하였던 곳이다. 거기에 모이는 사람들은 주시(週市)나 연시(年市)를 막론하고, 물품교환을 통하여 자기욕망을 충족시키려는 자들이며, 그 대부분이 판매자인 동시에 구매자이다. 그러므로 각자가 희망하는 교환이 완료되면 더 이상 시장에 머무를 필요가 없게 되는 것이다.

신라의 무역은 당시 다른 나라와 마찬가지로, 국가와 국가간에 조공이나 예물증답(禮物贈答)의 형식으로 행해지던 공무역(公貿易)과 조공사신을 수행하는 수행원이 휴대품을 사사로이 매매하던 사무역(私貿易)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공적 무역이 성행하던 당시에도 사적 무역 또한 무시할 수 없을 정도로 성행하였음을 알 수 있다.

신라의 조공선(朝貢船)이 중국으로 가려면 남해안이나 서해안을 거쳐 중국 산둥반도(山東半島)의 등주문등현(登州文登縣)에 도착하였다. 따라서 그곳에는 일찍부터 신라인이 거류하며 신라 사신을 유숙시키는 신라관 등이 있었다.

그리고 후에는 신라인 집단거류지로서 치외법권의 조차지(租借地)도 있었다. 사신의 수행원이 휴대하는 물품은 대개 양이 적고 값이 비싼 고급직물과 인삼 · 금은세공품 등이었는데, 처음엔 수행원의 노비 정도에 충당하기 위한 조처였던 것이 차차 상업화되었다.

신라에서 당나라에 보낸 공적 무역품은 대략 금 · 은 · 동 · 침(針) · 우황(牛黃) · 세포(細布) · 마(馬) · 인삼 · 미체(美髢) · 견직물 · 해표피(海豹皮) · 구(狗) · 저삼단(紵衫段) · 장신구 · 해송자(海松子) · 곤포(昆布) 등이며, 빙답품(聘答品)으로는 금사(錦絲) · 계능라(罽綾羅) · 포대(袍帶) · 금은세공품 · 차(茶) · 금은대(金銀帶) · 서적 등이었다.

또한, 일본에 보낸 수출품은 옥류(玉類) · 출석소도(出石小刀) · 출석모(出石桙) · 일경(日鏡) · 웅신리(熊神籬) · 견물(絹物) · 불상 · 금은철정(金銀鐵鼎) · 세포 · 하포(霞布) · 누금기(鏤金器) · 호표피(虎豹皮) · 약물(藥物) · 병풍 · 안피(鞍皮) 등이었고, 수입품은 견 · 면 · 위(韋) · 사(糸) · 미농시(美濃絁) 등이었다. 이것들은 대부분이 신라 왕실 및 귀족계급의 기호품이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통일신라의 상업

신라의 삼국통일은 민족사상 큰 의의를 가지는 것이니, 정치적으로는 민족적 대통일을 달성하여 통일국가로의 발전한 것이며, 경제적으로는 민족자주경제로서 비약적 발달을 이룩하였다고 하겠다.

경제발달의 중요원인은 삼국통일로 인해 인적 · 물적 자원이 풍부해지고, 군사적 전투 결과 각지의 교통이 원활해졌으며, 대외적으로 당나라를 비롯한 일본과의 통교가 번영하여 문화적으로나 경제적으로 크게 영향을 받았던 까닭이라 하겠다.

신라의 삼국통일에 있어 당나라의 조력이 컸지만, 결국 우리 나라에서 당나라의 세력을 몰아냄으로써 양국간의 관계가 악화되며 나당국교(羅唐國交)가 중단되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국교가 다시 열리게 되어 사절의 내왕으로 문물교류가 왕성하였다. 이와 같은 당나라와의 관계는 산업의 발달을 촉진시키고, 도시의 번영을 이루어 수도 경주는 그 전성기를 맞이했다. 가구수는 총 17만8936호에 이르렀다고 한다.

경주의 행정구역은 1,360방(坊)과 55리(里)로 구분되었고, 경주 도내(都內)의 국내상업이 잉여생산물의 교역을 통해 점차 발전되었던 한편, 생산의 증진과 생활의 향상은 대당무역을 촉진시켰다. 신라 말기로 갈수록 민간에 의한 사적 무역이 성해지며, 한편 공적 무역에 있어서도 점차 국가적 무역의 특징을 나타내고 있다.

초기 수출품이 질적 요소의 원료품이 많음에 비하여, 후기에는 생산가공품이 양적으로 많은 경향을 나타내고 있음은 산업의 발전상을 반영해 주는 것이라 하겠다.

중국과의 교역은 서해를 통하여 행해졌다. 그 경로를 살펴보면 두 길이 있었으니, 하나는 전라남도 영암 방면에서 흑산도를 거쳐 중국 상해(上海)방면으로 통하는 길과, 또 하나는 경기도 남양만에서 서해를 건너 중국 산둥반도로 가는 길이었다.

산둥반도의 등주(登州)는 당시 당경(唐京:長安)에 들어가는 동래제국(東來諸國) 사절의 상륙지점으로, 거기에는 특히 신라 · 발해의 사신을 숙박 · 접대하는 신라관 · 발해관이 있었고, 또 양국의 교관선(交關船:무역선)이 출입하던 일종의 호시장(互市場)이 있었다고 한다.

일본의 경우에는 대한해협을 통해 일본 연안에 이르렀으나 대개 나가토(長門) · 치쿠젠(筑前) · 이키도(壹岐島:島根縣) 및 기타 해안지역을 교역장소로 삼아 일본산 면(綿)을 주로 수입하였다.

한편, 흥덕왕 때 장보고(張保皐)는 중국과 일본에 내왕하면서 대규모의 무역을 행하게 되었다. 그의 일본과의 교역활동을 보면 주로 구주(九州)의 치쿠젠을 내왕하였다.

장보고는 소위 회역사(廻易使)라는 무역사절을 자주 일본에 파견하여 신라 · 당 · 일본 사이의 국제적 무역을 행하였던 것이니, 비록 장보고가 사사로이 보낸 회역사라 할지라도 그들의 무역정책에 비추어 필요한 것이므로, 일본 정부에서는 그의 견사(遣使)를 공인하여 정식교역에 응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와 같이 하여 청해진(淸海鎭)과 일본 사이에 교통무역이 크게 성하였던 것이다. 중국에 대한 장보고의 해상활약을 보면 원래 장보고의 근거지가 중국의 산둥성 등주지방이었으며, 등주지방은 또한 예로부터 우리 나라와 중국과의 해상교통의 요충지였다.

그 중에서도 법화원(法華院)은 신라인의 빈번한 내왕소이며, 본국과의 연락이 밀접한 곳이며, 따라서 정보도 빨랐다. 그렇기 때문에 중국의 사신은 바다를 건너기 앞서 먼저 등주를 거쳐 법화원에 들러 모든 사전편의를 도모하며, 만전의 준비를 다 이곳에서 하였다는 것이다.

또한, 신라의 상선 역시 이 적산포(赤山浦)에 들러 그쪽 사정을 탐문하였다는 것이다. 이것으로 보면 등주 적산포는 신라와 당나라의 교역장 구실을 하였던 것이다.

장보고는 대당무역에 있어 견당매물사(遣唐買物使)의 인솔하에 교관선을 파견하였는바, 그것은 일본에 대한 회역사 파견과 아울러 당시 국제무역에 큰 공헌을 했다고 볼 수 있다. 그의 대당교역의 지역적 범위를 보면 자못 광범하였던 것으로, 남쪽으로는 양자강(揚子江)에서 북으로는 산둥반도에 이르는 지역이었다.

장보고의 무역선을 회역사나 견당매물사 등으로 부른 것은 그것이 한 개인의 무역이 아니라, 이미 신라의 대표적 무역으로 여기게 된 증거라 할 것이며, 그것으로 본다면 장보고의 존재는 적어도 국제무역상에 있어서는 신라의 국가적인 존재였던 입장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러니만큼 그의 무역활동으로 인해 기울어 가던 신라 왕국의 경제질서를 회복할 수 있었으며, 반대로 그의 몰락으로 인하여 국제무역에 큰 타격을 주었음도 오히려 당연한 귀결이었다.

고려시대의 상업

도시의 상업

고려의 도시형성은 태조가 즉위한 이듬해 도읍을 철원으로부터 송악(松嶽)의 남쪽으로 옮기고, 궁궐 · 관아를 비롯하여 시전(市廛)을 세우고 5부의 방리(坊里)를 나누어 이를 개주(開州, 開京 · 皇都 · 松京 · 松都)라 일컬은 때부터 시작된다.

지방은 대개 주(州) · 부(府) · 군(郡) · 현(縣)으로 구분하여 호족들로 하여금 다스리게 하였으며, 또한 개경(開京) 이외의 지방 삼경(三京)으로서 서경(西京:평양) · 동경(東京:경주) · 남경(南京:한성) 등 특수 도시를 두어 그 지역의 행정중심지로 삼았다.

고려시대의 지방도시인 주 · 현은 다분히 예로부터 전해오는 제도를 지닌 자치적 농촌을 기반으로 하여, 도시라기보다는 오히려 농촌공동체의 잔해가 많이 보인다. 이는 토관(土官) 또는 호장(戶長) 등의 치하에 예속된 농민과 또는 자유농민으로서 전객화(佃客化)된 농노 · 천민들인 각종 수공업자와 상인 등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지방도시는 또한 예속적 농민과 상공인으로 하여금 고려의 봉건적 재산의 재생산을 위한 집권적 통제부로서 존재하는 동시에, 한편으로는 봉건적 분배의 중심지이기도 하였다.

즉, 중앙관부에 소속된 관료는 개경에서, 지방관료는 3경 또는 주부도시(州府都市)에서 미속(米粟:쌀과 벼) 등 현물형태의 녹봉을 비롯한 모든 봉건귀족의 수요를 충당하였음은 물론, 일반 민중의 수요공급을 위한 교환시장으 구실도 담당하였던 것이다.

고려시대의 가장 규모가 큰 시전은 개경의 관설시전(官設市廛)이었다. 국초 이래로 설립된 고려관부의 어용상전(御用商廛)인 시전은 상설점포로서 개경에 존재하였다. 즉, 개경 시내에다가 고려관부에서 시전을 설립하여 상인으로 하여금 어용적 상업에 종사하게 하였던 것이다.

특히, 상가(商街)는 도성의 중심지를 택하여 수도의 일대 미관을 이루었으며, 광화문(廣化門)에서 부급관(府及館)에 이르기까지의 양측은 모두 상인을 위하여 길게 지어 빌려 준 점포를 이루고, 각기 상점문에는 영통(永通) · 광덕(廣德) · 흥선(興善) · 통상(通商) · 존신(存信) · 효의(孝義) · 자양(資養) · 행손(行遜)이라 쓴 간판이 붙어 있어, 고객의 구미를 당기게 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이와 같은 시전의 양상은 도시의 일면에 지나지 않으며, 도시 전체로 보면 1123년(인종 1)경에 이르도록 도시 내에 낭떠러지 또는 황무지가 있었으므로, 규모에 비해 도시의 내용은 빈약했음을 알 수 있다.

인종 이후 경시전(京市廛)은 발전하게 되었으니, 관설 어용시전으로서의 경시전은 도시의 독립적 수공업자의 가격 · 노동력 증대로 인한 제작품의 시전 유출과 특수하게 행해진 외국사신과의 호시장(互市場)에 의한 외래품의 유입 등이 계기가 되어 활발한 교환형태를 나타내게 되었다. 예컨대, 외국사신이 오면 대시(大市)를 열어 많은 견직 · 금은공예품 및 기타 화물(貨物)을 진열했던 것이다.

이와 같은 예에서 외국사신의 내왕이 국내의 상업발전에 얼마나 기여했던가를 알 수 있다. 당시 송나라 사신 등은 본국으로부터 기명(器皿:살림에 쓰는 그릇) · 고기(古器) · 법서(法書) · 명화(名畫) · 향물(香物) · 차 및 기타 진귀물을 가져와서 진열하여 연회를 베풀었고, 주연이 끝나면 접대관이 그 진열품 중에서 원하는 물건을 가져가도록 하였다 하니, 이는 곧 상품매매를 의미하는 것이다.

고려 경시전은 더욱 번창하여 1208년(희종 4) 시전의 대개영(大改營)을 실시하였으니, 시전의 중추를 이룬 좌우 양측의 장랑 1,008영(楹)과 기타 대창고(大倉庫)와 73영의 방옥(坊屋) 등 실로 장대한 규모로 확장되었다. 더욱이, 고려 말엽의 개성시전의 번영은 외국사신들에게 깊은 인상을 주기도 하였던 것이다.

고려 개경의 시전에는 그 보호 · 감독기관으로서 경시서(京市署)를 설치하여 시사(市肆)의 물가조절과 시정감독을 담당하게 하였다. 경시서는 상행위의 감독뿐만 아니라, 상품의 종류에 관해서도 통제를 가하여 관허지물(官許之物) 이외에는 임의로 판매할 수 없게 했다.

그리고 이를 범할 경우에는 극형에 처했던 일도 있으며, 또 경시서로부터 가격에 대한 평가를 받고 세인(稅印)을 찍은 이후 비로소 매매할 것을 허락한 일도 있었다.

시전은 점포를 가진 좌상이며 상설상점인데, 개경에는 이러한 시전 외에도 일정한 장소에서 열리는 노상시장(路上市場)이 있었다. 이런 시장은 방내(坊內)에 설치되어 조석으로 시장이 서서 주변 농민의 생산물과 지방특산물 등이 수도 시민의 수요를 충족시키기 위하여 집적되어 상호교환되었다.

지방의 상업

고려의 지방도시에서 행해진 소위 향시는 대체로 1일 왕복이 가능한 성읍시와 교통의 요충지를 택하는데, 매일 열리는 것이 아니라 주시(週市)의 형태를 가졌다.

원래 주시는 도시경제의 시초단계로서 지방도시의 수공업자와 그 도시를 중심으로 대략 1일 왕복하는 거리에 주거하는 농민이 그들의 일용품의 매매교환을 목적으로 1주일에 1, 2회 정도로 개시(開市)하는 것이다.

주시의 발달은 농업 · 상업 · 공업의 분립과정을 초래하며, 지방도시의 인구집중을 촉진하고, 전업 시장상인의 발달을 수반하며, 나아가서는 도시정주상인(都市定住商人)이 출현함으로써 도시세력 발흥의 유력한 원동력을 이룩하게 된다.

향시에는 아직 경시와 같은 상설 시전은 없었으며, 평상시에는 아무런 상품교역이 없다가 장날이 되면 각자의 생산물을 가지고 와서 매매하였다. 당시 일반적 경제상태로 보아 자급자족의 단계를 벗어난 지 얼마 안된 때라, 여기에 모여드는 사람들은 대부분이 판매자인 동시에 구매자였다.

향시가 열리는 시간은 정오부터 하오 2, 3시경이었는데, 그 까닭은 1일 행정을 왕복하기 위해서였다. ≪송사 宋史≫의 기록에 의하면, 고려의 상하계급이 모두 시장에서 상품교환을 함으로써 이익을 취하고, 일중(日中)에 개시하며, 쌀과 베[布]로써 물품화폐(物品貨幣)를 대용하였다 한다.

향시를 중심으로 전업 상인이 있었으니, 그들은 대체로 공동체적인 상인단체를 형성하여 시장과 시장을 순력하는 행상인이었다. 이들 행상 중에는 각지의 특산물을 휴대하고 먼 거리로 행상하던 무리가 있었고, 소지역 내의 각 호를 개별로 찾아다니던 부상 등도 있었다.

원격지행상 가운데 일부는 멀리 몽고나 중국 등지에까지 가서 특산물교역을 했으며, 이들의 상업자본은 무시할 수 없을 정도로 거대하였다.

한편, 부상에 관해서는 기록이 없어 상세히는 알 수 없으나, 공양왕 때 황해도 영정포(寧丁浦)의 소금을 부상(負商)으로 하여금 운반하게 하였다 하며, 당시 부상배(負商輩)가 전국 방방곡곡을 순력하면서 행상하였다고 한다.

부상들은 주로 일상생활에 필요한 어류와 도기 · 소금 · 목기 및 기타 농가의 잉여생산물을 판매하였으며, 남자와 부녀자들이 이에 종사하였다. 남자는 물품을 지게에 짊어지고 다니고, 여자는 머리 위에 이고 다니며 판매하였다.

지방향시의 감독은 각 주현의 호장(戶長) 등이 관장하였는데, 그들은 각 지방시(地方市)의 장날을 정하고 도량형을 규제하며 시장세를 징수하는 등 시장의 모든 일을 감독하였다.

상업관련기관

주류(酒類)는 대중의 기호품인 까닭으로 주류의 판매는 일반 상품의 교환진흥의 매개 역할도 하였다. 주점(酒店)의 설치는 이미 983년(성종 2) 10월에 행해졌으니, 성례(成禮) · 낙빈(樂賓) · 연령(延齡) · 영액(靈液) · 옥장(玉漿) · 희빈(喜賓) 등 6개 소의 주점을 설치했다. 주점의 명칭은 고객을 끌기 위한 상술로서 호기심을 끄는 명칭을 사용하고 있다.

이들 주점의 경제적 역할을 논한다면 당시의 상업발달을 위한 조성기 역할을 하였고, 또 부진한 화폐유통을 번창하게 하기 위한 시책으로서 국왕이 계획적으로 주식점(酒食店)의 개설을 장려한 사실도 있었다.

예컨대, 1104년(숙종 9) 7월, 용전(用錢:용돈)의 편리함과 이익이 되는 점을 납득시키기 위하여 숙종은 각 주현에 주식점을 개설하고, 주화의 통용을 장려함으로써 국리민부(國利民富)를 꾀하였다.

이와 같이, 고려의 화폐유통의 미발달단계에서 주점 개설을 장려하여 고려 상업자본의 융성을 기하였다. 또한, 주점은 교통의 요충지나 상인 및 상품의 집산지에 개설하였기 때문에, 이른바 국경과 나루터에서 받는 상인세를 이들 주점에서 징수했을 것으로 보이고, 이들 주현의 관설주점[旅閣]은 상세징수기관(商稅徵收機關)이기도 하였다는 주장도 설해진다.

그러나 그것은 저가(邸家:旅閣)와 주점을 혼돈한 데서 오는 오류라 생각된다. 원래 관진상세는 저가에서 임(任)하였던 것이다. 저가는 상인 및 화물 집산지에 발생, 존재한 진(津)에 있는 상가의 뜻으로서, 교통의 요진(要津), 특히 해박(海舶)이 많이 모이는 장소에서 화물보관 · 위탁판매 · 금융업 등을 업으로 삼고, 또한 화주(貨主)로부터 얼마간의 관진상세를 공제하였던 것이다. 저가는 후에 여각(旅閣)이나 객주로 전환되었으나, 이 저가의 시원적 존재가 주점인지는 알 수 없는 일이다.

고려시대에는 상려(商旅)의 편의를 도모하기 위하여 원(院)이라는 숙박소를 설치하였다. 국가에서는 그 경영에 필요한 자원으로서 급전(給田)을 하고, 사람을 모집하여 원의 주인으로 삼았다고 한다. 원은 원칙적으로 국가경비로써 상려의 집산에 설치한 특수한 여인숙으로서 일반의 상업교통의 편리를 위한 것이다.

고려의 역제(驛制)는 정부의 우편정책[郵政]을 담당하며 역리와 역마를 두어 임무를 수행하게 하였다. 그러나 원은 선정된 원주(院主)가 자치적으로 경영했으며, 원관(院館)의 보존 및 수선 등은 주현관(主縣官)이 감독하였다. 원관에 지급된 전결수(田結數)는 대로(大路) · 중로(中路) · 소로(小路) 등으로 구분되었으니, 즉 도로의 등급 또는 교통량의 대소에 따라 차이를 두었던 것이다.

예컨대, ≪고려사≫에 의하면, 대로에 5결(結), 중로에 4결, 소로에 3결을 지급하였다는 것인데, 상업교통량이 많은 대로의 원관은 그만큼 많은 경비가 필요하였음을 말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원관은 상업을 위한 제반 편의를 국가가 도모하고자 한 데서 경영되었던, 상업교통의 안전을 위해 없어서는 안될 중요기관이기도 하였다.

상업에 관한 조세

고려시대의 상세(商稅)에 관해서는 일관된 법규가 없어 알기 어려우나, 단편적인 문헌에 의하여 상세가 존재하였다는 것이 짐작된다.

특히, 자연경제시대인 당시의 상업적 교통로는 불편한 점이 많았으리라 보이며, 따라서 국가에서는 상업교통의 편의를 도모하는 동시에, 각 도의 접경지역 및 중요 하천(河川)의 나루터에서 상인 등의 통과세로서 상세를 징수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관진상세의 과다한 징수로 상업상은 물론, 사회풍속상 폐단을 자아내어 1106년(예종 1) 7월 관진상세의 혁파론까지 나왔으나 좀처럼 없어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러한 교통요충의 통과세 이외 상인자본의 확대에 따라 국가적 특별조치에 의하여 왕왕 상인에 대하여 세미(稅米)를 징수하기도 하였다.

상인에게는 그 자본의 정도를 3등분하여 상세를 부과하였으니, 거상은 판서급 등이 부담한 3석량(三石糧)을 부담한 사실로 보아, 당시 부상대호의 사회적 능력을 짐작할 수 있다. 고려시대에는 상세로서 관진통과세(關津通過稅) · 임시부과세(臨時負課稅) 등이 있었으며, 이 밖에 특정 상인에게도 상세를 부과하였다.

조선시대의 상업

태조가 한양으로 천도하게 되자 옛 수도 개성으로부터 새 수도의 관공(官公)을 좇아 이전해 오는 어용상인은 물론, 각지에서 와서 장사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이에 조선 정부는 수도 서울의 시장을 정리하여 관아와 도시민을 위한 생활필수품의 수요공급을 원활하게 하였다.

또한 서울 간선도로 좌우 양측에는 막대한 국비와 노동력을 동원하여 점포를 설치하고 정주상인에게 제공, 상인으로 하여금 최대한의 어용적 상업경영에 종사하게 하여, 관부(官府) 및 귀족층을 비롯한 수도 주민의 수요를 충족시키고자 하였다.

대개 조선시대의 국내상업은 경향 각지를 막론하고 그다지 큰 발전을 이루지 못하였다. 그 원인은 국초 이래 농본주의를 국시로 하고 상공인을 천시하였으므로 상공업의 자유로운 발달을 억압, 방해하였을 뿐 아니라, 지방의 생산력이 빈약한데다가 교통의 불편으로 상거래가 번영하지 못하였고, 아울러 상세의 부과에 가렴주구(苛斂誅求)가 심했던 탓이다.

더군다나, 도시의 어용상인과 지방의 보부상 · 객주 · 여각 등 시장상인에게 정부에서 상업상의 전매특권을 부여함으로써 일반 장사하는 사람의 자유로운 발전을 억제하였음은 상업부진의 큰 원인이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제조건은 봉건사회의 일반적 특성으로 조선사회에 한한 특수 현상은 결코 아니었다.

오히려 그러한 특권상인의 활동에 의하여 새로운 상업자본의 육성을 조성하게 되고, 교환경제의 신속화와 원활화에 주동역할을 함으로써 봉건적 상업형태의 변형을 초래한 점 등은 주목할 만한 점이다.

조선시대의 대표적 국내 상업조직은 다음과 같다. 첫째, 도시의 상업기관으로서 서울의 공랑상점(公廊商店)인 시전과, 선조 이후에 발생된 육의전(六矣廛), 그리고 개성 · 평양 · 수원 등 지방도시의 상설점포 등이 있었다. 이들은 주로 정부와 관아의 물품용달상으로서 발생하였으며, 또한 그것으로 경영을 유지했다.

둘째, 객주와 여각인데, 이들은 흔히 저가라고도 한다. 지방도시의 화물집산지에 존재함으로써 화물의 도산매, 화물보관의 창고업, 위탁판매업, 화물운송업, 고객의 편리를 도모하는 금융업 등을 겸하던 상업기관이다.

셋째, 행상인 보부상인데 상업집산지 또는 직접생산자로부터 구입한 일용잡화물을 판매하되, 보상은 상품을 보포(褓布:보자기)에 싸서 들거나 질빵에 걸머지고 다니며, 부상은 5조물건(五條物件:魚 · 鹽 · 土 · 木 · 水鐵器)을 지게에 얹어 등에 짊어지고 다니면서 지방도시 또는 산간벽지에 이르기까지 순력행상하던 자이다.

넷째, 공인자본(貢人資本)을 들 수 있다. 대동법(大同法) 실시로 인한 공법개정(貢法改定)과 더불어 관부의 수요품은 공인을 통하여 구입하였으니, 이들 공인은 관부 · 궁부의 수요물자를 육의전과 더불어 독점적으로 공급하던 어용상인으로서 그 자본은 비교적 대규모였다.

도시의 상업

태조 즉위년 고려의 제도를 따라 서울에 경시서(京市署)를 설치하여 경내상인(京內商人)을 관리하며, 도량형기를 단속하고 물가를 억제하는 등 일반 시장의 행정사무를 담당하게 하였다.

그 뒤 1399년(정종 1) 종로(鍾路)를 중심으로 공랑(公廊), 즉 상설점포를 관설하여 시전시설을 정리하고 그곳에서 상행위를 영위하게 하였다.

당시의 시전은 제법 규모가 있던 것으로 지금의 종로 네거리부터 창덕궁 입구까지 좌우 행랑 800여 칸을 마련하고자 하였으나 완성을 보지 못하고, 태종 때에 본격화하였다.

1410년(태종 10) 2월 먼저 시전의 지역적 한계를 정하되, 대시(大市)는 장통방(長通坊:지금의 관철동 · 장교동), 미곡잡물(米穀雜物)은 동부연화동구(東部蓮花洞口:연지동) · 남부훈도방(南部薰陶坊:을지로 2가) · 서부혜정교(西部惠政橋:종로 1가 福淸橋) · 북부안국방(北部安國坊:안국동) · 중부광통교(中部廣通橋:남대문로 · 광교), 우마(牛馬)는 장통방 하천변에서 각각 매매하도록 하고, 민간의 작은 시장은 각기 거주하는 곳의 문전(門前)에서 영위하도록 하였다.

또한, 같은 달 시장 및 시전의 감독기관으로서 경시감(京市監)을 다시 설치하여 시내 상업교역에 관한 물가조절 · 간도(奸盜)의 단속 · 상세징수(商稅徵收) 등의 일을 주관하게 하였으며, 별도로 청제감(淸齊監)을 설치하여 시가(市街)의 청결을 감독하게 하였다.

이처럼 국초에 경성에 건조된 관설시전은 소민(小民)의 무천(貿遷)으로 공가(公家)의 수용(需用)에 이바지하였지만, 날로 늘어가는 서울 인구의 생활필수품을 전적으로 공급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이와 같은 까닭으로 후에 서울 시내외의 수요공급자가 일중에 모여 화물의 매매교역을 하고 해질 무렵에 흩어지는 소위 장(場)이 발생하여 상당히 번영하였다. 그러나 이들 장시는 무질서한 혼효상태였으므로 관부에서는 그 정리에 더욱 신경을 썼다.

국초 이래 건립된 공랑시전은 당초 상업규모가 거의 동일하여, 그 경영과 자본면에 큰 차이가 없었다. 그러나 그 뒤 수도 한양의 번영과 상업의 발전은 상인자본의 우열을 가져오게 했으므로 자연히 전(廛)의 특성에 따라서 경영방식이 달라지고, 경제적으로나 사회적으로 확고한 위치를 차지하는 전이 생기게 되었다. 그리하여 국역부담의 고액전(高額廛) 여섯 개를 추려서 육의전(六矣廛)이라 하였다.

원래 시전에서는 관부의 수요에 따라 부과되는 임시부담금, 궁중(宮中)과 부중(府中)의 수리(修理)와 도배(塗禙)를 위한 물품 및 경비부담, 왕실의 관혼상제는 물론 매년 수차례에 걸쳐 중국에 파견되는 각종 사절의 세폐(歲幣) 및 수요품 조달 등의 부담을 맡았다.

이와 같은 국역부담의 시전을 유분각전(有分各廛)이라고 하며, 그 중에서 최고액 유분전(有分廛) 6개 상전(商廛)을 육의전이라 칭하였던 것이다.

유분각전은 국역부담이 면제된 영세시전인 무분각전(無分各廛)과 구별되는 것으로, 그 이익 정도를 계량하여 각기 응분에 따라 국역을 규정했던 것으로서, “10분으로부터 1분에 이르기까지 모두 37전은 매번 국역을 부담한다(自十分至一分 凡三十七廛 每當國役).”라고 하여, 십분역전(十分役廛)은 응십분(應十分), 일분역전(一分役廛)은 응일분(應一分)하게 했던 것이다.

육의전은 국역응분에 따른 특권화된 전이기 때문에, 정부의 필요에 따라서는 수효를 늘려 칠의전(七矣廛) · 팔의전(八矣廛)까지 생기기도 하였다.

이들 특권상단인 육의전 상인들은 서울 시내에서 각기 상품의 전매권을 향유하여, 독점상인으로서 서울 시내의 상권을 장악하였으며, 관부에서도 국역부담의 대상으로 그들의 보호육성에 조력하였다.

국역부담의 발생시기는 대체로 대동법 실시의 논의가 일어난 선조 말에서 인조에 걸친 시기였을 것으로 추정되며, 특히 육의전의 발생은 인조 15년에 청나라에 보낸 방물(方物)과 세를 분담하게 된 이후부터라고 할 수 있다.

방물 · 세폐로서 공상(供上)된 물품은 각종 직물과 건어물로 크게 나눌 수 있으며, 육의전의 상품도 역시 직물과 건어물이 주요 상품이었다. 그로 인해 육의전의 상품이 방물 · 세폐로서 징발되었던 것이며, 육의전으로 하여금 금난전(禁亂廛)의 특권까지 부여하게 된 연유도 여기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육의전의 국역부담의 실제를 보면, 관부가 경시서를 통해 육의전으로 하여금 상납시킬 품목과 수량을 각 전의 도가(都家)에 하명하면, 도가는 각 전의 부담능력에 따라 유분각전의 비율을 정하고, 그 분부(分賦:세금 · 부역 등을 나누어서 부과함)를 총괄하여 상납하였다.

이와 같은 납세단체의 성격은 점차로 노골화하여 정기적으로 정률의 액수를 상납하게 하였으므로, 도가는 미리 각 전에서 물품을 징수, 보관하였다가 명령이 내리는 즉시로 납품하는 제도가 자연적으로 형성된 것이다.

조선 후기에 이르러 점차 상인자본의 축적과 더불어, 한편으로 정부의 재정적 궁핍으로 인하여 정부는 상인의 경제력에 의존하게 되고, 상인은 정부의 권력을 이용하고자 하여 양자 사이에 일종의 대상관계(代償關係:다른 물건이나 남을 대신하여 갚아 줌)가 성립하였다. 이에 정부는 상업억제에서 상업보호라는 변혁을 가져오게 되었다.

정부의 육의전 보호책으로서 대표적인 것이 금난전권(禁亂廛權)이라는 상품독점권의 부여이다. 이는 서구의 상인 길드적 특전 부여와 본질적으로 동일한 것이다.

본래 난전이라 함은 전안(廛案)에 등록되어 있지 않은 자나 또는 자기 소관 이외의 상품을 서울 도내(都內)에서 판매하는 행위를 말하는 것으로, 이를 금지포착(禁止捕捉)할 권리를 육의전 상단(商團)에 부여했던 것이다.

이러한 난전금지책은 조선시대의 특권상인 보호책의 일환이었으므로, 육의전으로 하여금 난전금지에 관한 한 일종의 경찰권을 허여하였던 것이니, 이는 곧 육의전의 자위 행위인 동시에, 조선 관부로서도 불가피한 처사였다.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육의전에 대한 금난전권을 부여한 시기는 대체로 그들의 국역부담과 더불어 생겼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와 같은 금난전권도 시간이 갈수록 동요되었다. 즉, 후기에 갈수록 세가(勢家)의 호노(豪奴), 특히 각 영문 소속의 군병들이 서울 시내에 거주하면서 시업(市業)에 종사하게 되자 그러하였고, 이들 군병들은 정부에서 시패(市牌)를 받고 5분의 1의 시역(市役)에 응할 의무를 부여받았다.

그러나 이 밖에도 난전이 계속되었으니, 숙종 연간의 훈련도감군(訓鍊都監軍) 및 정초군(精抄軍) 등의 좌시난전지폐(坐市亂廛之弊)라든지 관부제상사(官府諸上司)의 시전(市廛)을 침책侵責)하는 폐, 과거시험장의 응판(應辦)을 위한 시전의 차지, 일반 생산자에 의한 난전 등으로 전민(廛民)이 견딜 수 없을 정도였다.

이에 관부에서는 독점권의 완화책을 쓰지 않을 수 없게 되어, 육의전 이외의 상전(商廛)에도 허용하게 되니, 1791년(정조 15) 채제공(蔡濟恭)의 상소를 계기로 평시서(平市署)로 하여금 30년 이전에 설치한 오래된 점포를 조사, 보고하게 한 후 이들에게만 특권을 허락하였다.

또한, 1807년(순조 7) 육의전 이외의 발리전(鉢里廛) · 화피전(樺皮廛) · 청밀전(淸蜜廛) · 혜전(鞋廛) 등에도 특권을 주게 되었다. 여기서 부언할 것은 금난전의 특권은 서울 이외의 지방에서는 허용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지방의 상업

조선시대 지방의 상업은 주로 시장을 무대로 하여 경영되었다. 즉, 시장을 중심으로 한 지방경제가 곧 조선 지방경제의 특질이라 하겠다.

조선사회 경제생활의 토대는 역시 농업생산에 있었으며, 그 잉여물로 자기가 필요한 물품과 교환함으로써 유무상통하는 것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향시가 필요하였다.

향시의 수는 전국에 약 1,000여개 소가 있었으니, ≪만기요람≫에 의하면, 순조 때 경기도에 102개 소, 충청도에 157개 소, 강원도에 68개 소, 황해도에 82개 소, 전라도에 214개 소, 경상도에 276개 소, 평안도에 134개 소, 함경도에 28개 소였다고 한다.

보부상은 이 시장을 중심으로 행상하면서 생산자와 소비자 사이에서 교환경제를 매개하는 전문 시장상인이다. 보부상은 대개 1일 왕복의 노정을 표준삼아 형성되어 있는 시장망(市場網)을 순력하면서 각 지방의 물품교환을 촉진시켰다. 그들은 같은 경제지역 내에서 생산된 물화의 유통교환을 그 지역의 시장망을 통하여 행하였다.

원래 조선시대의 향시는 1월6장(一月六場)으로, 한 지방에서 매달 6회씩 개시(開市)되며, 1·6일, 2·7일, 3·8일, 4·9일, 5·10일의 순서로 개시하였다. 그리고 각 지방에는 그 시장을 형성하는 보부상 조직이 있어 같은 지역 내를 순회하며 행상을 하였다.

보부상은 보상(褓商)과 부상(負商)을 통칭하는 것으로, 때로는 보상만을 말할 때도 보부상이라 하고, 또 부상만을 통칭 보부상이라 하였으나, 이는 명백히 구분되어야 할 것이다.

상품을 구분해 보면, 고정된 것은 아니고 시대에 따라 약간의 변동은 있었겠지만, 대개 보상은 주로 정치(精緻)하고 비교적 고가인 잡화, 즉 오복(吳服) · 모물(毛物) · 골물(骨物) · 혁대(革帶) · 유(紐) · 도자(刀子) · 총(銃) · 관구(冠具) · 주단(綢緞) · 포목(布木) · 유기(鍮器) · 연죽(烟竹) · 금은동(金銀銅)의 제품 등이었다.

또한, 1899년 간행된 ≪상무사장정 商務社章程≫에 의하면 포(布) · 면(綿) · 지물(紙物) · 능(綾) · 주물(紬物) · 금 · 은 · 동 · 초(貂) · 달(㺚) · 면화 · 피혁 등을 판매하였다 한다. 이에 비하여 부상들은 비교적 조잡한 일용품으로 목기 · 연초 · 토기 · 어염(漁鹽) · 도자기 · 방망이 · 홍두깨 · 초석(草席) · 바가지 · 초혜(草鞋) 등을 판매하였다.

또한, ≪상무사장정≫ 좌사(左社:負商)의 판매물 종류에는 어염 · 생수(生水) · 철토기(鐵土器) · 목기 · 곽(霍) · 남초(南草) · 곡자(穀子) · 죽물(竹物) · 노석(蘆席) · 청밀(淸蜜) · 청마(靑麻) 등으로 되어 있다.

이와 같이, 부상의 상품은 재래의 농업생산을 주로 한 사회에서의 유치한 가내수공업품과 수산물을 주로 한 데 비해, 보상의 상품은 기술적으로 발달된 세공품이 위주이며 주로 사치품이 많다.

다음 행상의 방법을 보면, 보상은 상품을 보자기에 싸서 들고 다니거나 혹은 멜빵에 걸머지고 다니며 시장에서나 또는 촌가(村家)의 마루에다가 보포를 끌러 펴놓고 판매하였으므로 속칭 봇짐장사라고 한다.

이에 반하여 부상은 상품을 지게에 얹어 짊어지고 다니면서 판매하였으므로 일명 등짐장수라고도 한다. 그러나 그들 중의 대부상(大負商) · 대보상(大褓商) 들은 수운과 육태(陸駄)로 다량의 상품을 일시에 운반하여 판매하기도 하였다.

이 부상과 보상은 각기 다른 튼튼한 조직을 가진 행상조합(行商組合)으로서, 이미 서술한 육의전과 더불어 조선상업사에 있어서 도시와 지방상업의 대표적 존재였던 것이다.

상업관련기관

객주(客主)는 여각(旅閣)과 구별되나 지방에 따라서는 구별하지 않는 곳도 있다. 구별한다면 자본의 많고 적음에 따라 많은 것을 여각, 적은 것을 객주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객주의 업무는 매매의 중개업 · 여객업 · 은행업 등을 겸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본질적으로는 같은 성질의 것이다.

객주란 객상주인(客商主人)의 뜻으로 지방에서 내집(來集)하는 객상을 위하여 거중주선(居中周旋) · 물품매매를 성립시키는 제반 업무를 영위하였다. 즉, 위탁판매 · 대부(貸付) · 예금 · 어음발행과 때로는 여객업을 겸하기도 하였던 것이다.

객주의 기원은 확실하지 않으나 통일신라시대쯤일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시초에는 주인이 여객에게 매매의 상대방을 구해 주어 매매의 편의를 보아 주고, 상객은 이에 대한 보수로서 수수료를 주었던 것이 점차 습관화되어, 인습적으로 화물매매의 매개를 본업으로 삼고 보수도 당연한 권리로서 청구할 수 있게 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객주의 종류에는 중국상품의 위탁판매를 맡아 하던 만상객주(灣商客主)와 주로 남선보상(南鮮褓商)의 객주이던 보상객주(褓商客主)가 있었다.

또, 연안(沿岸)의 각 포구에 존재하며 곡물류 · 어염류 · 해패류(海貝類) 등의 위탁판매 또는 매입을 업으로 삼던 여각은 여관업도 겸하고 있었으며, 관헌과 권세가의 권력을 이용하여 자기 거래지방에서 오는 화객(華客)을 거의 강제적으로 내박(來泊)하게 하여 규정된 수수료를 받기도 하였다.

연안의 여각은 당초 각 포구에 내박하는 선객주(船客主)가 진화한 것으로서 풍부한 자금을 보유하며, 널리 상품을 취급, 거래하는 대상급(大商級)에 속하였다.

조선 초기 공물상납을 대행하는 소위 방납(防納)이라는 것이 있었다. 지방 각군에서 납입하는 공물을 백성을 대신하여 대납하고 이에 이자를 끼워 백성에게 받는 것을 방납이라 하였다. 방납자들은 주로 권문세가나 부상대가(富商大家), 그리고 원악이서(元惡吏胥) 등으로 관민 사이에 존재하면서 부당이익을 취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방납의 폐단에 대해 조선 정부는 여러 모로 시정책을 강구한 결과, 정부에서 필요한 물품을 새로이 선정한 공인(貢人)들을 통해 구입하게 하였다.

공인과 방납하는 무리들의 차이점은 방납자가 자기자본으로 민간이 상납하는 각종 공물을 대납하고 이윤을 붙여 민간으로부터 징수하는 데 반해, 공인은 정부가 필요한 물품을 구입할 때 물품의 종별로 선정되어 조달하던 상인단체로, 민간과 직접적인 관계가 없었다.

즉, 공인은 대동법 실시와 더불어 관부어용적(官府御用的)인 용달상인(用達商人)으로서 발생하게 된 것으로, 초기 방납자와는 근본적으로 성격이 상이한 것이다.

다음 기인(其人)이라는 것이 있었는데, 이들은 대동법 실시 이전에는 향리신분이던 것이 대동법 이후 기인으로 되었다. 기인은 자기의 상업자본이 많은 부상(富商)으로서, 정부와 왕실 수요의 소목(燒木)과 탄목(炭木)을 청부, 상납하였다.

그러므로 기인 · 공인은 본질적으로는 같은 성질의 상인단체로, 대동법 실시와 더불어 생긴 합법적인 상인단체이다. 초기의 방납지도와는 성질상 다른 존재가치를 가지며, 또한 공인계급은 상품청부권을 부여받아 부상대고(富商大賈)로 등장할 수 있는 합법적인 조건을 누리게 되었다.

공인과 봉건 관부는 상호 이해관계에서 볼 때, 정부의 백성에 대한 공물가미(貢物價米) 징수의 증감 여하에 따라 이해관계가 일치되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공인계급을 곧 봉건관부와 동일한 입장에서 민중의 착취기관이라고 규정지을 수는 없다.

오히려 공인자본의 확대는 사회경제의 발전과정에서 볼 때 원칙적으로 그 구매면에 있어서는 공장수공업(工匠手工業)의 발전에 기여하였고 일반 유통경제의 원활을 도모하여 국가산업발전에 공헌하였다는 점을 무시할 수 없을 것이다.

한편, 공인계급은 그 성분으로 보아 중서층(中庶層)으로 순상인적 입장에서 자기자본을 토대로 상행위에 종사하였다. 또는 수공업 생산제조인으로서의 각종 계단체(契團體)가 공계인(貢契人)으로서 정부와의 수요공급면에서 공물의 납품청부를 받아 그 이익금을 생산면에 재활용했다는 점에서 상행위를 겸했다.

또는 지역적으로 일정한 특수지역(京江 · 왜관 등)을 무대로 공물납품 · 매각 등을 업으로 삼았기에, 공인은 필연적으로 생산자와 긴밀한 관계를 형성했다. 그렇기 때문에, 수공업생산자인 공장(工匠)들이 직접 공인으로 등장하거나, 그렇지 않으면 공인은 공업생산자로부터 매입하여 납품해야 하였다.

또한, 공인이 정부로부터 불하받은 상품을 매각하는 데 있어 서울에서는 육의전을 비롯한 각 시전을 상대하였고, 지방에서는 객주 및 여각에 위탁판매하고, 또는 그들을 통하여 구입했던 것이 조선시대 도시 및 지방의 일반적 상업구조였던 것이다. 따라서, 공인과 일반 민중과의 관계에는 일정한 거리가 있으며, 혹자의 말과 같이 이중적 착취를 토색(討索)할 수는 없는 것이다.

조선 후기 상업경제의 일반적 구조형태는 조선사회만의 고립된 양상은 결코 아니라고 생각된다. 즉, 봉건주의 사회의 붕괴와 더불어 근대자본주의 사회로 이행하는 하나의 유형적인 경제현상이라고 보아야 할 것 같다.

조선의 봉건사회 내부에 있어서 공인과 같은 도시상인의 활동에 의하여 이루어지는 자본의 축적, 시장의 발달, 산업의 융성은 곧 조선의 봉건적 경제체제를 밑바닥에서부터 뒤흔들게 되는 요인이 되는 것이며, 나아가서는 근대자본주의로의 발달을 촉진하는 원동력이 되는 것이다.

또한, 공인계급의 자본이 조선의 국가 및 도시의 재정면에 영향을 주었으며, 이로 인한 도시민의 경제력은 상승하였으니, 이와 같은 사회경제적 성격은 곧 조선의 봉건적 정치 및 경제적 체제를 제거 또는 붕괴하는 데 일익을 담당했던 것이다.

공인은 상품거래의 독점권을 가지는 한편, 화폐유통에도 공헌하였다. 이들은 독점적 특권유지를 위하여 봉건권력층에 아부하였으며, 그 대상적 조치(代償的措置)로 상업특권 · 관세 · 시장세 등의 징수권, 때로는 채광권 등을 부여받기도 하였다. 그리하여 공인계급 중에는 경제적 이익을 획득함과 동시에 높은 사회적 지위를 사여받는 경우도 있었다.

공인과 조선 관부의 상호결탁은 조선사회에만 존재하였던 독특한 형태가 아니라, 일반 경제사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중세 후기의 도시상인, 금융업자와 정부권력자 사이에 밀접한 이해관계가 맺어지고 있던 역사사회적 성격을 띤 것으로 생각된다.

요컨대, 조선 후기의 공인 등 도시상인의 자본형성은 종전의 강제적 성격을 띤 여러 공동체의 해체와 직접생산자의 독립적 지위를 촉진하며, 그들의 상품교환방식, 즉 상품유통에 매개되어 재생산을 수행하는 점에서 볼 때, 봉건 경제체제와는 이질적인 근대 자본주의적 경제내용으로 이행하는 데 크게 공헌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물론, 이와 같은 봉건제로부터 자본주의로의 이동과정은 각각 그 나라의 역사적 사정과 내부적 구조 여하에 따라서 각종의 편이(偏異)와 농담(濃淡)의 차이를 나타내는 수도 있을 것이며, 또는 서로 다른 여러 유형으로 나타나는 경우가 있음을 알고 있는 바이다.

여하튼 사회적 부(富)의 형성으로 조선 봉건국가의 기본적 체제를 동요하게 하는 공인의 사회경제적 중대역할을 무시할 수 없는 것이다.

개항 이후의 상업

개항기 전후의 상업

개항 이후 일제강점 전까지의 역사는 관점에 따라 차이가 있겠으나, 대체로 3기로 구분할 수가 있다. 그것은 1876년의 개항에서 갑오개혁과 을미개혁을 거치는 약 20년간을 제1기, 대한제국의 성립에서 러일전쟁의 발발까지 약 8년간을 제2기, 러일전쟁 후 일제강점까지를 제3기로 하는 것이다.

제1기는 성숙한 내부적 준비 없이 외세와 접촉함으로써 심한 충격과 혼란을 가져왔고, 이에 따라 근대화 노력도 실패로 끝나고 만 시기이다. 그리고 이러한 실패를 기반으로 자율적으로 전통체제와 타협하며 근대화를 달성하려는 움직임이 태동한 시기가 제2기이며, 대한제국의 성립은 그와 같은 노력의 구체적 표현이었다고 할 수 있다.

즉, 정부측의 정책적 노력과 독립협회를 위시로 한 민간단체들의 노력이 동시에 이루어지고, 우리 나라에 있어서의 일본과 러시아의 세력균형이 이루어졌던 국제정세를 이용하였고, 또한 자본주의가 제국주의로 바뀌어 가고 있던 세계 정세와 관련하여 민족주의 기반 위에서 추진되었다는 특징을 가지고 있었다.

제3기는 제2기에서 나타난 자율적 노력을 분쇄하고 우리 나라에서의 러시아와의 세력균형을 타파하여야 하였고, 만주시장을 러시아의 독점상태에서 벗어나도록 획책한 일본이 러일전쟁을 발발시켰고, 영국 · 미국의 간접지원을 받은 일본이 우리 나라에서 러시아세력을 구축함으로써, 우리 나라가 일본의 독점적 세력권 내에 들어가 마침내 식민지로 전락하는 시기이다.

조선시대 재래 상점의 상업 사용인에는 수사환(首使喚) · 사환 · 차인(差人) 등이 있었다. 수사환은 이른바 지배인으로서 일정한 보수가 없고 영업성적에 따라 결산기에 이익의 일부가 지급되었으며, 재직 7, 8년간에 주인의 신용을 얻게 되면 소자본을 주어 후원해 주고 독립하여 지방행상을 하도록 하였으나 후에는 월급을 지급하게 되었다.

사환은 소년점원으로서 연 1, 2회 의복 · 신발 등을 급여할 뿐 일정한 보수가 없으며, 사람됨에 따라 장래 수사환이 될 수 있다. 차인은 대금(貸金) 및 상인의 지배인으로서 주인의 신용을 얻은 자가 독립하여 지방행상 및 금융에 종사하는 것으로, 스스로의 손익계산으로 상행위를 하는 점으로는 독립한 상인이지만, 주인으로부터 자본 또는 화물의 융통을 받아 주인에게 복종하는 것으로는 일종의 사용인이다.

행상은 보부상이며, 선박을 이용하는 수상(水商)과 육로를 순회하여 상업을 영위하는 육상(陸商)이 있다. 보부상은 대체로 이 육상을 말한다. 개성이 보부상의 중심지로서 그 세력은 전국에 미치고 있었으며, 시장행상 및 시장금융에 관한 개성상인의 실권은 실로 견고한 것이었다.

거간은 물주와 객주의 중간에서 매매를 주선하는 중개인으로서, 상거래의 알선을 할 뿐 아니라 토지 · 가옥의 매매 · 대차 · 전당 등을 주선도 하였다. 거간은 이것을 전업 또는 부업으로 하는 사람, 또한 상거래의 매개만을 행하는 사람, 시장에서 혹은 객주의 전포에서 행하는 사람 등 그 종류가 많으나, 모두 구전 또는 수수료를 목적으로 하는 영업이다.

≪관습조사보고서 慣習調査報告書≫에 의하면, 그 당시 서울과 평양에는 가쾌(家儈)라는 것이 있어 토지 · 가옥의 매매 · 전당 · 대차를 매개로 하여 생업으로 삼고 있었다. 가쾌는 옛날에는 하등의 수속을 필요로 하지 않았으나 개국 502년 이후 한성부의 인허를 필요로 하고, 1910년 9월 이후는 이 제도를 폐지하고 자유영업으로 하였다.

가쾌는 복덕방(福德房)이라 칭하는 일정한 사무소를 가지고 대체로 몇 사람이 공동사무소를 내고 있었으며, 1910년 당시 서울에만 약 100여 개의 복덕방이 있었고, 가쾌의 수는 500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조선시대의 공동출자로서는 동사(同事) 및 계(契)가 있으며, 1910년 일제강점 후 <물산동업조합법>에 의거하는 것과 이에 준하는 조직 또는 임의의 각종 동업조합이 설치되고 있다.

동사는 2인 이상 공동으로 영업 또는 상거래를 하는 경우의 호칭이며, 동사는 조직하는 사람의 출자자본을 본전(本錢)이라 칭하고, 금전 또는 물자로 하는 경우도 있다. 또한, 동사원(同事員)의 일부가 자본주이고 다른 일부가 종사원인 경우가 있는데, 이것을 차인동사(差人同事)라 칭하고, 출자자를 물주 또는 전주(錢主)라 칭한다.

동사는 협의에 의하여 해산할 수 있고 해산 후의 재산처분은 출자자에 대해서는 그 액수에 따라 분배하고 나머지는 머릿수대로 분배하며, 손해가 있을 때는 평등하게 이것을 부담하고, 제3자에 대해서는 각자가 전부의 책임을 이행할 의무를 지고 있어 연대관계와 유사하다.

조선시대는 상업을 천시하는 풍조가 있어, 공공연히 상업을 영위하는 것을 수치스럽게 생각하여 비밀리에 타인에게 자본을 지급해 주고 상업을 영위하는 예가 적지 않았다. 이 경우 자본의 공급자가 영업주이며, 따라서 그 영업은 자본주의 계산에 따라 행하는데, 표면상의 영업자인 사용인은 이익의 얼마를 보수로 받는 데 불과하다.

외부에 대해서 직접으로 권리 · 의무를 지는 자는 영업자이지만, 이면에서 실질적으로 그 권리 · 의무를 지는 자는 자본주로서 익명조합과 유사하다. 또한, 자본주의 사망은 바로 계약종료의 원인이 되지 않으나, 영업자의 사망 등의 경우는 바로 계약종료가 되고, 승계인으로 하여금 그것을 계속시킬 것인가의 여부는 자본주의 임의에 속한다.

조선 후기 이후 공인자본의 확대는 사회경제의 발전과정에서 볼 때, 원칙적으로는 구매면에서 공장수공업(工匠手工業)의 발전에 기여하고, 경제유통을 원활하게 함으로써 국가산업의 발전에 긍정적인 영향을 끼쳤다.

공인이 정부에서 불하된 물품을 매도함에 있어 수도에서는 육의전을 위시하여 각 시전을 상대로 하고, 지방에서는 객주 및 여각에 위탁판매시켰으며, 또한 그들을 통하여 필요한 물품을 구입하였다는 것이 조선시대의 도시 및 지방의 일반적 상업구조였다고 할 수 있다.

이와 같은 공인이나 도시상인들의 활동에 의해서 얻어진 자본의 축적, 시장의 발달, 상업의 발전은 조선사회의 경제체제를 저변에서 동요시킨 요인이 되고, 나아가서 근대화에의 길을 태동시킨 원동력이 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지방상업은 주로 장시 또는 향시를 중심으로 영위되었다. 조선사회 경제생활의 토대는 농업생산이었으며, 그 잉여생산물을 자신이 필요로 하는 물품과 교환하는 과정을 통해서 유무상통한다는 생활체계였으므로, 이를 위하여 향시가 필요하였다.

또한, 지방도시에는 화물의 도산매(都散賣), 화물보관의 창고업, 위탁판매업, 화물의 운수업, 고객의 편의를 도모하는 여러 가지 업 등을 겸하고 있는 상업기관으로서 객주와 여각이 있었다.

이러한 생활환경 속에서 지방상업의 대표적 존재는 보부상이었다. 보부상은 화물집산지 또는 직접 생산자에게서 구입한 일용잡화를 지방도시 혹은 산간벽지에 이르기까지 순력행상하면서 생산자와 소비자 간의 교환경제를 매개하는 전문적인 시장상인이었다. 그들은 대체로 1일 왕복이 가능한 노정(路程)을 표준으로 형성되어 있는 시장망을 순력하면서 각 지방의 물품교환을 촉진시켰다.

부상과 보상은 각기 별개의 강고한 조직을 가진 상인조합이며, 행상조합으로서 육의전과 더불어 조선상업사에 있어서의 상업의 대표적 존재였다.

정부는 1883년 이것을 합동하여 군국아문(軍國衙門)에 부속시켰고, 1894년 새로 농상아문(農商衙門)의 관할하에 두었으나, 1897년 황국협회(皇國協會)에 이속시켰다. 그 뒤 1904년 공진회(共進會)가 발족함에 따라 보부상을 거기에 소속시켰다.

보부상에게는 행상을 둘러싼 제반의 권리가 보장되어 있었다. 정부는 각도 각읍에 명하여 보부상이 행상중 불의의 재난을 입지 않도록 보호하고, 또한 관료에 의한 횡령의 악폐를 없애며, 불량배가 행상을 가장하여 보부상의 상업상의 신의를 손상시킨 경우 경찰권을 발동하여 조사시켰다.

보부상은 외부인에 의한 피해를 없애기 위해 동료가 아니면 시장출입을 금지시켜 일종의 전매특권을 행사하고 또한 시장세(市場稅)의 징수권을 보유하였다.

이와 같이, 보부상은 그 조직과 단결을 기반으로 제반 특권을 보장받고 관권과 결탁함으로써 상권을 장악하였을 뿐 아니라, 조선 말기에는 정치세력에 이용되기도 하였으나, 1910년 이후 일제는 경제적 독자성을 가진 이 애국 상업단체의 말살을 도모함으로써 전국의 보부상은 거의 소멸되었다.

중국과의 교역은 조공과 그것에 대한 사여의 형식으로서의 공무역과 사신 수행원에 의한 책문개시(柵門開市) 등에서 행해지는 사무역이 중심이었다.

일본 · 여진 · 류큐(琉球) · 남양 등의 지역과는 진상(進上)에 대한 회사(回賜)라는 형식의 공무역과 북의 북관(北關) 중강(中江), 남의 왜관(倭館)에서의 개시 또는 호시(互市)의 민간무역이 있었다.

특히, 중국과의 무역에 있어서의 공무역은 중국의 수탈에 의한 국내수공업 중에서도 광업 및 철공업에 큰 타격을 주었으며, 사무역은 우수한 중국제품이 수입되어 국내 직물수공업에 큰 충격을 주었다. 이와 같은 중국과의 무역의 불균형성은 결국 조선의 상업발달을 저하시킨 중요한 요인의 하나가 되었다.

1876년 강화조약의 체결을 계기로 영국 · 러시아 · 미국 · 독일 · 이탈리아 · 프랑스 · 오스트리아 · 벨기에 등의 제국도 각각 그와 같은 통상조약을 당시의 조선정부에 강요, 체결한 결과, 원산 · 인천 · 서울 · 평양 등 14개의 도시와 요항(要港)이 새로 통상지로 개방되었다.

처음은 구미제국이 일본보다 압도적인 우위를 차지하고 있었으나, 중국 · 인도 · 남양 등 후진 여러 나라에서 전개된 식민지 쟁탈전은 구미 선진제국의 경제적 · 군사적 투쟁을 더욱 격화시켜, 이에 따라 우리 나라에 대한 친입기세는 한때 소외됨으로써 우리 나라에 대한 우위는 점차 청 · 일 양국 간의 각축으로 발전되었다.

그러나 1895년 청일전쟁의 종료와 더불어 조선에서의 일본의 경제적 · 정치적 세력은 더욱 확충되고, 무역관계도 더욱 일본측에 유리하게 전환되었다.

이와 같은 현상은 일본인 거류민 및 상관(商館)의 급격한 증가로 나타났을 뿐 아니라 이들은 청국인이나 구미인들처럼 다만 통상지서의 상품매매에 종사하는 데 그치지 않고, 상품판로의 확장을 목적으로 하는 계림장업단(鷄林奬業團) · 한일장업회 등 각종 행상단체를 조직하여 도읍은 물론 벽촌에 이르기까지 편력하였다.

또한, 우리 나라에 대한 자본 수출면에도 계지아문(界地衙門)이 설치된 1898년 이전에 이미 일본은 착실하게 그 지보(地步)를 굳히고 있었다. 가령, 1893년 당시의 일본 금융기관 진출을 보면, 우리 나라에서의 지점 및 출장소 수가 제1은행 121개 소, 제58은행 5개 소, 제18은행 6개 소 등이 설치되어 활동하고 있다.

반면, 구미자본에 의한 금융기관으로서는 1897년 홍콩은행과 상해은행의 대리점이 인천에 개설되어 있으나, 그 거래는 인천에 재류하던 2, 3개 소의 양상(洋商)과 청국에 국한되어 있었고, 1899년에 개설된 한로은행도 그 뒤 곧 폐쇄되었다.

그 밖에 우리 나라 사람에 의해 경영된 은행으로는 1894년 이래 조선한흥은행 · 제국은행 등이 창업해 있었으나, 설립 후 1년이 채 못되어 폐쇄하기에 이르렀고, 1899년에 개점한 대한천일은행과 1903년에 설립된 한성은행만이 겨우 운영되고 있었으나 그 실상은 매우 미미한 것이었다.

요컨대, 문호개방 이전의 조선상업계는 도고(都賈) 상업체제가 이것을 지배하고 있었으며, 도고자본이 당시의 대표적 토착자본으로서 발달하고 있었다.

그것은 특권상업체제 및 매점상업체제이며, 따라서 1876년에 시작된 정부의 문호개방정책은 상업계에 큰 변화를 가져 오게 하였으니, 그것은 상업의 자유로운 발전을 위하여 이미 18세기 후반부터 일기 시작한 도고상업체제의 해체작용을 본격화시켰다.

그리고 이것은 크게 두 가지 측면에서 전개되었으니, 그 하나는 국내의 개화파 정치세력에 의한 것이며, 다른 하나는 외래자본에 의한 것이었다.

김옥균(金玉均) 등의 개화파가 갑신정변 후 발표한 14개 조의 정강 중에는 혜상공국혁파사(惠商公局革罷事)가 있으나, 혜상공국은 정변이 일어나기 한 해 전인 1883년에 설치된 보부상단체이며, 당시의 보수적 정치세력에 의하여 개화파세력을 견제하는 데 이용된 특권상인단체였다.

그러므로 혜상공국을 폐지하여야 한다는 것은 전통적 특권경제체제를 해체하여 근대적 경제질서를 수립하려는 조치였다고 할 수 있다.

한편, 개항 후 국내에 침투한 외국상인자본에 의한 도고상업 해체작용도 집요하게 전개되었으니, 국내의 각종 도고는 그들 외국상인이 국내산품을 국외로 반출하는 것을 저해하였고, 또한 그들이 자국상품을 조선에 반입하여 판매하는 데 여러 가지 제약을 가했으므로, 외국상인에 의한 도고체제의 해체작용도 강력한 것이었으며, 특히 일본과의 무역이 본격화한 1880년대부터는 더욱 그러하였다.

도고상업체제는 국내상업에서 특권상인을 옹호하는 체제이며 자유상업의 발전을 저해하는 것으로서, 상업의 근대적 발전을 위해서는 지양하여야 할 것이로되, 한편 개항 후에 는 외국상품의 과도한 유입과 국내 자원의 무제한 유출을 제지하는 구실을 하였던 것이다.

개항 이후 조선의 상업계에는 회사를 설립하여 근대적 상업체제를 발전시키려는 움직임이 태동하였다. 그것은 첫째로 문호개방 이후 개화주의자들이 ≪한성순보≫ 등을 통하여 회사설립의 필요성을 강조하였고, 둘째로 개항장이나 서울에 들어온 세창양행(世昌洋行) · 이화양행(怡和洋行) 등 외국인상사의 영향을 받았으며, 셋째로 조선 정부가 객주 · 보부상 등 전통적인 상인들을 통제, 보호하고, 그 조직을 근대적인 것으로 개편하기 위하여 혜상공국 등의 상인단체를 만든 것에 자극을 받았다는 것 등 세 가지 측면에서 생각해 볼 수 있다.

≪한성순보≫에 의하면 1884년경 이미 합자회사인 장통사(長通社) · 연무국(烟務局) · 보요사(保要社) · 혜상국(惠商局) 등이 설립되어 있었고, 정부는 계속 회사의 설립을 장려하였다.

그러나 이 시기에는 정부의 도고해체정책으로 의지할 곳을 잃은 종래의 도고자본이 정책전환에 편승하여 회사를 설립하는 경우가 많았다. 즉, 대부분의 회사는 도고자본을 기초로 설립된 것으로, 종래의 도고가 가지고 있었던 상업상의 특권을 그대로 보유하였던 것이다.

따라서, 대한제국시대의 회사 문제는 종래의 도고체제를 근대적 회사체제로 전환시켜 상업을 발전시키기 위하여 각종의 경제외적 침해를 저지하고 그것을 보호하는 한편, 종래의 도고가 가지고 있었던 특권이 이들 회사에 전승되지 못하도록 하는 점에 있었다.

대한제국시대는 자본주의 열강의 침략이 제국주의 방식으로 전환되는 시기로서, 이와 같은 현상이 구체적으로 표출된 것이 외국상인의 국내 상업권의 확대이다. 즉, 개항 당시 개항장 일원에 한정되어 있던 외국상인의 상업권이 점차 내륙지방으로 확대되어 갔으며, 특히 국내상업이 행상 단계에서 정착상인화하고 내륙지방의 주요 도시에 상점을 개설하는 데 이르렀다. 이것은 나아가서 그들에 의한 토지 · 삼림의 매점행위로 발전되어 갔다.

일제강점기의 상업

1910년 일제의 강점 이후 이른바 초기 식민지시대의 10년간은 일제의 무단정치가 강행된 상황에서 통감부시대의 경제양상이라고 할 수 있는 상업 · 운수업 · 금융업 등 유통 부문이 활기를 띠고 있었고, 일본인 진출의 급격한 증가와 조일무역의 확대로 특징지을 수 있다.

가령, 일본인의 우리 나라 진출은 1909년 14만7000여 명이었으나 1920년 말 34만7000여 명으로 증가하였으며, 이것은 한일간의 무역 확대와 더불어 조선총독부가 우선적으로 도로 · 철도 · 항만 시설의 확충을 꾀하게 된 것이다.

또한, 이 시기에 조선총독부가 역점을 둔 사업은 조선은행 · 지방금융조합 및 농공은행을 개편한 조선식산은행 등 국영은행을 통해서 우리 나라의 금융을 통제하고 동양척식회사 등 국영회사를 설립, 확충함으로써 우리 나라의 경제 분야를 지배하고자 한 것이다.

1920년 말 당시, 우리 나라의 기업회사는 도합 544개이며, 그 중 414개가 일본인회사로서, 전체 회사 수의 76.1%, 불입자본의 비율은 83.1%를 차지하고 있다. 이에 대해 우리 나라 사람이 경영하는 회사는 겨우 99개로 전체 회사 수의 18.2%, 자본비율은 10.5%에 불과하였다.

한일합작회사는 29개로 사수(社數)의 비율은 5.3%, 자본비는 5.2%이고, 외국인회사는 2개였다. 일제강점기의 회사활동은 거의 모두가 일본인자본에 의해 점거되었던 것이다.

이와 같은 참상은 ‘조선회사령’에 의하여 한국인에 의한 근대적 기업활동은 억제되었고, 또한 정책금융에서 완전히 소외됨으로써 활로를 찾을 길이 없었다. 그러나 1912년부터 각 지방도읍에서 민족의 지주자본과 상인자본의 합작에 의한 지방은행의 설립이 두드러진 특색으로 나타났다.

즉, 1912년 구포(龜浦)에 경상남도의 대지주 윤상은(尹相殷) 일가와 구포의 거상 장석만(張錫萬) 등이 주동이 되어 구포은행을 설립했고, 1913년 대구은행 · 호서은행, 그리고 1918년 동래은행 · 북선상업은행, 또한 1920년 호남은행 · 삼남은행 · 경일은행 등이 설립되었다.

1920년 4월 1일 ‘조선회사령’이 폐지되었다. 제1차세계대전중 비약적 발전을 이룩한 일본경제는 대전 후 대외무역의 부진과 함께 전시중 과도하게 건설되었던 일본공업이 불황에 접어들어 공장은 폐쇄되고 실업자는 날로 늘어났으며, 쌀값은 앙등하여 1918년 드디어 쌀소동이 발발하게 됨에, 여기에 따른 사회적 불안을 타개하고자 일본정부는 유휴자본과 실업자를 우리 나라에 방출하고자 식민지정책을 전환하게 된 것이며, 이것이 바로 ‘조선회사령’ 폐지의 계기가 된 것이다.

이에 따라 1921년 당시 우리 나라 안의 기업회사는 728개 사, 자본액 1억9990여만 원이었던 것이, 회사령이 폐지된 10년 후인 1930년 회사수 2,897개 사, 자본액 3억3100여만 원으로 급격히 증가되고 있다.

이와 같은 현상은 우리 나라 사람에 의한 회사설립에서도 찾아볼 수 있으니, 1920년 말 당시 우리 나라 사람이 설립한 회사 수는 99개 사였으나 1929년 말 362개 사로 약 4배가 증가하고 있다.

일본의 만주침략과 더불어 일본 자본주의는 외연적으로 급진적인 확대를 가져왔고, 여기에 따라 우리 나라의 공업화도 본격적으로 추진되었다.

1938년 말 당시 우리 나라의 회사 총수는 5,413개 사이며, 그 중 우리 나라 사람이 경영하는 회사 수는 2,278개 사로 전체 회사수의 42%이며, 불입자본액은 총액 10억8128만2000원 중 우리 나라 사람이 경영하는 회사는 1억2266만1000원으로 11%에 불과했다. 1929년의 20.5%와 6.3%에 비하면 매우 높아졌다고 할 수 있으나 그 영세성은 여전하다.

우리 나라 사람이 경영하는 회사를 업종별로 보면 수적으로는 상업회사가 37.2%로 제1위를 차지하고, 다음이 공업의 32.5%, 제3위는 운수 · 창고업의 11.3%, 제4위는 잡업의 8.5%, 제6위는 금융 · 보험업의 4.5% 등의 순으로 되어 있다. 잡업이란 출판업 · 신문업 · 부동산업 · 청부업 등을 포함한 것이다.

1937년 일본이 중국 본토 침략전쟁을 감행함과 더불어 모든 기업활동은 전시 경제체제로 개편되었고, 1940년에 접어들어 전세가 불리하게 되자 조선총독부는 국책회사를 설립하고 민간기업체를 이에 통합한다는 방침을 세웠다.

1942년에 발포된 ‘중소기업정리령’은 특히 우리 나라 사람이 경영하는 기업체를 정리대상으로 한 것이며, 이에 따라 민족자본이 더욱 위축되었다.

요컨대, 일제강점기의 상업은 초기단계에서는 오로지 일본 공업발전을 위한 식량 및 식료품공급시장으로 작용하였고, 일제 침략전쟁 단계에서는 그 전쟁수행을 위한 병참기지로서 일관하였으니, 우리 나라 상업의 번창이나 현대화는 봉쇄되었던 것이다.

일제는 일찍이 1878년부터 제1은행지점을 부산에 설치하여 식민지경영의 전초병으로 삼았고, 1893년도 당시 우리 나라 안에 지점 및 출장소 수가 제1은행 121개 소, 제58은행 5개 소, 제18은행 6개 소 등에 이르고 있다.

강점 후 조선은행 · 조선식산은행 · 동양척식주식회사 등의 강력한 금융지원 아래 우리 나라 전역을 통하여 상권을 완전히 장악하였으며, 더욱 재빨리 미쓰코시(三越) · 미나카이(三中井) 등의 현대식 백화점이 주요 도시의 요지에 자리잡고 그 위세를 유감없이 발휘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우리 나라의 상업은 향촌벽지에 몰려 초라하고 영세한 잡화점 정도에 지나지 않았고, 서울에서조차 전근대적 상품인 모직물 · 포목 · 유기 · 식기 · 패물(貝物) · 건어물 등을 늘어 놓은 소전포만이 한산한 모습을 드러내 놓고 있었다.

1931년에 들어와서야 처음으로 우리 나라 사람이 경영하는 화신백화점이 출현하여 일본계 백화점과의 집요한 경쟁에 시달리다가 광복을 맞이하게 된 것이다.

광복 이후의 상업

일반적으로 근대적 생산양식이 전개되고 산업의 고도화가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공업의 발전과 더불어 거기에 따른 상업이 발전되어야 하고, 따라서 상공인구의 증가는 서로 연관관계에 있는 것이며, 이것은 농촌인구의 감소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 나라의 농림수산업의 인구비율은 1940년 77.8%이던 것이 1949년 79.9%로 오히려 증가하고 있고, 광공업 부문의 인구비율은 1940년의 5%에서 1949년 3.7%로 감소되고 있다.

특히, 우리 나라의 인구는 1944년에서 1949년의 5년간에 430만 명이 증가하여 그 증가율은 29.5%가 되며, 더욱 6·25전쟁 후 약 150만 명의 북한동포가 월남해 옴으로써 남한의 인구는 급격한 증가를 이루고 있다.

그러나 이와 같이 증가한 인구를 농업이나 공업과 같은 생산 부문에서 좀처럼 흡수하지 못하였으니, 결국 상업은 증가한 인구를 흡수하는 저수지 구실을 하여 왔다고 할 수 있다.

그들은 소액의 자금을 밑천삼아 이른바 장사를 함으로써 최소한의 생계를 유지하여 왔다고 할 수 있다. 선진국에서 상업인구의 비율이 큰 것은 그 나라들의 경제구조가 고도화된 필연적인 것이다.

그러나 우리 나라에서 상업인구의 비율이 크다는 것은 농업이나 광공업과 같은 생산활동 부문의 인구흡수능력이 둔화됨으로써 잠재실업의 비율이 증대되고 있다는 반사적인 표시라고 할 수 있었다.

이와 같은 현상이 1945년 이후 1960년까지 혼란기경제에 있어서의 우리 나라 경제의 실상이며, 상업도 현대적 체모를 갖추지 못한 영세한 구멍가게식 또는 행상적인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제2단계에 접어들면서 1962년 이후 경제개발계획이 시행되면서 상업관계법규도 정비되고 새로운 <상법>도 시행되었으며 수출주도형 경제발전정책에 따른 무역열도 왕성하여 현대적 규모를 갖춘 상업이 급속히 발전하였다.

가령, 1963년 5월 당시 국내 주요상업관계기관을 보면, 은행 9개, 보험회사 20개, 창고회사 6개, 해운회사 19개, 증권거래소 1개, 주요 백화점 16개, 상공부등록 무역회사 795개이고, 1962년 12월 1일 당시 상업인구(매매업 · 운수통신업 · 보관업 · 서비스업)는 194만8414명으로 되어 있다.

경제의 발전에 따라 경제의 서비스화가 이루어져 간다. 이것은 총 취업인구 중 상업의 비중이 높은 서비스산업에 종사하는 노동력의 비중이 확대되고, 국민총생산액에서 서비스산업의 비중이 높아지며, 국민의 총소비 중에서 서비스산업에 대한 지출이 상승하는 등, 서비스의 경제적 가치가 커진다는 것을 뜻한다.

또한, 국민생활의 수요변화나 환경변화에 대응하는 제품의 차별화 · 전문화 · 고급화 · 고부가가치화 · 기술집약화 등의 경향이 두드러지고, 제조과정에서 창조력 · 기술개발력 등의 중요성이 높아짐에 따라, 제조업의 중간투입에 상업의 비중이 높은 서비스업의 투입비율이 높아져 간다는 것을 뜻한다.

서비스산업을 광의의 상업관련산업으로 볼 때 부가가치면에서는 1985년 현재 국민총생산액의 44.1%를 차지, 농림 · 어업의 13.5%, 광업 · 제조업의 29.7%를 상회하고 있으며, 고용면에서는 전기 · 가스 · 수도사업을 포함하여 총 근로자 수는 665만1000명으로 1964년의 201만8000명에 비하여 3배 이상 증가하여, 전 산업근로자의 44.5%를 차지하고 있어, 1970년의 32.3%에 비하여 크게 확대되고 있으나, 이를 1차산업과 2차산업의 생산력에 바탕을 둔 정상적인 성장이라고 보기에는 난점이 있다.

1985년을 기준으로 상업관련산업의 주요 부문별 구조를 보면, 생산면에서 도매 · 소매 및 음식 · 숙박업이 12.9%로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으며, 그 다음은 운수 · 창고 · 통신업의 8.2%, 사회 및 개인서비스업의 3.5%순으로 되어 있다.

부가가치 생산액의 성장추이는 1970∼1980년간은 운수 · 창고 · 통신업, 금융 · 보험, 부동산 및 용역업의 성장폭이 비교적 컸으나, 공공서비스 부문, 사회 및 개인서비스 부문은 성장이 부진하였다.

그러나 1980년대에 들어서서는 각 부문이 고루 고도성장을 이룩하여 가고 있다. 1985년 당시 고용면에서는 도매 · 소매, 음식 · 숙박업이 전 산업취업자의 22.6%를 차지함으로써 많은 근로자를 고용하고 있다.

경제발전에 따라 상업이 현대적 면모와 체제를 갖추고 장족의 발전을 하여 왔으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1·2차산업의 성장에 의해 뒷받침되어야 하고, 경제성장에 따른 생활수준의 향상으로 소비성향이 확대되고 고급화되는 경향은 피할 수 없다 하더라도, 경제성장의 과정에서 발생한 소득격차의 심화, 도시화의 급속한 진전 등으로 향락성 · 사치성 · 소비성향이 상당히 높아지고 있어, 이와 관련된 상업부문의 건전화를 유도하여야 할 것이다.

그 동안의 고도성장에 따라 1995년 우리 나라의 국내총생산(GDP)은 4490억 달러로 세계 주요국 중 11위, 1인당 GDP는 9995달러로 28위를 기록하였다. 우리 나라의 GDP는 미국의 6.2%, 일본의 8.8% 수준이며 1인당 GDP은 일본의 4분의 1 정도인 24.5%, 미국의 36.6% 수준에 머무르고 있으나 광복 50년간에 한강(漢江)의 기적을 이룩하면서 경이적인 발전을 거듭하여 왔다.

산업구조를 보면 국내총생산에서 1960년에 농림어업 비중은 36.8%를 차지했으나 1995년에는 6.6%로 낮아진 반면에 광공업은 15.9%에서 27.2%, 사회간접자본 및 기타 서비스업은 47.3%에서 66.2%로 크게 높아지고 있다.

이러한 추세에 따라 산업별 고용구조도 지난 1947년 조사에서 15세 이상 취업인구 1080만 1000명 중 45.7%인 493만 2000명에 달했던 농림어업 종사자가 1993년 말에는 14.7%인 282만 8000명에 불과하였다.

이에 비해 광공업은 470만 4000명으로 24.4%, 사회간접자본 및 기타 서비스업은 1172만 1000명으로 60.9%의 비중을 보이고 있다.

이러한 고용구조의 변화는 1992년을 기점으로 더욱 늘어나는 과소비 추세와 이에 따른 소비재 수입증가로 지난 1994년에 사회간접자본 및 서비스업종의 증가가 현저해졌고 이것이 고용증가를 주도한 발판이 되었다.

이러한 현상은 1995년에도 이어져, 농수산 부분 인구는 4.6%라는 대폭 감소와 제조업 부분의 0.7%라는 미증(微增)과는 대조적으로 사회간접자본 및 서비스 부분에서는 5.8%의 큰폭의 증가를 기록하고 있다.

이것은 가령 1995년 한 해 동안 소비지출이 19만 8500원 늘어나 근로소득 증가액(18만 9000원)뿐만 아니라 가처분소득 증가액(19만 8200원)보다 많아 한계소비성향은 1백2%를 기록하였고, 특히 외식비는 가구당 평균 14만 1100원으로 전년도의 같은 기간보다 22.7% 증가하였고, 소비지출 전체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10%에서 10.4%로 높아졌다.

교통통신비에도 자가용 구입 증가와 수요 고급화로 1년 사이에 10만 8700원(56.6%)이 증가하였다. 또한 이동전화, 무선호출기, PC통신 등의 이용증가로 통신비 지출이 22.3% 늘어나 교통 · 통신비가 가계지출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11.1%에서 13.1%로 높아지고 있다. 교양 · 오락비도 단체여행 지출이 늘어나면서 17.5%가 증가하였다.

즉 1인당 GNP는 1만 2000여 달러, 차량 수는 1000만대 시대를 맞이하여 소비구조의 다양화와 고급화의 급격한 확산은 3D업종 기피현상과 맞물려 서비스업의 팽창으로 연결되고 가요주점 · 노래방 · 음식점 · 각종 음식체인점 · 숙박업 · 유흥업 등의 증가를 가속화하고 있다.

더욱 최근 들어 대기업의 무차별 유통업체의 참여, 가격파괴를 앞세운 선진국형 할인전문점 등의 새로운 영업실태가 등장, 갈수록 소매시장 점유율이 높아 가고 있다.

이것은 반비례적으로 특히 지방 영세유통업체들을 압박, 생존을 위협하고 있어 새 흐름에 대비하여 단가를 낮추고 서비스개선 등 운영 합리화방법의 모색이 시급한 단계에 와 있다.

그 한 예를 미국 시카고 소재 슈퍼마켓 체인인 도미니크의 물류센터에서 찾아 볼 수 있다. 그 동안 지역의 도매상을 통해 물품 배송을 받아온 도미니크는 점포수 확대로 공동배송이 유리하다는 판단 아래 직접 물류센터를 운영, 원가를 낮추어 판매량을 높이고 있다.

즉 미국 내 주요 소매업체 체인점들은 스스로 물류센터를 가동하여 중간 도매단계를 배제, 상품가격을 인하하고 기존의 시설에 냉동 · 냉장 시스템도 추가로 설치하는 등 서비스개선에 힘쓰고 있다.

이러한 추세에 대응하여 도매업자들도 살아남기 위한 새로운 방향전환이 불가피하게 되었고 그 한 방법이 해외 진출이다. 미국 내 주요 도매상 가운데 최소 20군데 이상이 동유럽, 동부아시아 등에 진출을 계획하고 있고 이중 상당수가 한국 지역 내 대기업들과 접촉, 진출을 꾀하고 있다.

무한경쟁을 의미하는 세계 단일시장의 세계무역기구(WTO)체제에서 미국 · 일본은 물론 유럽계 업체들이 몰려오게 되면 국내 영세유통업체들의 처지는 더욱 어려운 국면으로 접어들 수밖에 없어 생존전략으로서의 대책이 시급한 과제로 제기되고 있다.

국내상업의 이 같은 발전과 변모는 국제상업과 긴밀한 연관관계에 있다. 광복 후 무역 50년, 그 동안 농경 위주의 우리 경제가 활력 넘치는 신흥공업경제로 탈바꿈하는 과정에 무역팽창의 역할은 바로 그 중심적 위치에 있었다.

1950년대를 통해 수출은 대체로 3000만 달러 미만에 머물다가 1962년 5000만 달러를 약간 넘는 수준이었고 이 기간에 수입은 대체로 3억∼4억 달러 정도였으나 그 70% 정도가 미국의 원조로 조달되었다.

그러나 1963년부터 수출은 폭발적이라 할 만큼 빠른 속도로 증가하였다. 1962∼1972년의 경상기준 증가율은 매년 평균 40%, 또는 상품구성도 급변하여 종래 1차산물과 식료품이 대종을 이루다 1963년 후 공산품 비중이 빠르게 증가, 10년 만에 총수출의 8할을 점하는 성과를 거두고 있다. 이 공산품들은 합판 · 의류 · 가발 · 신발 등 노동집약적인 경공업제품이었다.

수출시장도 1960년대 초까지만 하더라도 대일(對日)수출이 총수출의 60% 이상을 차지하였으나 그 뒤 대미(對美)수출이 급증해 1970년대 초에는 총수출의 약 반을 점하고 있었다. 1970년대에도 수출증가율은 연평균 35%로 높은 수준을 유지함과 동시에 상품구성도 TV, 음향기기 등 전자제품을 주축으로 하는 기계류 비중이 점차 높아져 1980년대 초에는 경공업과 중공업의 비중이 각각 40%에 달하였다.

그 뒤 그간의 성장으로 자본과 기술이 축적되고 국내 임금의 상승으로 우리 나라의 비교우위가 점차 자본 및 기술집약도가 높은 산업으로 이전되어 감으로써 중공업의 비중이 높아짐과 동시에 전자제품 중 소비재제품보다는 반도체 등 산업용 비중이 커지고 있다.

수출시장도 지속적으로 다변화돼 선진국과 개도국에 대한 수출비율은 1970년대 중반 약 8:2였던 것이 1980년대 이후 동남아 및 중국에 대한 수출증가로 약 6:4로 바뀌고 그 추세는 계속되고 있다. 수입도 매우 빠른 증가를 보여 1962∼1972년 사이 평균 20% 증가하였고, 1972∼1982년에는 25%, 1982∼1994년에는 13%의 증가율을 보이고 있다.

광복 반세기 교역은 3만 배가 증가하였고, GNP는 250배가 증가함으로써 경이적인 발전을 거듭해 왔다. 특히, 우리 나라를 비롯한 동아시아 4개국이 신흥공업국(NICs)으로 부상함에 따라 선진국이 공산품을 생산하고 후진국이 농산물이나 광물을 생산하여 교환했던 종래의 세계무역 패턴을 깨고 NICs가 중요 공산품 수출국으로 등장함으로써 세계사적 의의를 창출하게 된 것이다.

이것은 더 나아가 세계시대의 개막을 의미한다. 즉 과거의 여러 무역장벽을 타파하고 NICs에 있어 세계시장이란 경쟁력 있는 상품만 생산할 수 있다면 무한한 구매력을 가지고 있고 수출품생산에 필요한 원자재 · 자본재 · 생산기술 · 자본 등을 모두 조달할 수 있는 장(場)이 된 것이다.

세계무역기구(WTO)의 출범으로 세계화현상이 급진전되고 세계시장의 통합이 가속화되고 있다. 우리 나라는 1994년 12월 17일 WTO 가입 비준 동의안을 처리함으로써 무한경쟁의 세계 단일시장으로 뛰어들게 되었다.

국제교역 질서가 더욱 자유화 · 개방화되고 제조업은 물론 농수축산업, 금융보험, 증권, 해운, 정보통신, 지적소유권 등 모든 산업과 상품 · 서비스 등이 자유화의 대상이 된다.

세계시장을 하나의 단일시장으로 묶는 국경 없는 지구촌 경제시대가 열리게 된 것이다. 통합되는 세계 경제시장에서 경쟁력을 갖추고 무한한 가능성에 도전하면서 이 장(場)을 활용할 수 있는 자세와 준비를 갖추는 것이 우리 사회가 당면한 최대의 과제인 것이다.

그러나 지금 세계는 다른 한편 지역무역협정의 파도 위에 직면하고 있다. 요새(Fortress Europe)로까지 불리는 유럽 단일시장이 1993년 초에 출범한 이래 유럽연합은 계속 심화해 가는 과정에 있고, 1994년부터 시행에 들어간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은 칠레 등 남미까지 그 영역을 확대해 나가고 있다.

남미에서는 브라질 · 아르헨티나 · 우루과이 · 파라과이 4개 국을 묶는 남미공동시장(MERCOSUR)이 1995년에 가동되었고, 칠레와 베네수엘라가 참여하고 있다.

아세안(ASEAN)은 2003년까지 아세안자유무역지대(AFTA) 창설을 계획하고, 1997년 7월 24일 미얀마 · 라오스 · 캄보디아를 끌어 들인 ‘아세안10’이 동남아시아 경제권의 출발을 선언하고 있다. 1967년 동남아시아국가연합(ASEAN)을 창설한 이래 최대 염원이었던 10개 국 체제가 실현된 것이다.

관세와 무역에 관한 일반협정(GATT) 창설 이래 1995년까지 모두 109건의 지역무역협정이 GATT에 통보되었고, WTO 발족 이후 31건이 통보되었다. 종전에는 관세인하에 초점을 두던 지역협정들이 이제는 각종 비관세장벽, 서비스, 지적재산권 등을 폭넓게 수용하고 있다.

지난 1989년 역내경제협력 및 무역증진을 목표로 호주 캔버라에서 대화의 장(場)으로 태동한 아시아 · 태평양경제협력체(APEC)는 그 뒤 1993년부터 매년 정상회담을 개최해 오고 2010년, 2020년을 역내무역 및 투자자유화의 목표연도로 설정해 놓고 있다.

현재 전세계 인구의 38%(21억 명), 전세계 면적의 25%(4066만㎢)를 보유하고, 역내국가간 교역량에 있어서도 세계의 40%를 차지하고 있는 유럽연합(EU)보다 약간 웃도는 42%를, 또 역내국가간의 교역 의존도가 66%로 회원국들간의 결합촉진의 발판이 확고한 APEC은 그 목표가 달성될 경우 동아시아와 북미(北美)를 잇는 세계최대의 경제공동체를 형성하게 된다.

이제 무차별원칙에 입각한 세계무역 자유화는 WTO체제의 목표와 지역주의의 상관관계를 심각하게 다루어야 할 시점에 선 것이다. 양자는 상호 보완적인 관계로 조정되어야 하나 충돌의 소지도 남아 있다.

WTO 사무총장은 지역주의는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범세계적 무역자유화라는 WTO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수단으로 작용해야 한다고 주장한 바 있다. 지역주의가 다자간 무역체제 강화에 기여하도록 각국이 노력한다는 당위적인 공동목표가 설정되고 실현되어야 하는 것이다.

오늘의 하루는 과거 10년간의 변화와 맞먹는 변화를 이룩하고 있으며 그것은 현재 더욱 가속화되어 가고 있다. 지금은 인터넷 전자상거래 자유화가 신무역라운드로 급부상하고 있으며 ‘인터넷 IBM 같은 선도기업과 아주 작은 신생기업에 공히 무제한 판매망을 열어주는 창(빌 클린턴 미국대통령)’이 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인터넷 속에서 인도(引渡)까지 완료, 관세를 내지 않는 디지털 형태의 상품 및 서비스 규모가 급신장하고 있는 것이다. 소프트웨어를 비롯, 게임 데이터베이스, 뉴스 컨설팅 등이 거래되고 있고, 금융 · 음악 · 영화 등도 인터넷 매장에 등장할 채비를 갖추고 있다.

인터넷 상거래는 인터넷이라는 사이버 스페이스를 통해 상품과 서비스를 사고 파는 새로운 교환방식이다. 가상공간에서 거래가 행해짐에 따라 무역업체나 신용장이 필요 없고 전세계를 상대로 한 동시다발적인 거래도 가능하다. 1997년 7월의 인터넷을 통한 교역규모는 연간 5억 달러에 불과하나 2000년에는 무려 6000억 달러에 이를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

전자상거래의 자유화가 이룩되면 세계무역의 기존 패러다임이 크게 바뀌고 장기적으로는 상품교역의 무관세 원칙이 일반화할 것이다. 이제 인터넷 상거래는 거스를 수 없는 대세가 되고 있다. 무역과 유통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금융 · 서비스 · 제조업도 예외는 아닌 것이다.

우리 나라를 포함한 39개국은 1997년 3월 말 컴퓨터 통신, 소프트웨어 등 정보상품에 대한 관세를 2000년 말까지는 철폐하기로 하는 정보기술협정(ITA)에 서명하였다.

그러나 우리 나라는 소프트웨어나 데이터베이스 부문에서 팔릴 만한 디지털 상품과 서비스를 축적하지 못하고 있다. 특히 미국 중심의 영어가 공용어인 인터넷에서의 무관세 상거래는 인터넷 주변국인 우리 나라에서는 무역역조를 의미한다.

이제라도 정보혁명에 대비하는 통신인프라의 확충, 인터넷거래의 기반구축, 거래 표준화의 소비자보호 방안 등을 서둘러 차질없이 마련해 나가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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