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0년대 초 사회주의운동의 조직이 급속히 확대되어가자, 상해의 민족주의운동계열은 그 역량을 강화시키기 위해 노력하였는바, 기존 상해한인애국부인회를 상해한인여자청년동맹으로 확대개편을 꾀한 것도 그것의 하나였다.
그런데 상해한인애국부인회의 일부회원들이 상해한인애국부인회가 10여년의 역사를 가진 단체이며, 더욱이 여자청년동맹이라는 단체명은 받아들일 수 없다며 이에 반대함에 따라 진통을 겪기도 하였으나, 마침내 1930년 8월 발족을 보게 되었다.
임원은 집행위원장 김윤경(金允經, 일명九經), 위원 김순애(金順愛)·박영봉(朴英峰)·이운선(李雲仙)·연충효(延忠孝)였다.
1931년 7월 만주의 한인농민과 중국인농민이 충돌한 만보산사건(萬寶山事件)이 발생, 한중관계가 위기에 놓이자, 이에 대처하기 위해 상해에 있는 독립운동단체들이 조직한 상해한인각단체연합회(上海韓人各團體聯合會)에 참여하여 활동하였다.
한중 양 민족의 연합전선을 구성하여 일본제국주의를 타도하자는 내용의 상해한인각단체연합회 명의의 성명서발표에 참여하고, 연합회 활동자금모금을 담당한 것이 그 것이다.
한국독립당의 여자청년부문단체로 활동하였고, 1933년 3·1운동기념일에는 ‘친애하는 혁명동지 각위에게’라고 앞머리에 쓰고 ‘제14주년 3·1기념에 제(際)하여’라고 제목을 붙인 성명서를 발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