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마을운동 (새마을)

사회구조
사건
1970년부터 시작된 범국민적 지역사회 개발운동.
• 본 항목의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통해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정의
1970년부터 시작된 범국민적 지역사회 개발운동.
개설

근면 · 자조 · 협동의 기본 정신과 실천을 범국민적 · 범국가적으로 추진함으로써, 국가발전을 가속적으로 촉진시키려는 목적으로 진행된 운동이다.

새마을운동에 대한 정의는 논자에 따라 매우 다양하다. 그리고 다른 모든 기획적 사회변동계획과 마찬가지로 새마을운동도 발의 이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상당한 변화과정을 거쳤다.

첫째 범주의 정의는 한국고유의 농촌통합개발의 성공적인 유형이라고 보는 것이다. 새마을운동이 상대적으로 낙후되어 있던 농촌지역을 획기적으로 개발하면서 발의되었기 때문인데, 오늘날 이른바 농촌새마을운동이라고 구별되고 있다. 그런데 국제적으로는 여전히 새마을운동이 통합농촌개발유형, 즉 농촌새마을운동으로 이해되고 있다.

둘째 범주의 정의는 새마을운동이 도시지역에도 확대되어 이른바 도시새마을운동이 전개됨에 따라 새마을운동을 지역사회개발적인 기본 틀에서 총체적인 국가발전을 위한 범국민운동이라고 보는 견해이다.

셋째 범주의 정의는 새마을운동이 범국가적인 지역사회개발의 본질을 지녔다고 보는 것이다. 새마을운동의 기본철학이나 접근 · 집행 방법 등은 지역사회개발사업의 그것에 직결되어 있으며 농촌 · 도시를 총망라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새마을운동은 논자에 따라 다양하게 정의된다. 특히, 새마을운동에 특별한 관심을 가진 전문가집단 사이에도 정의에 관한 합의는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으며, 따라서 새마을운동은 어느 이론에 의한 것이 아니라, 경험 또는 실천에 의한 것이라고 많은 사람들이 주장하고 있다.

분명한 것은 새마을운동은 정부의 절대적 지원으로 전국으로 확대되면서, 단순한 농촌개발사업을 넘어 공장 · 도시 · 직장 등 한국사회 전체의 근대화운동으로 확대 · 발전하였다는 것이다.

역사적 배경

1970년 초의 전국지방장관회의에서 박정희(朴正熙) 대통령은 농민, 관계기관, 지도자간의 협조를 전제로 한 농촌자조노력의 진작방안을 연구하라고 특별지시를 내렸는데, 이것이 새마을운동을 기획, 집행한 역사적 발단이 되었다.

농촌을 대상으로 한 새마을운동을 왜 국가원수가 직접 발의하였는가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지만, 공업화 우선 정책 하에서 당시 농촌이 후진성이 크게 드러났기 때문이라는 것이라는 견해가 많다. 그러나 비록 소수의 견해라 하더라도 북한의 ‘천리마운동’ 등에 반응한 냉전의 한 산물로 새마을운동을 보는 사례도 있다. 또한 당시의 경직된 국내정치상황에서 비롯된 긴장완화적인 정치적 조처라고 보는 이도 있다.

따라서 새마을운동의 발의 초기에 지식인들은 냉담한 반응을 나타내었다. 새마을운동은 주로 내무부의 계통적 관료에 의한 효율적인 동원편제에 힘입어 농촌인의 자각을 일깨우지 않은 채 하행적 · 일방적 · 충격적으로 시행되었다. 물론, 이와 같은 행정적인 개발계획은 새마을운동이 진척을 보임에 따라 지역주민과의 상호협동을 통해 본연의 것으로 발전되어갔다.

그리하여 새마을운동의 배태(胚胎) 또는 발의는 무엇보다도 국가원수의 정치적 의지의 실천과, 이를 효율적으로 가능하게 하였던 당시의 중앙집권적 정치 풍토, 그리고 내무공무원의 총동원에 의하여 실현되었다고 간주된다. 따라서 그 당시의 이른바 ‘10월 유신’은 새마을운동의 배태 또는 발의를 가능케 하였던 기본적인 선행 및 규제조건이라고 포괄적으로 보는 이도 있다.

전개과정

새마을운동은 전국적인 규모로 개별적인 자연촌락을 대상으로 하여 하행 · 하달된 사업지침에 따라 밀고나가는 것으로부터 출발하였다. 따라서 일사분란하게 전개하여 목표를 비교적 단기간 내에 성취할 수가 있었다. 이와 같은 사실은 적어도 민주국가에서는 보기 드문 일로 놀라움과 부러움으로 국제적 관심거리가 되었다.

보다 구체적으로 보기를 든다면, 주로 내무부 산하의 지방공무원 개개인에게 지역적인 사업추진을 분배하였으며, 이들은 새마을운동의 성취를 서약하는 상징으로 백지사표를 읍면장 또는 군수에게 제출하고 맡은 바 임지로 떠났다. 직업공무원으로서의 신분이 제대로 보장되어 있지 못했던 당시, 일선 공무원은 분배지정 받은 마을에서 지시받은 사업의 전개에 혼신의 노력을 다하게 되었다.

마을주민의 동기를 유발하여 소정의 사업을 실천하도록 하는 변화촉진자로서의 기술, 즉 사업전개기술을 가지지 못한 일선 공무원들은 “행함으로써 배운다.”는 말뜻처럼 시행착오도 겪으면서, 놀라울 정도로 마을지도자의 활용 등 이른바 집단동학(集團動學)의 실제를 터득하여 사업전개를 효율적으로 성취하였다. 이는 공무원으로서의 자리를 지키느냐 아니면 잃느냐의 사활을 건 노력의 성과였다.

다른 한편, 정부 당국에서도 뒤늦게나마 관련 분야 대학교수들을 중심으로 한 전문집단을 활용하여 새마을운동의 기획전개를 이론적으로 뒷받침하였다. 따라서 일반 개발사업의 기획전개와는 달리, 권위주의적 또는 행정적으로 목표지향적인 기획과 실천을 우선 명령하달식으로 발의한 뒤에, 이론적 · 실제적인 뒷받침을 행하고 공무원들을 훈련시키는 접근 방법을 취하였다.

농촌개발을 사업목표로 하고 출발한 새마을운동은 기본사업목표가 농촌지역에서 어느 정도 성취되었다고 평가된 뒤 도시지역, 즉 전국가사회의 개발운동을 기본목표로 삼도록 확대되었다.

애당초 새마을운동으로 출발한 것은 농촌새마을운동과 도시새마을운동으로 크게 범주화되었다. 즉, 총체적인 국민참여적 국가발전운동으로 기본적인 사업목표대상이 확대되었는데, 여전히 중점은 농촌새마을운동으로 여겨졌다.

새마을운동의 기본사업목표대상의 확대는 필연적으로 주요사업의 내용을 내적 및 외적으로 확대시켰다. 초기 새마을운동의 사업내용은 새마을운동사업의 고전적인 상징으로 되어 있다. 1970년 10월부터 1971년 6월까지의 겨울철 농한기를 이용하여 전국의 3만 3,267개 이동(里洞)에 시멘트를 335부대씩 무상으로 지급하여, 이동개발위원회(里洞開發委員會)를 중심으로 각기의 마을의 환경개선사업을 주민협동으로 추진하도록 하였다.

지붕을 볏짚 대신 슬레이트 또는 함석으로 대체 개량하는 사업, 담장 바로잡기 사업, 마을 안길 정비 사업 등이 주된 사업내용이었다. 1972년부터는 주민지도자의 발굴 · 훈련 및 그 활용에 역점을 두면서 사업내용도 애당초의 환경개선사업, 즉 물리적인 생활 및 영농기반조성사업의 발전적 추진과 함께, 전향적 의식계발사업, 그리고 생산소득사업 등을 포괄하는 종합적인 것으로 확대되었다.

도시새마을운동의 촉진을 위한 10대 구심사업은 소비절약의 실천, 준법질서의 정착, 시민의식의 계발, 새마을청소의 일상화, 시장새마을운동의 전개, 도시녹화, 뒷골목 정비, 도시환경정비, 생활오물 분리수거, 그리고 도시후진지역의 개발 등이었다. 이는 반상회의 새마을 모체화를 통한 지역적인 사업전개와 직장을 통한 사업전개를 주안으로 확대되었다.

그리하여 새마을운동은 지역새마을운동 · 부녀새마을운동 · 직장새마을운동 · 공장새마을운동 · 새마을청소년운동 · 새마을체육운동 · 새마을금고운동 · 학교새마을운동 · 새마을유아원운동 등으로 기본적인 틀 안에서 실천적으로 분화되었다.

한편 1980년 「새마을운동조직육성법」에 의하여 새마을운동중앙본부가 설립됨에 따라서 민간주도적인 추진조직으로의 정착을 위한 체제건설사업(體制建設事業)이 전개되면서, 새마을국민교육의 기획실시, 새마을운동에 관한 국내외 홍보와 국제협력, 그리고 새마을운동에 관한 조사 · 연구사업 등이 다각적으로 시행되었다.

그런데 새마을운동은 주민의 자조적이며 자발적 참여와 협동에 본바탕을 두었지만, 그의 전개는 관주도형이었다. 그리하여 민간주도형으로 전환, 토착화시키는 목적 하에 설립된 것이 새마을운동중앙본부인데, 이는 5단계적인 조직체계를 갖추었다.

즉, 중앙 · 시도 · 시군 · 읍면동 · 마을 등으로서 중앙수준을 보면, 새마을지도자중앙협의회 · 새마을부녀회중앙연합회 · 직장새마을운동중앙협의회 · 공장새마을운동추진본부 · 새마을문고중앙회 · 새마을청소년회중앙연합회 · 새마을조기체육회 · 새마을금고연합회 · 새마을교육연구기관 등 이른바 회원단체를 중심으로 하고 있었으며, 스스로의 행정조직기구를 지니고 있었다.

이는 시도와 시군의 수준에서도 계통적으로 조직되어 있었으며, 하위의 읍면동과 마을은 실천조직이었다고 볼 수 있다.

또한 새마을운동의 기본목적인 풀뿌리운동의 차원을 넘은 총체적 국가발전을 겨냥하는 성격이 심화되어, 정부와 기타 공공 및 민간적 기관과의 상호관계는 더욱 짙게 되었다.

하지만 자립적 · 민간주도적 발전으로의 전환을 꾀하던 새마을운동중앙본부는 방만하고 정치권력형적인 일탈적 운영행태로 1987년 말 본격적으로 문제가 되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새마을운동중앙본부는 ‘새마을운동중앙협의회’로 대체되었고, 기구조직도 대폭 정리 · 조정되는 진통을 겪었다. 이러한 시기를 지나 차차 발전적 개혁이 단행되었고, 필요한 제반조정을 과감히 시행하면서 사업계획이 집행되었다.

1988년 들어서면서 새마을운동은 자성적 평가와 자기갱생적 발전을 꾀하고자 하였고, 1989년 새마을운동센터를 만들어 도덕성 회복과 의식개혁을 내세웠다. 1993년에는 제2단계 새마을운동을 선포하고 다른 민간자원조직체와의 연계를 갖는 등 새로 태어나고자 하는 움직임을 보였다.

새마을운동 제창 41년 후인 2011년 국회는 「새마을운동조직 육성법」개정을 통해 4월 22일 ‘새마을의 날’을 국가 기념일로 제정하였다. 또한 새마을운동은 저개발국가의 발전모델로 선정되어 2010년까지 아시아, 아프리카 등 103개 나라 5만여 명이 교육을 받기도 하였다.

의의와 평가

애당초 농촌을 겨냥한 새마을운동의 발의 · 전개는 적지 않은 도전도 겪었지만, 전통적 체계의 농촌을 현대적으로 변환하도록 충격을 가하는 데 크게 성공하였다고 평가할 수 있다. 즉, 농촌사회에 팽배되어 있었던 봉쇄성, 숙명론적 체념성, 그리고 지역지향성 등을 극히 단기간 내에 전국적인 규모로 타파하는 데 성공한 것으로 국제적으로도 높이 평가되었다.

그러나 농촌을 겨냥한 원래의 새마을운동이 도시지역으로 확대되어 거의 전방위적인 국가발전 사업을 기획 · 집행한 이래, 공식적인 성과와 사업전개 대상자인 국민의 평가 사이에는 적지 않은 괴리가 생기기기도 하였다.

초기의 새마을운동은 ‘농촌의 사회적 혁명’이라고 규정될 정도로 성과가 매우 컸다. 그것이 우리나라 역사상 유례가 없는 성공을 거둔 기획적 사회변동으로 평가되는 것은 정확하다고 볼 수 있다. 문제는 정부의 강력한 기획 · 관리아래, 민간 주도 과제의 기본목표 및 사업내용이 전방위적으로 확대되었다는 것이다. 새마을운동을 포함한 모든 사회운동과 국민운동, 또는 기획적인 사회변동계획은 그 전개과정에서 목표(目標) 및 수단치환(手段置換)이 불가피하다. 초기의 농촌을 겨냥한 새마을운동은 개별적인 마을 단위로 기획 · 전개된 미시적 통합농촌개발계획으로 크나큰 성과를 얻었다고 평가되고 있다. 그러나 최근의 우리나라의 농촌발전에는 미시적이 아닌 광역적 종합농촌개발접근이 요구된다. 기본적인 생활 및 영농기반은 물리적으로 가능하지만, 소득증대를 겨냥한 모든 계획과 쾌적한 생활환경이라는 과제는 극히 도전적이며, 종합적인 기획과 집행이 요구된다.

새마을운동은 마치 국가발전을 촉진시키는 것으로 여겨져 사업영역을 지나치게 확대하였던 것이 사실이다. 이 때문에 과포부 또는 지나친 목표지향성을 지니고 한꺼번에 방대하게 사업체계를 구축하였다는 평가도 있다.

참고문헌

『그들의 새마을운동』(김영미, 푸른역사, 2009)
『농촌의 발전』(왕인근, 서울대학교 출판부, 1995)
『현대의 농촌사회학』(왕인근, 박영사, 1985)
『새마을운동 이론체계정립』(새마을운동중앙본부지역개발조사연구단, 1984)
『새마을운동』(내무부, 1975·1979·1983)
『새마을운동의 이념과 실제』(서울대학교새마을종합연구소, 1981)
『새마을운동 10년사』(내무부, 1980)
「박정희 정권 시기 농촌 새마을운동과 ‘근대적 국민 만들기’」(고원, 『경제와 사회』 69,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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