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이천(利川). 본명은 서채열(徐彩烈), 초명은 서종채, 별명은 서응오(徐應五) · 서종주(徐鍾珠), 자는 응호(應鎬). 전라북도(현, 전북특별자치도) 고창 출신. 서상필(徐相苾)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경주 김씨이다.
1907년 40명의 의병을 모집하여 기삼연(奇三衍)의 의진에 소속되어 항일투쟁을 전개하였다.
1908년 의병장 이대국(李大局)의 의진에서 선봉장에 임명되어, 이대국의 지휘하에 부하 25명을 거느리고 전라북도 무장군 일대에서 군자금 모금활동을 전개하였다. 의병장이 전사한 뒤 200여 명의 부하를 재편성하여 함평 · 영광 · 무장 · 부안 · 고창 등에서 여러 차례에 걸쳐 일본군과 교전하고 큰 전과를 올렸다.
또한, 의병에게 적대행위를 하던 밀고자 최용태(崔容台)를 총살하였다. 1909년부터 1911년까지 의병활동과 아울러 군자금의 조달에 힘을 기울였다. 그뒤 다량의 화약과 총기를 가지고 의병활동을 계속하다가 붙잡혔다.
1913년 7월 10일 광주지방법원 전주지청에서 징역 15년형을 언도받고, 이에 불복, 상고하였으나 1913년 7월 대구복심법원에서 무기징역을 언도받았다. 그뒤 1914년 칙령에 의하여 징역 20년으로 형이 변경되었고, 1915년에는 다시 15년으로 감형되었으나 이듬해 대구형무소에서 옥사하였다.
1980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