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주군 ()

대동여지도 중 경상북도 군위, 성주, 칠곡 부분
대동여지도 중 경상북도 군위, 성주, 칠곡 부분
인문지리
지명/행정지명ˑ마을
경상북도 남서부에 위치한 군.
이칭
이칭
경산, 성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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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경상북도 남서부에 위치한 군.
개관

동쪽은 낙동강을 경계로 대구광역시와 칠곡군, 서쪽은 김천시와 경상남도 합천군, 남쪽은 고령군, 북쪽은 김천시와 접하고 있다. 면적은 616.14㎢이고, 인구는 4만 5029명(2015년 현재)이다. 동경 128°02′∼128°24′, 북위 35°46′∼36°03′에 위치한다. 행정구역으로는 1개 읍, 9개 면, 233개 행정리(111개 법정리)가 있다. 군청은 경상북도 성주군 성주읍 경산리에 있다.

자연환경

지세는 남서부 군계에 위치한 가야산(伽倻山, 1,430m)을 중심으로, 높고 낮은 산들이 군 전체를 둘러싼 작은 분지형태를 이루고 있다.

서부와 북부에는 형제봉(兄弟峰, 1,022m) · 염속산(厭俗山, 870m) · 독용산(禿用山, 956m) · 백마산(白馬山, 716m) 등의 높은 산이 솟아 있다.

동부와 남부에는 서진산(棲鎭山, 742m) · 도고산(道高山, 349m) · 영취산(靈鷲山, 332m) · 작산(鵲山, 532m) 등 비교적 낮은 산들이 분포하고 있다. 서북부는 험한 산지를 이루고 있으며, 동남부에는 평야가 전개되어 있다. 그 중 서진산(棲鎭山, 일명 禪石山)은 월하면 인촌리와 칠곡군 약목면의 경계에 위치하고, 대부분 편마암으로 이루어져 있다.

서남쪽 산기슭에는 고려 때 나옹대사(懶翁大師)가 창건한 선석사(禪石寺)가 있고, 그 앞의 태봉(胎峯)은 풍수지리상 명당으로, 세종의 여러 왕자들과 단종의 태를 안장한 태실이 있다. 주변의 골짜기와 개울들이 절경을 이루어 봄 · 가을에 많은 사람들이 찾고 있다.

하천을 보면 서북부의 산악지대에서 발원한 대가천(大伽川)은 군의 서부를 동남류하여 고령군을 지나 낙동강에 유입한다. 강유역에는 비옥한 평야가 발달하여 농경지로 이용되고 있다.

이천(伊川)은 벽진면 · 성주읍 및 선남면 사이를 흐르는 하천으로, 벽진면의 고당산과 염표봉산에서 발원하여 남동류하고, 벽진면과 성주읍 남쪽을 지나 월항면 대산리에 이른다. 초전면백마산에서 발원하여 북쪽에서 남류한 지류 백천(白川)과 합류하고 다시 남동류하여 선원리 부근에서 낙동강으로 흘러든다.

연안에는 봉산들 · 섬안들의 비옥한 평야가 형성되어 있어서 중요한 농경지로 이용되고 있다. 북서부는 평안계에 속하고, 중앙은 경상계에 속하며 화성암층으로 이루어져 있다. 하천연안의 평야는 신생대 제4기에 속하여 하성층(河成層)과 현무암층(玄武岩層)으로 되어 있고 충적토질(沖積土質)을 이루어 매우 비옥하다.

기후는 한반도 남부에 위치하는 온대 계절풍 기후 지역이나 분지형 지형과 내륙에 위치하고 있어 한서의 차가 심한 대륙성 기후의 성격이 강하게 나타나는 곳이다. 연평균기온이 14.1° 정도로 다른 지역보다 낮은 것을 알 수 있는데, 이는 내륙분지인 까닭이다. 1월 평균기온 -0.9℃ 내외, 8월 평균기온 29.1℃ 내외로 한서의 차가 큰 편에 속하며, 연강수량은 850∼1,300㎜정도이나 6∼9월에 집중되는 편이다.

역사

이 지방에서는 아직까지 구석기시대의 유물 · 유적은 발견되지 않았고, 신석기시대와 청동기시대에 해당하는 고인돌 · 청동검 등이 발견되어 대략 이 무렵부터 사람들이 거주하기 시작하였을 것으로 믿어진다.

삼한시대에는 사회분화가 진행되어 소국(小國)으로 발전했는데, 반파국(伴跛國)이 이 곳에 있었던 것으로 비정되고 있으며, 그것이 성산가야(星山加耶)의 모체가 되었을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가야연맹의 한 나라로 발전하였던 성산가야는 늦어도 6세기 중엽까지는 신라에 복속되어 군현체제하에서 본피현(本彼縣)이 되었다.

현재까지 성주읍 성산리, 월항면 수죽리 등지에 남아 있는 고분군은 성산가야시대와 신라에 편입된 직후의 유적으로 생각되고 있다. 757년(경덕왕 16) 본피현은 신안현(新安縣)으로 개칭되어 성산군(星山郡)의 속현이 되었으며, 뒤에 벽진군(碧珍郡)으로 개칭되었다.

나말 여초의 전환기에 전국적으로 호족들이 할거하여 세력을 떨칠 때 성주지역에는 이총언(李悤言)이라는 대호족이 출현하여 인근의 중소 호족을 거느리고 군림했다. 태조 왕건의 회유정책으로 귀부하여 그의 아들 영(永)이 군사를 거느리고 태조를 도와 후삼국 통일에 공을 세웠다.

이로 인해 940년(태조 23) 성주는 경산부(京山府)로 승격되었고, 신안현 · 적산현(狄山縣) · 수동현(壽同縣) · 유산현이 통폐합되어 귀속되었다. 980년(경종 6)에 광평군(廣平郡)으로 강등되었다가 995년(성종 14) 대주(岱州)로 개칭되면서 도단련사(都團練使)가 파견되었다.

1012년(현종 3)에 다시 단련사가 폐지되었고, 1018년 지경산부사(知京山府事)가 파견되어 고령군(高靈郡) · 약목현(若木縣) · 지례현(知禮縣) · 가리현(加利縣) · 화원현(花園縣) · 황간현(黃澗縣) · 팔거현(八莒縣) · 김산현(金山縣) · 관성현(管城縣) · 안읍현(安邑縣) · 양산현(陽山縣) · 이산현(利山縣) · 대구현(大丘縣) · 하빈현(河濱縣) · 인동현(仁同縣) 등 1군 14현이 귀속되어 그 위세가 크게 떨쳐졌다.

1295년(충렬왕 21) 흥안도호부(興安都護府)가 되었다가 1308년에 성주목(星州牧)으로 승격되었으며, 1310년(충선왕 2)에 다시 경산부로 강등되었다. 고려 말 왜구가 삼남지방을 휩쓸 때 성주 역시 상당한 피해를 입었으나, 우하(禹夏)의 활약에 의하여 왜구를 격파한 바 있다.

건국 이후에도 경산부로 지속되었으며, 태조 때 일시 계수관(界首官)이 되었고, 1413년(태종 13) 성주목으로 승격되면서 가리현 · 팔거현 · 화원현을 속현으로 거느리게 되었다. 이 때 성주는 경상도에서는 가장 넓은 간전결수(墾田結數)를 보유하였고, 많은 제언(堤堰)이 축조되어 있는 등 경제적으로 매우 풍요로운 곳이었으며, 인재도 많이 배출한 영남의 거읍 중 하나였다.

임진왜란 중에는 일시 경상도 감영이 성주목팔거(현재 칠곡)에 두어지기도 하였다. 성리학이 널리 보급되면서 성주에서 정구(鄭逑) · 김우옹(金宇顒) 등과 같은 대학자가 배출되었고, 1558년(명종 13) 천곡서원(川谷書院)이 세워지는 등 영남학파의 한 중요한 근거지 구실을 하였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 왜군이 성주를 점령하자, 의병장 김면 · 정인홍 등이 세 차례의 격전 끝에 성주성을 탈환하는 개가를 올리기도 하였다. 1614년(광해군 7) 이 곳 주민 이창록(李昌祿)이 광해군의 난정(亂政)을 비방한 사건이 발생하여 목(牧)이 혁파되고 고령현에 합속되었다가 1616년 신안현으로 개명되었다. 인조반정 뒤 다시 목으로 승격되었다.

그 뒤 몇 차례의 승강(陞降)이 있었으나, 1745년(영조 21) 다시 목으로 환원되었다. 그 동안 팔거현은 칠곡도호부에, 화원현은 대구부(大丘府)에 각각 이속됨으로써 가리현만 거느리게 되었다. 조선 후기에도 성주에서는 많은 서원과 사우가 설립되고 이진상(李震相) 등 영남학파를 계승한 성리학자들이 다수 배출되었다.

1895년 근대적인 지방행정구역의 개편에 따라 성주군으로 되어 대구부에 속하였다. 1905년에는 인곡(仁谷) · 덕곡(德谷) · 노다(老多) · 다산(茶山) 등 4개 면이 고령군으로, 노곡면(蘆谷面)이 현풍군(玄風郡)으로, 증산면(甑山面)이 지례군에 각각 편입되었기 때문에 관할구역이 자연히 축소되었다.

개화의 물결이 이 곳에도 미쳐 1906년 사립학교가 세워졌고, 일제의 국권 강탈 이후에는 이의 회복을 위한 민족 독립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1919년 3·1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되는 과정에서 선남면 · 가천면 · 성주면 · 성주읍내장 등지에서 맹렬한 만세시위 운동이 일어났고, 다수의 인물이 일본경찰에 체포되는 등 수난을 겪었다.

경상도 유림이 중심이 되고 전국 유림대표 137명이 연서한 파리장서(Paris 長書)는 파리평화회의에 보내진 독립청원서(獨立請願書)였는데, 이 고장 출신 김창숙(金昌淑)이 중국 망명시 휴대하여 평화회의에 우송했다. 세계 각국 및 전국 향교에 이 문서를 보내는 데에도 핵심적 역할을 하였다.

1945년 8·15광복 후 안정되지 못한 사회 정세하에서 좌익의 주동으로 대구에서 시작된 10·1폭동사건은, 이 지방에도 파급되어 경찰서가 습격되는 등의 혼란이 있었지만 곧 질서가 회복되었다.

1950년 6·25 전쟁 당시 낙동강전선이 형성되었을 때 주전선(主戰線)의 배후지였기 때문에 공산군에 의해 많은 인명과 재산피해를 입기도 하였다.

1973년 대가면 중산동이 가천면에 편입되었으며, 1979년 5월 1일 성주면이 읍으로 승격되었다. 1983년 고령군 덕곡면 성동이 수륜면에, 용암면 유서동이 선남면에 편입되었고, 선남면 노석동이 칠곡군 약목면으로 편입되는 행정구역 조정을 거쳤다.

1988년 5월 9일 동이 리(里)로 개칭되었으며, 1989년에는 용암면 명포리 · 장학리가 선남면에, 월항면 어산리가 초전면에 편입되었고, 1990년벽진면 해평리가 수촌리로 개칭되었다.

유물유적

선사시대 유적으로 성주읍 성산리와 월항면 수죽리에 고인돌이 있다. 삼국시대의 것으로는 성주읍의 성주성산동고분군(사적, 1963년 지정)을 비롯하여 금수면 명천리, 대가면 옥화리 · 도남리, 월항면 용각리 · 수죽리 등지에 크고 작은 270여 기의 고분이 산재하여 있다.

성곽으로는 가야산 상봉의 가야산성지(加耶山城址, 일명 白雲山城)를 비롯하여 독용산성(禿用山城) · 성주읍성지 · 성산성지 등이 있다.

불교 유산으로는 가천면에 성주 금봉리 석조비로자나불좌상(보물, 1992년 지정), 성주읍 예산리에 신라 애장왕 때 조성되었다는 동방사지칠층석탑이 있다. 이 탑은 원래 9층이었으나 지금은 7층만이 남아 있으며, 성주의 지기(地氣)를 보호하기 위하여 세운 탑이라 하여 일명 지기탑이라고도 한다. 동방사지칠층석탑은 1974년 경상북도 유형문화재(현, 유형문화유산)로 지정되었다.

또 수륜면 백운리의 가야산에는 통일신라시대의 거찰이었던 법수사지에 삼층석탑=〉법수사지삼층석탑(경상북도 유형문화재, 1975년 지정)과 법수사지 당간지주(경상북도 유형문화재, 1975년 지정) · 시식대가 있고, 보월리 탑안마을에는 성주보월동삼층석탑(경상북도 유형문화재, 1979년 지정)이 있다. 그 밖에 현존하는 사찰로 월항면 인촌리에 선석사대웅전과 감응사(感應寺) 등이 있다. 선석사대웅전은 1985년 경상북도 문화재자료(현, 문화유산자료)로 지정되었다.

조선시대의 관아 건물 및 교육기관으로 임진왜란 당시 군아였던 성주읍 경산리의 성주성산관(경상북도 유형문화재, 1980년 지정), 예산리의 성주문묘명륜당(경상북도 유형문화재, 1982년 지정), 1690년(숙종 16)에 사액된 수륜면 신정리의 회연서원(경상북도 유형문화재, 1974년 지정), 선남면 문방리의 도산서당(경상북도기념물, 1985년 지정), 대가면 칠봉리의 청천서당(경상북도 유형문화재, 1991년 지정), 성주향교대성전(경상북도 문화재자료, 1985년 지정) 등이 있다.

또한, 1792년(정조 16) 임진왜란 때 전공을 세운 성주목사 제말(諸沫)을 위하여 세운 쌍충사적비(경상북도 유형문화재, 1974년 지정)가 성주읍 경산리에 있고, 초전면 고산리의 성주백세각(경상북도 유형문화재, 1982년 지정), 벽진면 수촌리의 동강김우옹신도비(경상북도 유형문화재, 1991년 지정), 해평리의 월회당(경상북도 기념물, 1984년 지정), 봉계리의 해동청풍비(경상북도 기념물, 1990년 지정)와 성산재(星山齋) · 만귀정(晩歸亭) · 백운정(白雲亭) · 사봉정(沙峰亭) 등의 재각과 정자들이 있다.

대가면의 옥화리에 성주이씨영정(경상북도 유형문화재, 1989년 지정), 칠봉리에 속자치통감강목판목(경상북도 유형문화재, 1991년 지정), 수륜면 수륜리에 성주김기대소장전적(경상북도 유형문화재, 1991년 지정) 등이 보존되어 있다.

월항면 인촌리태봉 정상에는 세종대왕의 여러 왕자와 세손인 단종의 태를 안장한 세종대왕자태실(경상북도 유형문화재, 1975년 지정)이 있다.

고건축물로는 월항면 대산리에 대산동교리댁 · 대산동북비고택 · 대산동한주종택 · 대산동월곡댁이 있다. 대산동교리댁, 대산동북비고택, 대산동한주종택, 대산동월곡댁은 1983년 경상북도 민속자료(현, 민속문화유산)로 지정되었다.

수륜면에는 성주수성리중매댁(경상북도 민속자료, 1989년 지정), 초전면 월곡리에는 완정고택(경상북도 문화재자료, 1985년 지정), 대가면 칠봉리에는 칠봉리에 청천서당(경상북도 유형문화재, 1991년 지정) · 심산김창숙생가(경상북도 기념물, 1991년 지정), 수륜면 오천리에는 사창서당(경상북도 문화재자료, 1987년 지정), 벽진면 자산리에는 안산영당(경상북도 문화재자료, 1989년 지정) 등이 있다.

용암면 본리리에는 1988년 중요무형문화재(현, 국가무형유산)로 지정된 명주짜기와 1990년 경상북도 무형문화재(현, 무형유산)로 지정된 무명짜기가 있으며, 벽진면 수촌리에는 성주해평동측백나무(경상북도 기념물, 1984년 지정)가 있다.

교육 · 문화

조선시대의 교육기관으로는 성주읍 예산리에 성주향교(星州鄕校)가 있다. 성주향교는 1397년(태조 6) 서울에 성균관, 지방의 각 고을에 향교가 건립될 때 세워진 관학으로 지방교육기관으로서는 가장 중요한 일을 담당하였다. 서원으로는 천곡서원 · 회연서원 · 안산서원(安山書院)이 있었다.

벽진면 해평리에 있던 천곡서원은 1558년(명종 13)에 목사 노경린(盧慶鱗)이 설립하여 처음 연봉서원(延鳳書院)이라 하다가 뒤에 정구가 천곡서원이라 하였으며 1573년(선조 6)에 사액되었다가 훼손 · 철폐되었다.

1868년(고종 5)에 수륜면 신정리에 있는 회연서원은 1622(광해군 14)에 정구를 봉안하기 위하여 그의 문인들이 설립한 것으로 1690년(숙종 16)에 사액되었으며, 1868년(고종 5)에 훼철되었으나, 후에 복원되었다.

벽진면 자산리의 안산서원은 이장경(李長庚)과 그의 자손들을 배향하는 서원으로, 설립연대는 미상이나 1680년(숙종 6)에 사액되었고, 고종 때 철폐되어 현재는 영당이 되었다.

근대 교육기관으로는 일제강점기에 성주공립심상소학교가 설립되었으며, 그 뒤 보통학교 3개가 개교하였다. 8·15광복 후에는 많은 학교들이 설립되었다.

2017년 현재 교육기관으로는 초등학교 12개교, 중학교 8개교, 고등학교 3개교가 있다. 군립성주도서관이 있어 군민들의 교육 · 문화 발전에 이바지하고 있다.

이 밖에 성주문화원이 설립되어 매년 가을에 개최되는 성주문화제를 주관하고 있어 향토문화 발전에 기여하고 있다. 또한 이 지역에서 개최되는 성주 군민의 날(매년 5월), 해맞이 군민안녕 기원제, 거자약수축제, 성주생명문화축제 등의 지역축제가 개최되어 지역민뿐만 아니라 관광객 유치에도 도움을 주고 있다. 특히 세종대왕태실을 안치한 고장이라는 자부심에서 비롯된 성주생명문화축제는 2023년 5월로부터 성주참외축제와 결합되어 '성주참외&생명문화축제'로 명칭을 변경하였다.

민속

이 고장의 대표적인 민속놀이는 줄다리기 · 답교(踏橋)놀이 · 달불놀이 · 지신밟기 · 고누 · 장치기놀이 등이 행해진다. 줄다리기는 성주읍 예산리와 백전리 사이에 정월 보름에 주민이 참여하여 진 편이 이긴 편의 농사일을 해주던 것이 연원이 되었으며, 처음에 소규모이던 것이 점차 읍 전체의 행사로 확산되었다.

군청 소재지 앞길을 경계로 남군과 북군이 대결을 하였다. 남군은 관왕묘가 있는 남쪽지역에 살고 있어 무관의 성격을 띠게 되었고, 북군은 읍의 북쪽에 서당이 있어서 문관의 성격을 띠게 되었다.

정초부터 양편에서는 집집마다 짚단을 거두어 직경 10㎝, 길이 100m쯤 되는 줄을 만들어 행사 3일 전에 솔방천으로 청장년들이 메고 와 사령의 지휘하에 줄거리를 연결시킨다.

남쪽 줄인 암줄은 원형으로 도래를 만들고 그 속에 북쪽 줄인 수줄을 넣으며 ‘꽂대’라 하여 참나무를 가로질러 줄이 빠지지 않게 한다. 아들 없는 부녀자가 이 줄을 넘으면 아들을 낳는다고 한다.

줄다리기를 시작하면 양편은 농악을 울려 기세를 올리며 승부가 빨리 나지 않을 때는 여러 날 싸우는 수도 있다. 이긴 편에는 풍년이 들고 무병하며 재난이 없다고 하며, 진 편은 흉재가 있다고 믿었다. 줄다리기에 사용한 줄은 썰어서 논에 거름으로 쓰면 풍년이 든다고 전한다.

지신밟기는 정월 보름날 마을의 청장년들이 모여 사대부 · 팔대부 · 포수로 역을 나누어 맡아 농악을 하는 가운데 춤을 추고 놀면서 지신을 위로하는 놀이이다.

일행은 집집마다 돌면서 지신을 밟는데 집주인은 답례로 일행에게 음식을 대접하고 곡식이나 돈을 내주는데 이것은 마을의 공동경비로 쓰이게 된다.

동제를 지내고 있는 마을이 현재는 없으나 일제강점기 초기에는 정월 보름 이전에 동제를 지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제관은 마을 전체 회의에서 정하는데, 지난 한해 동안 출산이나 초상을 치른 일이 없는 성년 남자 중에서 마을 신을 섬기는 마음이 돈독하다고 인정되는 사람을 뽑는다.

동제를 지낼 때 온 마을 주민들이 적색토를 깔아 부정을 피하고 밤새 불을 켜둠으로써 당맞이를 하였다. 제 지낼 날짜가 결정되면 살생을 금하고 다른 마을사람이 들어오는 것도 금한다. 제를 지낸 다음날 아침에는 제관의 노고를 치하하고, 온 마을 사람이 모여 동제의 결과보고를 듣고 마을 전체의 한해 동안의 일을 의논하기도 하였다.

설화 · 민요

이 고장에는 사찰연기설화, 풍수설화, 역사적 인물에 얽힌 설화, 자연물에 관한 전설 등이 전한다. 월항면「감응사 연기설화」는 신라 애장왕에 얽힌 이야기이다. 애장왕은 늦어서야 왕자를 보았으나 불행히 왕자는 앞을 잘 볼 수 없었다. 하루는 임금의 꿈에 한 승려가 나타나 ‘독수리를 따라 본피현(지금의 성주)에 있는 약수를 찾아 그 물로 눈을 씻게 하면 낫게 될 것’이라 하여 이튿날 군사에게 명하여 독수리를 따라가 약수를 길어오게 하였다.

그 약수로 눈을 씻은 왕자는 앞을 잘 보게 되었으므로 왕은 은혜를 잊지 못하여 약수가 있던 곳에 감응사를 짓게 하고 ‘신령스러운 독수리 산’이란 뜻에서 영취산이라 부르게 하였다 한다.

초전면에 있는 ‘마족혈’이라는 무덤은 명풍수 남사고가 장씨 형제에게 속아서 잡아준 묘터라 한다. 옥산 장씨의 시조가 죽자, 가난한 집안의 아들 형제는 남사고가 그 앞을 지난다는 소문을 듣고 한 계책을 꾸몄다.

남사고를 붙잡아 동생은 때리고 형은 동생을 나무라고 말리는 시늉을 하며 남사고를 집으로 업고 와 융숭한 대접을 한 것이었다. 이에 감동한 남사고가 도와줄 일이 없는지 묻자, 형은 부친이 별세했다고 하였다.

이에 남사고는 후손이 영의정까지 할 수 있는 홈실 옆의 명당자리를 잡아주었고 장사를 치르는 날에서야 무덤 앞에서 곡을 하는 동생을 보고 자신이 속았음을 분하게 여겼다고 한다. 그 뒤 자손은 영의정까지 올랐으며 묘터가 마족혈이므로 비석이나 석물을 하면 뛰는 말의 발에 지장을 준다 하여 비석을 쓰지 않았다고 전한다.

이 밖에 역사적 인물설화로 장순손 · 박이현 · 권응인 · 이원조 · 이창록 등등의 설화가 전하고 용바위 · 학바위 · 태자바위 등 자연물에 얽힌 전설, 하늘이 낸 대효(大孝) 박랑자매 · 김윤도 · 박구 등의 설화가 전한다.

그 외에도 「효자 박구 이야기」, 「태자(太子)바위 전설」, 「의마비(義馬碑) 전설」, 「태봉에 얽힌 이야기」 등이 있다.

이 고장에 구전되고 있는 민요는 기능요나 비기능요 모두가 다양하고 풍부하다.

기능요로는 농업노동요가 우세한데 특히 「모내기 소리」와 「논매기 소리」가 풍부하다. 「모내기 소리」는 때에 따라, 경우에 따라 아주 풍부한 사설로 불린다. “동이동천아 돋은해는……”, “상주함창 공갈못에……”, “멈아멈아 점심멈아……”, “이물고저물고 헐어놓고……”, “방실방실아 윗는님을……” 등과 같은 사설을 두 패로 나눠 한 줄씩 주고받는 교환창으로 부른다.

「논매기 소리」는 선후창으로 부르는데, 논농사가 왕성한 지역이어서인지 세 차례 논매기마다 부르는 노래가 다르며 세 번째 논매기 노래는 두 종류가 있다.

사설은 서로 넘나들기도 하지만, 「아이 논매기 소리」는 “어영차 에헤오 어영차 헤헤여”, 「두불 논매기 소리」는 “에헤야 에헤야 산아산아 에헤야”, 「시불(세벌) 논매기 소리」는 “위야호오 위야호오 올라가네 위야호오”라 하여 뒷소리가 다르다.

「보리 타작 소리」는 앞소리를 목도리깨꾼이 하고, 종도리깨꾼이 뒷소리를 제창하는 선후창으로 부르는데, 한 음보씩을 주고받는 빠르고 단순한 노래이다. 사설은 때릴 곳을 지시하는 등 작업에 관계되는 것이 많고 뒷소리는 ‘옹해야’를 쓴다.

여성노동요로는 “이밭골은 이리키 질고 · 장장추월 긴긴날이 · 해는 잡아땡긴겉이 길고……”라고 밭매기의 힘듦을 노래하는 「밭매기 소리」가 있고, 「나물캐는 노래」 · 「뽕따는 노래」 등 채취노동요가 있다.

“오르롱 오르롱 물레질/갈밭에 갈갈 솔밭에 솔솔/이물레 잣아가주……”라는 「물레 노래」, “긴삼가리 멀감남무 징게다리 · 남산이라 꽃광아리 · 삼을 삼아 서리높고……”와 같은 「삼삼기 노래」 · 「베틀 노래」 · 「바느질 노래」 등이 길쌈하는 작업과정에서 불리나, 작업과 관계없이 불리기도 하고 또 작업과정에서 「시집살이 노래」 등 여러 부요가 두루 불리기도 한다.

기타 노동요로서 가래로 흙을 뜨면서 선후창으로 부르는 「가랫장구」가 있고, “아이고 지고/못사겠다 못사겠다/아이고 지고 못사겠다/……지기싫은 이놈우지게/왜났느냐……”와 같이 남자들의 신세타령을 위주로 한 「어사용」도 많이 불린다. 이밖에도 「자장가」 · 「아이얼르는 노래」 · 「불미 노래」 등이 있으며, 환갑 때 축하 노래로 부르는 「환갑(연) 노래」가 있다.

비기능요로는 여성들이 각종 노동현장에서도 부르고, 유흥에서도 부르는 「나비 노래」 · 「댕기 노래」 · 「꽃 노래」 · 「님 그리는 노래」 등 다양하고 풍부하다. 「담방구 타령」 · 「장 타령」 · 「각설이 타령」 등의 타령류도 풍부하고, 「사랑가」 · 「이별가」 등의 잡가류도 많이 불린다.

이 밖에도 “……팔삼년(단기 4383년) 가신낭군/삼팔선을 돌파하고/팔월이나 오실런가……”라는 「육이오 탄식가」와 같이 근년의 세태를 반영한 노래도 불린다.

산업 · 교통

경지면적은 130.77㎢로 총면적의 21.22%에 달하며 전체 주민의 42.1%가 1차산업에 종사한다. 농업지대는 가천면과 수륜면을 흐르는 대가천(大伽川)과 벽진면과 성주읍을 흐르는 이천 유역 및 초전면과 월항면을 흐르는 백천(白川)과 합류하여 낙동강에 유입되는 일대의 유역이다. 성주군의 동남부 지역인 선남 · 용암 · 수륜면 등에는 주로 벼농사가 성하고, 서북부 지역인 초전 · 벽진 · 금수면 등의 산간지대는 밭농사로서 고추 · 마늘 · 포도 · 사과 등이 생산된다.

특히 참외와 수박은 맛과 질이 좋아 성주의 특산물로서 대구 · 부산 · 서울 등 전국에 널리 알려져 있다. 참외 산지는 선남면이 가장 많고 그 다음이 성주 · 초전 · 월항 · 용암 · 대가 · 벽진면의 순이며, 수박은 벽진 · 초전 · 성주 · 월항 · 선남면의 순이다. 한우사육은 용암 · 수륜면, 성주읍에서, 돼지는 선남 · 성주 · 초전면에서 각각 사육되고 있는데 계속 증가하고 있다.

광업은 수륜면에서 고령토와 규석이 생산되고 있으며, 농공단지는 성주읍 · 선남면 · 월항면에 78개 업체가 입주해 있으며, 1,172명의 종업원이 일하고 있다. 농공단지에 있는 공장들은 대부분 섬유제조업이고, 그 밖에 자동차부품 · 건축자재 · 석재가공 공장이 입주해 있다.

대구광역시와는 교통이 매우 편리하며, 33번 ·30번 국도와 여러 지방도가 뻗어 있어 구미시 · 고령군 · 칠곡군 및 경상남도 거창군 · 합천군과의 교통이 편리하다.

관광

가야산을 비롯하여, 높고 수려한 산이 많으며, 동쪽 경계를 따라 낙동강이 흐르고 있어 자연경관이 아름답다. 또한 이 군에는 성산가야의 옛 터이고 뒤에는 신라에 병합된 관계로 가야와 신라의 유적들이 많이 남아 있어서 문화관광자원이 풍부한 지역으로 손꼽힌다.

유명한 관광지로는 수륜면의 가야산국립공원과 신정동의 회연서원, 대가면 칠봉리의 사도실과 청천서원, 금수면의 성주댐과 대가천계곡, 가천면 일대의 포천계곡, 월항면 대산리의 한개마을이 있다. 가야산은 1972년 국립공원으로 지정된 뒤 개발이 시작되었다.

가야산에는 계곡 · 폭포를 낀 절경이 수없이 많다. 거기에는 법수사와 심원사 등의 폐사지가 자리잡고 있는데, 이것들은 통일신라 후기에 창건되어 천 년 동안 번성했고 100여 개의 암자가 딸린 거찰이었다. 이외에도 법수사지3층석탑과 심원사지3층석탑이 있다.

수륜면 신정리에는 한강정구 선생을 배향하는 회연서원이 있다. 경내에는 지경재 · 명의재 등의 건물이 있으며, 한석봉이 썼다는 현판이 유명하다. 대가면 칠봉리에는 최근에 복원된 청천서원이 있다. 성주댐은 1992년 완공된 다목적댐으로 총 3천8백만 톤의 물을 가두어 놓았으며 드라이브코스로 아주 적격이다.

대가천계곡은 탄성을 지르게 하는 비경들이 거듭되고, 운봉현광호 선생의 뜻을 기리기 위해 제자들이 세운 백운정과 바위의 생김새가 배모양을 닮았다고 붙여진 배바위, 선바위(소학봉)가 있다.

포천계곡은 가야산 뒷자락의 대표적인 명소로 물이 맑고 풍부하여 구비구비 절경을 이루고 있다. 이 계곡에는 조선 후기의 문신이자 당대 최고의 선비였던 응와이원조가 지은 만귀정과 김천택이 머물며 공부했던 사봉정이 있다.

그 외에 아름다운 골짜기와 맑은 물이 흐르고 있어 여름철 피서지로 알려지게 되어 대구를 비롯한 인근 도시에서 많은 관광객들이 사철 모여드는 신계 용사계곡, 성주읍의 성산가야의 산성과 고분, 월항면서진산의 선석사와 조선왕조의 태실(胎室), 영축산의 감응사 등이 있다.

전시공간으로서 금수문화예술마을은 2000년 4월 문화관광부와 성주군, 그리고 성주교육청이 지역문화의 창달을 위해 예술인들에게 제공된 창작스튜디오이자 주민들의 문화체험공간이다. 또한 2003년 개관한 성주문화예술회관은 공연, 전시를 위한 공간과 여성복지센터 1개동을 갖추고 있다.

읍 · 면
  1. 성주읍(星州邑)

군의 중앙에 위치한 읍. 면적 36.32㎢, 인구 1만 3978명(2015년 현재). 읍 소재지는 경산리이다. 본래 성주군 지역으로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용산(龍山) · 남산(南山) · 본아(本牙) · 북산방(北山坊)이 병합되어 성주면이라 하였으며 1979년에 읍으로 승격되었다. 1989년 동명을 리로 변경하였다.

읍의 남부에 성산(星山, 389m)이 솟아 있을 뿐, 대부분의 지역이 평지로 되어 있다. 낙동강의 지류인 이천(伊川)이 읍의 중앙을 동서로 관통하며 주변에 넓고 비옥한 평야를 형성하여 농경지로서 적지가 되고 이다.

총 경지면적은 16.02㎢로 44.1%를, 임야면적은 13.16㎢로 36.2%를, 기타는 19.7%를 차지하고 있다. 경지 중 논이 9.71㎢로 60.6%를 차지하고 밭이 6.31㎢로 39.4%를 차지하며 논농사가 주류를 이루고 있다.

주요 산업은 농업으로 쌀을 비롯하여 보리 · 수수 · 메밀 등의 주곡이 많이 생산되며, 고구마 · 배추 · 양배추 · 오이 · 호박 · 참외 · 마늘 · 토마토 · 파 · 당근 · 시금치 등의 작물이 생산된다.

이 밖에 사과 · 복숭아와 특용작물로 참깨 · 땅콩이 많이 생산되고 있다. 특히 비닐하우스를 이용한 수박과 참외재배는 성주의 명산물로 전국적으로 알려져 있다. 대흥리 화훼단지에서는 화분난을 대량으로 재배하고 있고 성산리에서는 건강식품으로 호박즙과 호박증탕이 생산된다.

도로는 고성∼선산간의 국도와 변산∼대구간의 국도가 읍을 동서로 관통하면서 교차하고 있고, 지방도가 남북으로 지나고 있는 등 사방으로 도로가 연결되어 있어서 내륙교통의 요지를 이룬다.

문화유적은 성산리에 신석기시대의 고인돌과 가야시대 고분군이 있으며, 예산리에 동방사지칠층석탑과 성주향교가 있다. 경산리에는 임진왜란 때 성주목사 제말과 제홍록(諸弘祿)의 사적을 새긴 쌍충사적비, 조선시대에 성주목의 관아로 사용되던 성산관과 성산재 · 관왕묘지(關王廟址) · 성주읍성(星州邑城) 등이 있다.

항일독립운동가인 심산김창숙 선생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1974년 건립한 심산기념관이 있다. 대황리에 기우단인 대황당유지(大皇堂遺址)가 있다.

교육기관으로는 초등학교 2개 교, 중학교 2개 교, 고등학교 2개 교가 있다. 경산(京山) · 대흥(大興) · 대황(大皇) · 성산(星山) · 삼산(三山) · 학산(鶴山) · 금산(錦山) · 예산(禮山) · 백전(栢田) · 용산(龍山) 등 10개 리가 있다.

  1. 가천면(伽泉面)

군의 남서부에 위치한 면. 면적 64.24㎢, 인구 2,062명(2015년 현재). 면 소재지는 창천리이다. 고려시대에는 이곳에 큰 우물이 있다 하여 이물역(爾勿驛) 또는 내물방(奈勿坊)이라 불렸으며 조선조에 와서 가천방(伽泉坊)으로 개칭되었고 다시 1895년(고종 32)에 지방관제 개정시에 가천면으로 개칭되었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금수면(金水面)과 김천시 증산면 일부가 병합되었으며, 1973년에 대가면 중산리가 편입되었다. 면의 대부분이 산지로서 남단은 명산인 가야산(伽倻山, 1,430m)과 두리봉(1,133m)이, 서쪽은 형제봉(兄弟峰, 1,022m)이, 북쪽은 독용산(禿用山, 956m) · 신흥뒷산(562m)이 둘러싸고 있어 면 전체가 이 산들의 기슭에 해당한다.

화죽천의 지류가 중앙부의 산지를 개석하고 상류에는 분지, 하류에는 충적평야를 형성하고 있다. 총 경지면적은 7.28㎢로 11.3%를, 임야면적은 52.53㎢로 82%를, 기타는 6.7%를 차지하고 있다. 경지 중 논이 5㎢로 68.7%를 차지하고 밭이 2.28㎢로 31.3%를 차지하며 논농사가 주류를 이루고 있다.

주요 산업은 농업으로 미곡 외에 밀 · 수수 · 메밀 · 콩 · 팥 등의 잡곡, 고구마 · 감자 등의 서류, 고추 · 마늘 · 참외 · 양배추 · 오이 · 파 · 상치 · 시금치 등의 채소류, 사과 · 복숭아 등의 과일, 참깨 · 들깨 · 잎담배 등의 특용작물이 생산된다.

그 외에 호두 · 연료 · 산나물 · 산수유 등의 임산물이 생산된다. 마수리에서 토종꿀을 생산하며, 신계리의 500m의 고지대에 들어선 갈곡마을은 고랭지 채소재배로 주민소득을 올리고 있다. 용사리의 상사마을은 산양사육지로 각광을 받고 있다.

도로는 고성∼선산간의 국도와 지례∼가천간의 군도, 거창∼김천간의 지방도가 옥화리에서 만나고 있으나 아직은 교통이 불편하다. 문화유적은 금봉리의 성산가야 때 축조된 것으로 전해지는 독용산성과 안국사(安國寺)가 있고, 법전리에는 사봉정과 신계리에는 만귀정이 있다.

신계리 · 법전리 · 마수리에 걸쳐 있는 포천계곡 일대의 자작나무에서 위장병에 좋은 거자수가 나서 곡우절이면 많은 사람들이 몰려온다.

교육기관으로는 초등학교 1개 교, 중학교 1개 교가 있다. 창천(倉泉) · 화죽(花竹) · 동원(東元) · 마수(馬水) · 법전(法田) · 신계(新界) · 용사(龍沙) · 금봉(金鳳) · 중산(中山) 등 9개 리가 있다.

  1. 금수강산면(金水江山面)

군의 서부에 위치한 면. 면적 74.74㎢, 인구 1,139명(2015년 현재). 면 소재지는 광산리이다. 고려시대에는 금물방(今勿坊)이라 하다가 조선조에 와서는 금물법면(今勿法面) 또는 금물면(今勿面)이라 불렸다. 1895년(고종 32) 지방관제 개정에 따라 금수면으로 개칭되었으며 1917년에 가천면의 영천리가 편입되었다. 2024년 8월 1일 금수강산면으로 행정구역 명칭을 변경했다.

면의 북쪽은 염속산(厭俗山, 870m)의 남사면에 해당하며, 남쪽은 독용산(禿用山, 956m) · 도장골산(529m) · 신흥뒷산(503m) · 형제봉(兄弟峰, 1,022m) 등의 높은 산이 가로막고 있다. 이 남북 양 산괴간을 대가천이 휘감아돌면서 그 활주사면(滑走斜面)에 평지를 형성하고 있다.

총 경지면적은 7.63㎢로 10.2%를, 임야면적은 62.2㎢로 83.2%를, 기타는 6.4%를 차지하고 있다. 경지 중 논이 5.22㎢로 68.4%를 차지하고 밭이 2.41㎢로 31.6%를 차지하여 논농사의 비중이 높다.

주요 산업은 농업으로 겉보리 · 조 · 수수 · 팥 등의 잡곡과 호박 · 파 · 양파 · 당근 · 상추 · 시금치 · 미나리 · 토란 등의 채소류, 참깨 · 들깨 등의 특용작물이 재배되고 있다. 도토리 · 호두 · 연료 · 산나물 · 산수유 등의 임산물이 생산된다. 어은리의 후동 마을에서는 염소를 길러 농가소득을 올리고 있다.

도로는 변산∼대구간의 국도가 면을 동서로 가로질러 성주와 통하며, 거창∼김천간의 지방도가 면의 남북을 통과하여 김천 · 고령 등과도 연결되므로 교통은 편리하다.

문화유적은 어은리에 적산사(積山寺), 영천리의 고반서당(考槃書堂)이 있다. 또 하입암마을 동쪽 냇가에는 군내의 명승지인 선바위가 있어 여름철에 많은 관광객이 모여든다. 봉두리에는 백운정이 있다. 교육기관은 없다.

광산(廣山) · 명천(明川) · 어은(漁隱) · 후평(厚平) · 봉두(鳳頭) · 무학(舞鶴) · 영천(令川) 등 7개 리가 있다.

  1. 대가면(大家面)

군의 중앙부에 위치한 면. 면적 28.10㎢, 인구 2,554명(2015년 현재). 면 소재지는 옥성리이다. 본래 신라 때는 본피현, 고려 때는 경산부, 조선시대에 와서는 성주목의 일부 지역이었으나, 1906년 지방행정 구역 개편시에 대가방(大家坊) · 사천방(沙川坊) · 금파방(琴琶坊)이 합해져 대가면이라 불렸다. 1973년에 중산이 가천면에 이속되었다.

남부의 경계에는 최고봉인 칠봉산(七峰山, 517m)이 있다. 이천의 상류부가 저산성 산지간을 고루 침식하여 전면에 걸쳐 곡저평야를 형성하고 낮은 구릉성 산지와 평야가 고착하고 있다.

총 경지면적은 10.05㎢로 35.8%를, 임야면적은 14.36㎢로 51.1%를, 기타는 13.1%를 차지하고 있다. 경지 중 논이 6.95㎢로 69.2%를 차지하고 밭이 3.1㎢로 30.8%를 차지하며 논농사가 주류를 이루고 있다.

주요 산업은 농업으로 주곡생산과 무 · 오이 · 호박 · 참외 · 토마토 · 파 · 당근 · 상추 · 시금치 · 토란 등 각종 채소류의 생산이 많다. 또한 사과 · 포도 · 복숭아 등의 과일과 함께 참깨 · 잎담배 등의 특용작물이 생산되고 있다.

도로는 고성∼선산간의 국도가 면을 동서로, 수륜∼남면간의 도로가 남북으로 관통하고 있어서 성주읍 · 고령읍에 연결되어 교통은 매우 편리한 편이다. 문화유적으로 도남리의 후포마을에는 보호수인 수령 360여 년이 된 소나무가 있다.

전인마을 뒷산에는 할머니들이 돌을 주워 치마로 날라 쌓았다 하여 일명 할미산성이라 불리고 있는 전인산성(全人山城)이 있다. 옥화리에는 성주이씨영정, 용흥리의 용전마을에는 이진호(李晋琥)의 재실인 팔우당(八友堂)이 있다. 또한 칠봉리에는 청천서당 · 김창숙생가 등이 있다.

교육기관으로는 초등학교 1개 교가 있다. 옥성(玉星) · 칠봉(七峰) · 용흥(龍興) · 흥산(興山) · 옥련(玉蓮) · 금산(金山) · 옥화(玉花) · 대천(大川) · 도남(道南) 등 9개 리가 있다.

  1. 벽진면(碧珍面)

군의 북서부에 위치한 면. 면적 62.77㎢, 인구 3,310명(2015년 현재). 면 소재지는 해평리이다. 본래 삼한시대 변한(弁韓)의 6가야 중 벽진가야(碧珍伽倻) 지역으로, 조선 말엽에는 명암방(明巖坊)이라 불렸고,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명암방 · 운곡방(雲谷坊) 및 본아방(本牙坊)이 병합되어 벽진면으로 개칭되었다.

면의 대부분이 산지로서 북부와 서부는 가야산(伽倻山, 1,430m)의 지맥이 뻗어 험준한 산지를 이루고 있다. 이천이 면의 중앙부를 남류하고 해평리 이남에서 넓은 충적평야를 형성하고 있다.

총 경지면적은 13.44㎢로 21.4를%, 임야면적은 43.36㎢로 69.1%를, 기타는 9.5%를 차지하고 있다. 경지 중 논이 9.9㎢로 73.7%를 차지하고 밭이 3.54㎢로 26.3%를 차지하며 논농사가 주류를 이루고 있다.

주요 산업은 농업으로 주곡생산 외에 참외 · 수박 · 땅콩의 생산이 많고 사과 · 포도 등의 과수와 그 외 콩 · 팥 · 고구마 · 감자 · 무 · 배추 · 호박 · 마늘 · 상추 · 땅콩 등의 작물이 생산되고, 대추 · 도토리 등의 임산물이 생산된다. 특히 운정리의 대암마을은 참외 · 수박의 촉성재배로 많은 소득을 올려 부촌을 이루고 있다.

도로는 변산∼대구간의 국도가 면의 남쪽 경계를 따라 성주와 연결되고 있으나 교통은 불편하다. 문화유적으로 해평리에는 월회당과 벽진장군유허비(碧珍將軍遺墟碑)가, 자산리에는 안산영당이, 매수리에는 기우제를 지내면 효험이 생긴다는 태자암(太子巖)이 있다. 이 밖에도 해평리에 측백나무가 있다. 해평리에는 성산여씨(星山呂氏)의 동족마을이 있다.

교육기관으로는 초등학교 1개 교, 중학교 1개 교가 있다. 해평(海平) · 봉계(鳳溪) · 매수(梅水) · 외기(外基) · 봉학(鳳鶴) · 용암(龍巖) · 자산(紫山) · 운정(雲亭) · 가암(伽巖) 등 9개 리가 있다.

  1. 선남면(船南面)

군의 동부에 위치한 면. 면적 67.08㎢, 인구 6,469명(2015년 현재). 면 소재지는 관화리이다. 조선시대에 도남방(道南坊)과 화곡방(禾谷坊)이 합해져 남곡면(南谷面), 오도방(吾道坊)과 산남방(山南坊)이 합해져 오산면(吾山面)으로 불렸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두 면이 통합되어 선남면이 되었다. 1983년 다시 행정구역 개편이 있어 노석리가 칠곡군 약목면에 편입되었고, 용암면 유서리가 이 면에 편입되었다.

면의 대부분이 구릉성 산지로 되어 있으며, 남서 경계에는 성산(星山, 389m)이, 북동경계에는 도고산(道高山, 349m)이 솟아 있다. 동부에는 낙동강이 면계를 이루고 남류하면서 넓은 충적평야를 형성하고, 그 지류인 백천연안에도 충적평야가 형성되어 있다.

총 경지면적은 18.21㎢로 27.1%를, 임야면적은 37.06㎢로 55.2%를, 기타는 17.3%를 차지하고 있다. 경지 중 논이 11.79㎢로 64.7%를 차지하고 밭이 6.42㎢로 35.3%를 차지하며 논농사가 주류를 이루고 있다.

주요 산업은 농업으로 주곡생산과 함께 무 · 오이 · 배추 · 양파 · 당근 등의 소채류가 생산된다. 그 밖에 배 · 참외 · 수박 · 사과 · 포도 등이 생산되며, 대추 · 토석류의 임산물도 생산된다. 관화리의 말티마을은 오이재배단지가 이루어져 있다. 장학리의 은동마을 주변에는 과거에 은광이 있었으며 도성리에는 선남농공단지가 조성되어 있다.

도로는 변산∼대구간 국도가 면의 남부를 통과하며, 군도가 왜관∼고령과 연결되어 있어 교통은 편리하다. 문화유적은 성원리에 이정현유허비(李廷賢遺墟碑)가 있고, 신부리에는 성산성(星山城)터가 있다. 문방리에는 철종 때 세워진 도산서당과 도암사(道巖祠) 유지가 있다.

교육기관으로는 초등학교 2개 교, 중학교 1개 교, 고등학교 1개 교가 있다. 관화(官花) · 용신(龍新) · 도흥(道興) · 선원(仙源) · 소학(巢鶴) · 도성(道成) · 동암(東巖) · 유서(柳西) · 취곡(翠谷) · 신부(新夫) · 성원(星元) · 문방(文方) · 오도(吾道) · 명포(明浦) · 장학(壯學) 등 15개 리가 있다.

  1. 수륜면(修倫面)

군의 남부에 위치한 면. 면적 89.75㎢, 인구 3,184명(2015년 현재). 면 소재지는 신파리이다. 본래 조선시대에는 청파방(靑坡坊) · 대리방(大理坊) · 지사면(志士面) · 법산면(法山面)으로 나뉘어 있었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청파방 · 대리방을 청파면으로, 지사면 · 법산면이 지사면으로 합병되어 2개 면이 되었다. 1934년에 청파면 · 지사면이 합해져 수륜면으로 개칭되었고, 1983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고령군 덕곡면 성리가 편입되었다.

이 면의 서단에는 가야산이 있어 그 산록부가 서부의 대부분을 차지하며, 동부는 이보다 낮은 산지로 이루어져 있다. 이 두 산지간을 북서에서 남동으로 대가천(大伽川)이 관류하며 그 연안에 충적평야를 형성하고 있다.

총 경지면적은 15.06㎢로 16.8%를, 임야면적은 65.08㎢로 72.5%를, 기타는 10.7%를 차지하고 있다. 경지 중 논이 11.74㎢로 78%를 차지하고 밭이 3.32㎢로 22%를 차지하며 노농사가 주류를 이루고 있다.

주요 산업은 농업으로 미곡생산이 군내에서 가장 많고, 그 외에 밀 · 옥수수 · 감자 · 콩 · 참외 · 가지 · 토마토 · 상추 · 미나리 등의 소채류가 재배된다. 참깨 · 잎담배 등의 특용작물재배, 사과 · 복숭아 등의 과수재배도 많은 편이며, 호두 · 대추 · 산수유 · 표고버섯 등의 임산물이 생산된다. 수성리의 상추 · 쑥갓 · 배추 · 부추 · 신선초 등의 신선채소가 유명하다.

백운리의 북두림(北斗林)에서는 도자기 원료인 고령토가 생산되며, 봉양리의 큰밭골은 목장으로 개간되어 꽃사슴이 사육되고 있을 만큼 각종 목축업의 적지이다.

도로는 고성∼선산을 잇는 국도가 면의 중앙을 남북으로 통과하며, 신정리에서 수륜∼남면간의 군도와 신파리에서 거창∼김천간의 지방도가 연결되어 있어 교통은 편리하다. 문화유적은 신정리에 회연서원이, 오천리에 사창서당이, 수륜리에 덕봉사(德峰寺)가 있다.

백운리에는 통일신라시대의 거찰(巨刹)인 법수사지가 있으며, 삼층석탑과 당간지주 · 시식대(施食臺)가 남아 있다. 가야산에는 임진왜란 때 쌓은 가야산성이 있다. 보월리에는 통일신라시대의 삼층석탑이 있으며, 적송리의 학동마을 뒷산의 우거진 송림은 학의 서식지로 널리 알려져 있다.

교육기관으로는 초등학교 1개 교, 중학교 1개 교가 있다. 신파(新坡) · 백운(白雲) · 적송(赤松) · 봉양(鳳陽) · 신정(新亭) · 수성(水成) · 송계(松溪) · 수륜(修倫) · 성(聖) · 오천(午川) · 계정(溪亭) · 남은(南隱) · 보월(甫月) · 작은(鵲隱) 등 14개 리가 있다.

  1. 용암면(龍巖面)

군의 남서부에 위치한 면. 면적 85.10㎢, 인구 3,839명(2015년 현재). 면 소재지는 용정리이다. 본래는 대동면(大同面)이었으나,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두릉면(杜陵面) 일부와 화곡면(禾谷面) 일부가 병합되어 용두면(龍頭面)으로 개칭되었다. 1934년 행정구역 변경에 따라 성암면(聖巖面)과 병합되어, 용두와 성암의 양면 이름이 합해져 용암면이 되었다.

산지가 지배적인 면으로, 특히 면계를 따라 추산(楸山, 524m) · 칠봉산(七峰山, 517m) 등 높은 산이 분포하고 있다. 백천과 낙동강 지류의 상류부가 산간에 좁은 침식곡을 형성하고 있으나 낙동강과의 합류점 부근에는 후포평야(後浦平野)가 전개되어 있다.

총 경지면적은 15.93㎢로 18.7%를, 임야면적은 61.46㎢로 72.3%를, 기타는 9%를 차지하고 있다. 경지 중 논이 11.71㎢로 73.5%를 차지하고 밭이 4.22㎢로 26.5%를 차지하며 논농사가 주류를 이루고 있다.

주요 산업은 농업으로 주곡생산 외에 겉보리 · 무 · 배추 · 호박 · 참외 · 가지 · 참깨 등의 작물이 재배된다. 비닐하우스를 이용한 참외 · 수박의 재배로 소득이 높으며, 본리리에서는 특산품으로 유명한 명주 · 무명이 생산된다.

도로는 위천∼김천간의 지방도와 적중∼해평간의 지방도가 용정동에서 교차하여 고령 · 성주 · 왜관과 연결되어 있어 교통은 편리하다.

문화유적은 죽전리의 웅곡에 웅곡사(熊谷寺)가 있고, 대봉리에는 김주(金州) 싸움에서 조선 의사(義士)의 기개를 높인 이사룡(李士龍) 정려와 신도비가 있다.

교육기관으로는 초등학교 2개 교, 중학교 1개 교가 있다. 용정(龍亭) · 덕평(德坪) · 본리(本里) · 상언(上彦) · 선송(仙松) · 용계(龍溪) · 사곡(泗谷) · 동락(東洛) · 기산(基山) · 운산(雲山) · 문명(文明) · 중거(中巨) · 마월(麻月) · 계상(溪上) · 대봉(大鳳) · 상신(上新) · 죽전(竹田) 등 17개 리가 있다.

  1. 월항면(月恒面)

군의 북동부에 위치한 면. 면적 41.27㎢, 인구 3,490명(2015년 현재). 면 소재지는 안포리이다. 조선시대에는 망성(望星) · 당소(唐沼) · 유동(柳洞)의 3방(坊) 지역으로,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이들이 병합되어 월항면으로 개칭되었고 성주면 일부가 병합되었다.

동북부는 북부경계의 서진산을 최고봉으로 하여 대부분 산지로 이루어져 있으며, 남서부는 주로 평야지대이다. 초전면백마산(白馬山, 716m)에서 발원한 백천이 면의 남서부를 흐르고 대산리에서 이천과 합류한다. 백천의 양안에는 넓은 충적평야가 발달하고 있다. 용각리에는 죽지(竹池)라는 조그만 저수지가 조선시대부터 있었다.

총 경지면적은 13.22㎢로 32%를, 임야면적은 22.44㎢로 54.4%를, 기타는 13.6%를 차지하고 있다. 경지 중 논이 9.65㎢로 73%를 차지하고 밭이 3.57㎢로 27%를 차지하며 논농사의 비중이 높다.

주요 산업은 농업으로, 주곡생산과 수수 · 참외 · 수박 등의 과채류, 사과 · 복숭아 등의 과일류와 호박 · 마늘 · 파 · 상추 · 토란 등의 채소류가 재배된다.

도로는 고성∼선산간의 국도가 면의 남동부를 통과하며, 성주 · 왜관 · 대구를 연결하고, 벽진∼선남, 월항∼왜관간의 군도가 지나고 있어 교통은 편리하다. 문화유적으로 인촌리의 서진산 기슭에는 선석사가 있는데, 대웅전은 간결하고 소박한 맞배집으로, 본존불은 멀리 태봉을 바라보는 위치에 안치되어 있다.

태봉에는 세종대왕의 18왕자와 세손 단종의 태실이 있다. 대산리의 영취산에는 고려 때 보조국사(普照國師)가 왕명에 의하여 세운 감응사가 있고, 절 뒤에 있는 옥류정(玉流亭)은 약수로 유명하다. 대산리에는 성산이씨의 동족마을이 있다.

교육기관으로는 초등학교 2개 교가 있다. 안포(安浦) · 대산(大山) · 유월(柳月) · 용각(龍角) · 보암(甫巖) · 장산(長山) · 수죽(水竹) · 지방(池方) · 인촌(仁村) 등의 9개 리가 있다.

  1. 초전면(草田面)

군의 북부에 위치한 면. 면적 66.71㎢, 인구 5,004명(2015년 현재). 면 소재지는 대장리이다. 조선시대에는 유곡방(酉谷坊)이라 하였고,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유곡면 · 망성면(望星面)이 통합되어 풀이 무성한 풀밭이란 뜻으로 초전면이라 칭해졌다.

면의 대부분이 산지로 이루어져 있으나 북 · 서가 높고 남 · 동이 낮은 고도분포를 보인다. 면의 동북에는 금오산 줄기인 영암산(鈴巖山, 782m)이, 서북부에는 백마산(白馬山, 716m)이 솟아 있다. 동부에는 부상고개에서 발원하는 백천이 남북으로 흐르고 동포리 부근에 넓은 충적평야를 형성하고 있다.

총 경지면적은 14.55㎢로 21.8%를, 임야면적은 45.43㎢로 68.1%를, 기타는 10.1%를 차지하고 있다. 경지 중 논이 10.28㎢로 70.7%를 차지하고 밭이 4.27㎢로 29.3%를 차지하여 논농사의 비율이 상당히 높은 편이다.

주요 산업은 농업으로 주곡생산 외에 메밀 · 콩 · 팥 · 녹두 · 고구마 · 감자 · 파 · 당근 · 상추 · 시금치 · 오이 등 잡곡 · 서류 · 채소류의 생산이 많으며, 참외 · 수박 · 사과 · 복숭아 · 포도 등의 과일과 잎담배 · 참깨 등의 특용작물이 생산된다. 그 외 대추 · 호두 등의 임산물이 생산된다. 고산리의 양지뜸마을에서는 특수작물과 가축을 길러 소득을 올리고 있다.

도로는 위천∼김천간 지방도가 면을 남북으로 관통하며, 수륜∼남면간의 군도와 벽진∼선남간의 군도가 면의 동부와 남부를 지나고 있어 교통은 편리하다.

문화유적은 고산리 음달뜸마을에 1919년 3·1운동 당시 성주군 유림들이 모여 독립운동을 모의하던 장소로 1551년(명종 때) 야계송희규가 지은 백세각(百世閣)이 있는데, 쇠못을 사용하지 않은 것이 특징이다.

월곡리 담뒤마을에는 제강서당(薺岡書堂)이, 뒷마을에는 문곡서당(汶谷書堂)이 있으며, 배나뭇골에는 창녕성씨의 종당인 창성당 등이 있다. 고산리에는 야성송씨(冶城宋氏)의 동족마을이 있다.

교육기관으로는 초등학교 2개 교, 중학교 1개 교가 있다. 대장(大獐) · 칠선(七仙) · 용성(龍星) · 문덕(文德) · 자양(紫陽) · 고산(高山) · 월곡(月谷) · 소성(韶成) · 용봉(龍鳳) · 봉정(鳳亭) · 동포(東浦) · 어산(漁山) 등 12개 리가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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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사(高麗史)』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성주읍지(星州邑誌)』
『성주군통계연보』(성주군, 2008)
『경북통계연보』(경상북도, 2005)
『지방행정구역요람』(행정자치부, 2003)
『한국관광자원총람』(한국관광공사, 1985)
『한국지지』지방편 Ⅲ(건설부국립지리원, 1985)
『경상북도지명유래총람』(경상북도교육위원회, 1984)
『경상북도사』(경상북도사편찬위원회, 1983)
『한국지명요람』(건설부국립지리원, 1982)
『내고장 성주』(성주군, 1982)
『하천』(건설부, 1979)
『한국지명총람』(한글학회, 1979)
『경북향토지』(경상북도교육위원회, 1972)
성주군(www.seongju.g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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