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여산(礪山). 자는 명중(明仲), 호는 이암(頤菴). 영의정 송질(宋軼)의 손자이며, 송지한(宋之翰)의 아들이고, 어머니는 의령남씨이다. 어려서 어머니가 죽자 외가에서 자랐다.
10세에 중종의 셋째 서녀인 정순옹주(貞順翁主)와 결혼하여 여성위(礪城尉)가 되고, 명종 때 여성군(礪城君)에 봉해졌다. 의빈부·충훈부·사옹원·상의원 등에서 요직을 역임하고, 도총관에 이르렀다. 시문에 능하였으며 이황(李滉)·조식(曺植)·정렴(鄭𥖝)·이이(李珥)·성혼(成渾) 등 당대의 석학들과 교유하였으며, 만년에는 선조의 자문 역할을 하였다.
글과 글씨에 능하여 산릉(山陵)의 지(誌)와 궁전의 액(額)으로부터 사대부의 비갈(碑碣)에 이르기까지 많은 글과 글씨를 남겼다. 송인은 특히 오흥(吳興)의 필법을 받아 해서를 잘 썼다고 한다. 저서로는 『이암유고(頤菴遺稿)』 12권 4책이 있다. 그의 글씨는 양주의 덕흥대원군신도비(德興大院君神道碑)·송지한묘갈(宋之翰墓碣), 남원의 황산대첩비(荒山大捷碑), 부안의 김석옥묘비(金錫沃墓碑), 여주의 김공석묘갈(金公奭墓碣), 남양의 영상홍언필비(領相洪彦弼碑), 광주(廣州)의 좌참찬심광언비(左參贊沈光彦碑) 등에 전한다. 시호는 문단(文端)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