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안사지 석조여래좌상은 통일신라 때 번창한 사찰인 승안사의 옛 절터에 있다. 석불이 위치한 승안사에 관한 사항은 1530년(중종 25)에 편찬된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과 1799년(정조 23)에 간행된 『범우고(梵宇攷)』를 통해서 살필 수 있는데,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사찰이 존재하는 것으로 나와 있고 『범우고』에는 사찰이 이미 없어졌다고 기록하였다. 따라서 승안사는 적어도 16세기까지는 존재하다가 18세기 말 이전에 폐사되었음을 알 수 있다.
승안사지 석조여래좌상은 승안사지 사역 북쪽에 자리한 보호각 내에 봉안되어 있다. 불상의 크기는 2.8m이며 하체 부분은 파손되어 있다. 불상의 머리는 머리카락 표현이 없는 소발(素髮)의 머리처럼 보인다. 하지만 자세히 관찰하면 소라 모양의 머리카락 형태인 나발(螺髮)의 흔적이 희미하게 남아있다. 머리 정상부에는 육계가 표현되어 있다. 머리를 포함한 상호는 타원형이며 이마의 중앙에는 백호공이 있다. 정면에서 불상의 상호를 보면 마모가 진행되어 나발의 형태가 명확하지 않다. 또한, 발제선 역시 잘 보이지 않으며 불상의 상호(相好)는 원래의 모습을 잃어 부처의 이미지보다 마치 나한의 얼굴을 표현한 것처럼 보인다. 불상의 머리는 절단되어 있었는데, 최근 목 위에 얹어 놓았다. 목에는 삼도가 표현되어 있었으나 마모되어 육안으로 확인하기 어렵다.
승안사지 석조여래좌상이 착용한 옷은 오른쪽 어깨를 드러낸 편단우견 형태의 법의(法衣)이다. 옷 주름은 사선을 그리며 규칙적으로 아래를 향해 배열되었다. 왼쪽 어깨 뒤편에는 몸 앞에서 넘긴 옷자락이 세로로 조각되어 있다. 왼팔은 부러져 있어 정확한 수인을 확인할 수 없다. 오른팔 역시 아랫 부분이 마모가 되어 있어 형태가 명확하지 않다. 허리 아래 부분도 파손이 심한 상태이다. 그런데 승안사지 석조여래좌상은 상호의 모습, 법의의 착용 형태, 오른쪽 팔과 옆구리 사이에 공간을 조성한 모습 등에 있어서 함양 석조여래좌상과 유사한 형태를 보이고 있다. 승안사지 석조여래좌상이 위치한 곳에서 직선거리로 약 8㎞ 정도 떨어진 함양중학교에 있는 함양 교산리 석조여래좌상은 청룡사 또는 용산사 터에서 옮겨온 석불이라 전하는데, 대좌를 포함해 전체 높이가 4m에 이르는 대형석불이다. 이 석불은 1963년 보물로 지정되었다. 승안사지 석조여래좌상의 파손된 수인을 함양 석조여래좌상과 비교해 보면 승안사지 석조여래좌상 역시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을 결하고 있음을 추정해 볼 수 있다.
한편, 승안사지 석조여래좌상이 있는 보호각에서 남쪽으로 약 40m 지점에는 1963년 보물로 지정된 승안사지 삼층석탑이 있다. 이 석탑은 평면 방형이며 이중기단을 갖추고 있는데, 조성 시기는 고려 전기로 추정된다. 인근의 함양 석조여래좌상 역시 고려 전기에 제작되었다. 따라서 승안사지 석조여래좌상도 이들과 비슷한 시기인 고려 전기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