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영산(靈山). 자는 영길(英吉), 호는 선석(仙石). 서울 출신. 신의정(辛義貞)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신진(辛鎭)이고, 아버지는 호조좌랑 신종원(辛宗遠)이다. 어머니는 홍담(洪曇)의 딸이다.
1601년(선조 34) 사마시에 합격하여 생원이 되었으나 벼슬에 뜻이 없어 예산으로 낙향하였다. 몇 년 뒤 부모상을 당했으며, 광해군의 난정에 혐오를 느껴 과거를 보지 않다가 1619년(광해군 11) 알성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같은 해 검열을 거쳐, 병조좌랑 · 예조좌랑 등을 역임하였다.
1624년(인조 2) 통신사 정립(鄭笠)의 종사관이 되어 일본에 건너가 도쿠가와 이에미쓰[德川家光]의 사립(嗣立)을 축하하고 이듬해 귀국하였다. 이 때 임진왜란 때 포로가 되어 잡혀간 조선인 146인을 데리고 돌아왔다. 당시 일본에서 겪은 감회를 읊은 기행시가 신계영의 시문집인 『선석유고(仙石遺稿)』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1634년 동부승지가 되었고, 1637년에는 병자호란 때 포로로 잡혀간 사람들을 대가를 지불하고 귀환시키는 속환사(贖還使)가 되어 심양에 다녀왔는데, 이 때 속환인 600여 인을 데리고 왔다.
그 뒤 나주목사 · 강화유수 등을 거쳐 전주부윤을 역임하였다. 1639년에는 볼모로 잡혀간 소현세자(昭顯世子)를 맞으러 부빈객(副賓客)으로 심양에 갔었고, 다시 1652년(효종 3)에 사은사(謝恩使)의 부사로 청나라에 다녀왔다.
1655년에 사직하고 고향에 돌아와 여생을 한운야학(閑雲野鶴)과 더불어 보냈다. 1665년(현종 6) 지중추부사가 되어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갔고, 1667년에는 판중추부사에 특제되었다. 시호는 정헌(靖憲)이다.
저서로는 시문집인 『선석유고(仙石遺稿)』가 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