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평산(平山). 자는 언여(言汝), 호는 양원(陽園)·노봉(蘆峰). 신희조(申羲朝)의 아들이다.
1877년 대과별시에 병과로 급제, 승문원부정자로 관직생활을 시작해 1878년 사간원정언, 1879년 홍문관부교리, 1881년 시강원문학 등을 지냈다.
1882년 통리기무아문주사를 거쳐, 다시 시강원문학이 되어 기무처(機務處)에 나가 수시로 영의정과 국정을 의논하였다. 관제개혁 때 통리내무아문참의가 되었다. 개화당 인물들과 밀접하게 교류했기 때문에 1884년 갑신정변 때 개화당 내각에 이조판서 겸 홍문관제학으로 참여하였다.
이로 인해 1886년 전라도 여도(呂島)에 유배되어 위리안치(圍籬安置: 죄인을 配所에서 달아나지 못하도록 가시로 울타리를 만들고 그 안에 가두어 둠)되었다. 1894년 갑오경장으로 풀려나 호조참판을 거쳐 김홍집 내각(金弘集內閣)의 공무대신이 되었다. 1895년 군부대신에 임명되면서 육군부장(陸軍副將)이 되었고, 중추원부의장을 거쳤다.
1896년 항일의병항전이 치열하게 전개되자 남로선유사(南路宣諭使)가 되어 지방에 내려가 선유활동을 하였다. 학부대신이 된 뒤에 단발, 양복 착용, 국문과 태양력 사용, 청나라에 대한 조공폐지 등을 반대하다 독립협회로부터 공격을 받았고, 얼마 뒤 사직하였다.
1897년 다시 중추원부의장을 지냈다. 1898년 법부대신이 되었을 때 나륙법(拏戮法)과 대역참형(大逆斬刑)을 복구하려다 다시 독립협회로부터 맹렬한 비난을 받고 고발, 탄핵되어 면직되었다. 이듬 해 1899년 학부대신에 임명되었다.
그 뒤 의정부참정, 1900년에 궁내부특진관·중추원의장, 1901년에 비서원경(秘書院卿)·법부대신·의정부찬정(議政府贊政), 1902년에 군부대신 등을 역임하였다. 1903년에 철도원총재가 되었으며, 1904년 보안회 회장이 되어 항일운동을 전개하다 일본경찰에 붙잡히기도 하였다.
의정부참정을 거쳐 1905년 함경도관찰사, 1906년 홍문관학사, 1907년 장례원경(掌禮院卿)·수학원장(修學院長) 등을 지냈다. 같은 해에 민병석(閔丙奭)·이용직(李容稙) 등과 함께 유도(儒道)로써 체(體)를 삼고 신학문으로 용(用)을 삼아 신구사상(新舊思想)의 합일을 목적으로 하는 대동학회(大東學會)를 창립, 회장이 되었다. 저서로는 『양원집(陽園集)』·『유학경위(儒學經緯)』가 있다. 시호는 문헌(文獻)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