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민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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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7년 서울에서 조직된 비밀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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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1907년 서울에서 조직된 비밀결사.
내용

전국적인 규모로서 국권을 회복하는 데 목적을 두었다. 1907년 4월 안창호(安昌浩)의 발기로 양기탁(梁起鐸)·전덕기(全德基)·이동휘(李東輝)·이동녕(李東寧)·이갑(李甲)·유동열(柳東說)·안창호 등 7인이 창건위원이 되고, 노백린(盧伯麟)·이승훈(李昇薰)·안태국(安泰國)·최광옥(崔光玉)·이시영(李始榮)·이회영(李會榮)·이상재(李商在)·윤치호(尹致昊)·이강(李剛)·조성환(曺成煥)·김구(金九)·신채호(申采浩)·박은식(朴殷植)·임치정(林蚩正)·이종호(李鍾浩)·주진수(朱鎭洙) 등이 중심이 되어 만들어졌다.

신민회의 창립 과정을 살피기 위해서는, 이에 앞서 존재했던 다섯 개의 비공식 애국집단 세력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첫째는 ≪대한매일신보 大韓每日申報≫를 중심으로 애국계몽운동을 전개하던 집단 세력이며, 둘째는 상동교회(尙洞敎會)를 중심으로 애국계몽운동을 전개하던 집단 세력이다. 셋째는 서북 지방과 서울 등지의 신흥 시민 세력이고, 넷째는 무관 출신으로서 애국계몽운동을 전개하던 집단 세력이며, 다섯째는 미주에 있던 공립협회(共立協會)의 집단 세력이다.

이 다섯 개 집단 인사들은 그들 세력의 역사적 배경이 같았기 때문에 몇몇을 제외하고는 거의 모두 서로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즉, 국내에서는 동학당에서 출발한 김구 등 몇 명과 미주 지역의 몇 사람을 제외하고는 모두가 독립협회(1896∼1898)의 청년 회원들이었다.

독립협회가 자주·민권·자강운동을 전개하던 시기에 그들은 주로 만민공동회운동에 앞장섰던 청소년들이었다. 그러나 1905년 이후에는 각자 관련 분야에서 국권 회복을 위한 실력양성운동으로서 교육구국운동을 중심으로 한 애국계몽운동을 전개하였다. 신민회는 위의 다섯 개 집단이 중핵이 되어 만든 국권회복 운동단체였다.

안창호·이강·임준기(林俊基) 등은 1906년 말∼1907년 초의 연휴 기간에, 미국 캘리포니아주 로스앤젤레스 남쪽 리버사이드(Riverside)에서 안창호가 생각해 낸 대한신민회를 조직하기로 합의하였다. 그리고 <대한신민회 취지서>와 <대한신민회 통용 장정>을 초안하였다.

그들은 이 결사의 목적에 비추어 미주에서 이 단체를 세우는 것은 의미가 없다고 판단하였다. 그리하여 본국에서 이 단체를 만들어야 한다는 데 합의하고, 본국에 파견할 대표로 안창호를 뽑았다. 안창호는 1907년 1월 20일경 샌프란시스코를 출발, 동경을 거쳐 1907년 2월 20일 서울에 도착하였다.

안창호는 귀국 후 ≪대한매일신보≫ 주필 양기탁을 방문하고 신민회 창립을 제의하였다. 안창호는 신민회를 비밀결사로 창립하자고 제안했고, 양기탁은 처음에 공개 단체로 창립하기를 희망하였다. 합의가 이루어지지 않아 즉각 창립에 들어가지 못했다가, 결국 양기탁이 비밀결사 조직에 동의하여 창립이 추진되었다.

양기탁은 당시 ≪대한매일신보≫ 주필과 국채보상기성회의 총무로서 국권회복을 위한 애국계몽운동의 유력한 지도자였다. 때문에 국내의 애국 인사들과 긴밀하게 유대 관계를 지속하고 있었고, 민중들로부터도 큰 존경을 받고 있었다.

반면에 당시의 안창호는 비록 개인적인 역량은 뛰어날 수 있어도 그 동안 성장한 국내의 애국계몽운동 세력 안에 자기의 기반을 가지고 있지 못하였다. 이 때문에 안창호는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 때의 동지인 양기탁을 중심으로 하여 1907년 4월 초 신민회를 창립한 것이다.

최초의 부서는 당수에 해당하는 총감독을 양기탁이 맡고, 총서기에 이동녕, 재무는 전덕기, 집행원은 안창호가 담당했다. 다른 창건위원들은 각 도의 총감을 맡았다. 안창호가 맡은 집행원의 직책은 국내 동지들이 추천한 신입회원의 자격 심사를 담당하는 것으로서, 최근의 용어로 표현하면 조직부장과 같다.

신민회 창립 후 창건위원들은 즉각 자기의 영향력 안에 있는 인사들을 신민회에 가입시켜, 1910년경 회원수는 약 800명에 달하였다. 이는 당시의 영향력 있는 애국계몽운동가들을 거의 모두 망라한 숫자였다. 비밀결사로서의 신민회는 한말의 지도적 인사들이 거의 모두 회원이 됨으로써, 전국적 규모의 막강한 영향력을 가진 애국계몽운동 단체가 되었다.

신민회는 <대한신민회 통용장정> 제2장 제1절에서 다음과 같이 목적을 규정하였다. 첫째, 궁극적 목적은 국권을 회복하여 자유 독립국을 세우고, 그 정치 체제는 공화정체(共和政體)로 하는 것이다. 신민회가 그들이 세우려고 한 자유 독립국의 정치 체제를 입헌군주국(立憲君主國)이 아닌 공화국으로 규정한 것은 사상적으로 큰 진전이었다.

독립협회 때에는 입헌군주국이 협회의 공식 목표였다. 국가의 성격이 공화국으로 바뀌어야 한다는 생각은 만민공동회의 몇몇 청년들 사이의 이상에 불과하였다. 그런데 신민회에 이르면 입헌군주국은 낡은 체제로 인식되고, 처음부터 국권이 회복되면 공화정을 세우려는 목표가 뚜렷하였다.

둘째, 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당장 힘이 없어 국권을 박탈당하였으므로 무엇보다 국권을 회복할 수 있는 ‘실력 양성’에 온 힘을 쏟아야 한다고 규정했다.

셋째, 실력을 양성하기 위해서는 국민을 새롭게 할 것을 주장하였다. 이것은 신민회가 민주주의 사상에 기초, 국가는 국민의 것이며 국가의 부강은 국가를 이루는 국민의 부강에서 나온다는 사상에 의거하고 있음을 나타낸다. 따라서, 그들의 실력 양성은 신민(新民)에 의한 민력 양성(民力養成)을 의미하였다.

넷째, 신민은 반드시 자기 스스로의 힘으로 하는 ‘자신(自新)’이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대한신민회 취지서>는 이 ‘자신’에 대해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우리들이 옛날로부터 자신치 못하여 악수악과(惡樹惡果)를 오늘날 거두게 되었으나, 오늘 진실로 자신할진대 선수선과(善樹善果)를 타일에 거둘지라. 오늘 나라를 위하는 길은 역시 자신뿐이니라.”

다섯째, 자신은 사회·국가·국민의 모든 부분에서 수행되어야 한다고 하였다.

그들은 <대한신민회 취지서>에서 민습의 완고에 대해서는 ‘신사상’이 시급하며, 민습의 우매에 대해서는 ‘신교육’이 시급하며, 열심의 냉각에 대해서는 ‘신제창’이 시급하다고 하였다. 또 원기의 소침에 대해서는 ‘신배양’이 시급하며, 도덕의 타락에 대해서는 ‘신윤리’가 시급하며, 문화의 쇠퇴에 대해서는 ‘신학술’이 시급하며, 실업의 부진에 대해서는 ‘신모범’이 시급하며, 정치의 부패에 대해서는 ‘신개혁’이 시급하다고 하였다.

여섯째, ‘자신’을 위한 방법으로서는 주로 다음과 같은 사업을 실행하려고 하였다.

① 신문·잡지와 서적을 펴내어 국민의 지식을 계발할 것, ② 각지에 계몽운동가들을 파견하여 국민의 정신을 각성시킬 것, ③ 우수한 학교를 설립하여 인재를 양성할 것, ④ 각지 학교의 교육 방침을 지도할 것, ⑤ 실업가에게 권고하여 영업 방침을 지도할 것, ⑥ 신민회 회원끼리 힘을 더해 실업장을 건설하여 실업계의 모범을 지을 것, ⑦ 국외에 무관학교를 설립하여 독립전쟁에 대비할 것, ⑧ 국외에 독립군기지를 건설하고 독립군을 창건할 것.

일곱째, 실력을 배양하는 동안 국권회복운동의 주체로서 신민회를 육성, 국내외를 가리지 않고 애국적인 동포를 하나로 단합시키며, 각 구역에 연락기관을 나누어 세워서 연락과 교통을 긴밀히 하려고 하였다.

여덟째, 실력이 배양되면 신민회가 앞장서고 ‘자신’한 국민이 ‘통일연합’하여 비폭력 또는 무력의 각종 방법으로 일제히 궐기, 국권을 회복하고 자유 문명국을 수립하려 하였다. 위의 신민회 목적과 이념 체계에서, 하위 수준의 목적은 차례로 상위 수준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방법의 구실을 했다고 볼 수 있다.

신민회 조직은 앞서 지적한 대로 비밀결사 조직이었다. 신민회를 공개 합법단체가 아닌 비밀결사로 만든 데는 다음과 같은 이유가 주요했다.

첫째 일제의 방해와 탄압을 가급적 적게 받으면서 국권회복운동을 효과적으로 수행하기 위해서였다. 둘째 일제의 법령이나 탄압 조치에 의해 해산당하지 않기 위해서였다. 셋째 일제가 한국을 식민지로 강점하는 경우에도 독립운동 추진의 핵심 단체로서의 역할을 다하기 위해서였다. 넷째 회원의 입회를 제한하고 엄선한 것은 일제 밀정의 침투를 방지하고, 다섯째 수구파와 그에 동조하는 일부 국민들의 반감과 방해를 받지 않기 위해서였다.

중앙에 회장·부회장·총감독·의사원(議事員)·재무원·집행원·감찰원을 두었다. 최고지도부로서 총감독은 사실상 신민회 전체를 총괄했으며, 의사원은 입법기관으로서 각 도별로 그 임원을 선정하였다. 재무원은 재무담당 총책임자였고, 집행원은 신입 회원의 자격 검사와 조직을 담당하는 총책임자였다. 감찰원은 회원의 기강을 감찰하는 직책이었다.

도에는 도총감(道總監)을 두고 각 도별 회원을 지휘하도록 했으며, 의결기관으로 평의원(評議員)을 두었다. 군에는 군감(郡監)을 두고, 의결기관으로서 평의원을 두었다. 군감 밑에는 반(班)을 편성했는데, 회원 60명마다 도반장(都班長)을 두고 20명마다 부반장을 두었으며, 5명마다 반장을 두었다. 5명 단위의 ‘반’조직이 신민회의 기본단위 조직이었다.

신민회의 가장 큰 특징은 비밀결사이면서도 중앙에서 군에 이르기까지 의결 기관을 두었다는 점이다. 또한 신민회의 조직은 종선으로만 이어지게 해서 당사자 2인 이상은 회원을 서로 알지 못하게 했고, 횡선으로는 누가 회원인지 전혀 모르게 하였다.

회원의 입회는 매우 엄격하게 심사해서 이루어졌다. 회원은 애국사상이 확고하고 국권 회복과 독립운동에 몸을 바칠 결심이 굳건한 인사에 한해 엄선하였다. 신민회 입회 때는 예식이 있고, 회원의 책임에 대한 서약이 있었다. 서약의 내용은, 회원의 생명과 재산을 신민회의 명령에 의해 국권 회복에 바치기로 한다는 것이었다.

회원은 약 800명 정도로서, 신민회가 일제 관헌의 가혹한 통제와 탄압 밑에서 조직된 지하정당임을 고려하면 많은 회원수였다. 이 숫자는 당시의 저명한 애국계몽운동가들 대부분을 망라하는 숫자였다. 신민회 조직의 사회적 기반은 105인사건 때 재판받은 인사들의 직업별 분포에서도 볼 수 있듯이, 신흥 시민층과 신지식인층에 기초를 두고 있었다.

105인사건 때 판결을 받은 122명의 신민회 회원의 직업별 분포를 보면, 상업이 31.97%, 광공업이 5.74%로서 시민층이 전체의 37.71%를 차지하고 있으며, 지식층은 교사가 22.95%, 학생이 15.57%로서 38.52%를 차지하고 있다. 즉, 시민층과 신지식층이 전체의 76.23%를 차지하고 있는 것이다. 그 밖에도 농업이 5.74%, 종교인과 공무·자유업이 각각 4.92%, 노동자가 1.64%이며, 기타 불명이 6.55%이다.

이것은 주로 시민층과 시민층의 지지를 받는 신지식인층이 중심이 되어 신민회가 조직되고 그 운동이 전개되었음을 나타낸다. 이는 신민회가 모든 민중을 대상으로 하여 만들어졌다고는 해도 그 성격은 시민적 특성을 강하게 지닌 것이었다고 볼 수 있다.

(1) 교육구국운동

국권을 회복하기 위한 민력 양성의 방법으로서 가장 많은 힘을 쏟은 운동이 신교육구국운동이다. 교육구국운동은 신민회가 창립될 당시 이미 시작된 상태였다. 그러나 이것이 열정적으로 불붙고, 1908년부터 전국적으로 신교육열이 팽창하여 민중들이 논밭을 팔면서 전국 방방곡곡에 신식학교를 세운 것은 신민회의 교육구국운동에 많은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다.

이 운동은 세 가지 측면에서 전개되었다. 첫째, 국민들에게 국권회복을 위한 신교육의 절실한 필요를 계몽, 학교를 세우고 신교육을 실시하도록 고취한다. 둘째 민중이 각지에 세운 학교의 교육 방침을 국권 회복에 적합하도록 지도한다. 셋째 신민회 자체가 우수한 학교를 세워 국권 회복을 위한 인재를 양성한다. 이 중에서 특히 주목되는 것이 셋째번의 학교 설립이다.

신민회가 민중이 세운 학교의 교육 방침을 지도만 하지 않고 스스로 학교를 세운 곳엔 세 가지 특징이 있었다. 첫째, 중학교를 세웠다. 민중이 자발적으로 기금을 모아 세운 학교들은 대부분 소규모의 소학교였다. 신민회는 이런 지역에 중학교를 세워서 소학교 출신 청년들에게 중등 교육을 시킴으로써 고급 신지식을 습득한 민족 간부를 양성해 국권회복에 도움이 되도록 하였다.

둘째, 학교의 ‘모범’을 만들었다. 전국 각지마다 중학교를 세울 수는 없으므로 중요 지역에 모범이 될 만한 중학교를 다수 세웠다. 민중에게 ‘모형’을 제시해 줌으로써, 민중이 이 모형을 보고 동일한 종류의 중학교를 자발적으로 세우도록 유도하기 위해서였다.

셋째, 이 중학교에서 동시에 사범교육을 실시해 교사를 양성했다. 신민회는 그들이 설립한 중학교에서 사범교육을 받은 청년들이 교사의 길을 걷도록 많은 힘을 썼다. 그리하여 그들이 전국 각지에 흩어져 학교를 세우고 청소년들에게 국권회복에 적합한 신교육을 시켜서, 교육구국운동이 전국적으로 파급되도록 하였다.

이러한 목적으로 설립한 학교들을 살펴보면, ① 정주의 오산학교(五山學校)·신안학교(新安學校), ② 평양의 대성학교(大成學校), ③ 강화 등지의 보창학교(普昌學校), ④ 의주의 양실학교(養實學校), ⑤ 납청정(納淸亭)의 가명학교(嘉明學校), ⑥ 안주의 협성안흥학교(協成安興學校), ⑦ 선천의 신흥학교(新興學校), ⑧ 곽산의 흥양학교(興襄學校), ⑨ 영흥의 명륜학교(明倫學校), ⑩ 경성의 경성학교(鏡城學校), ⑪ 안악의 양산학교(楊山學校)·안악군면학회사범강습소, ⑫ 서울의 협성학교(協成學校) 등이 대표적이다. 이 중에서도 평양의 대성학교와 강화의 보창학교는 유명했다.

대성학교는 국권회복운동 간부와 국민교육에 필요한 사부(師傅) 양성을 목표로 삼았다. 때문에 중학교로서의 완전한 시설을 갖추고 철저한 애국주의 신교육과 동시에 철저한 체육 교육과 사관 훈련을 시켰다.

한편 보창학교는 강화에 중학교 본교를 두고, 강화군 내에 21개의 소학교 분교를 두었다. 이 밖에도 개성·금천·장단·풍덕·안악·충주·함흥 등지에도 보창학교를 설립하였다. 각 지역의 보창학교는 대성학교에 비해 시설은 뒤떨어졌으나, 같은 계열의 학교를 전국적으로 설립해 나가면서 더욱 전투적인 애국주의 교육을 시킨 데 특징이 있다.

이 시기에 이동휘 1인이 세운 학교만도 100여 개나 되었다고 한다. 신민회의 학교 설립과 교육구국운동은 그 자체로서 상당한 성과를 냈다. 뿐만 아니라, 이 시대의 애국계몽운동 중의 신교육구국운동에 큰 기둥이 되고 그것을 실질적으로 주도하였다.

(2) 계몽강연·학회운동

신민회의 활동 중 가장 큰 성공을 거두고 활발하게 전개된 사업의 하나가 계몽 강연과 학회 활동이었다. 이 운동은 신민회의 취약점 중의 하나인 부족한 재정의 제약을 비교적 적게 받고도 진행할 수 있었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큰 성과를 거두었다.

신민회의 계몽 강연과 학회 활동에는 신민회의 모든 회원과 간부들이 전국 각지에서 적극 참여했는데, 그 활동은 매우 광범하였다. 당시 이름이 널리 알려졌던 학회로는, 안악군면학회(安岳郡勉學會)·해서교육총회(海西敎育總會)·평양청년권장회(平壤靑年勸奬會)·연학회(練學會)·동제회(同濟會)·서북학회 등이 대표적이었다. 신민회 회원들은 주로 각종 학회의 통상회와 토론회·강연회·친목회·학교·교회·운동회·기타 각종 집회를 활용, 큰 성과를 거두었다.

그들이 계몽 강연을 통해 고취한 것은 ① 애국주의, ② 국권 회복, ③ 민권 사상, ④ 신사상·신지식·신산업의 계몽, ⑤ 구습 타파, ⑥ 교육구국운동과 학교 설립의 고취, ⑦ 자발적 의무 교육 실시, ⑧ 학회 활동의 고취, ⑨ 민지(民志)의 단합 고취, ⑩ 실력 양성 호소 등이었다.

(3) 잡지·서적 출판운동

신민회는 기관지로 ≪대한매일신보≫를 활용하였다. 양기탁과 함께 논설위원과 사원들이 거의 모두 신민회 회원으로 가입해 ≪대한매일신보≫는 쉽게 신민회의 기관지로 전환되었다. 뿐만 아니라 양기탁이 주로 이곳에서 활동했기 때문에 신민회의 총본부 기능까지 겸하여 수행하게 되었다.

신민회는 잡지·출판운동으로서, 서울에서 최남선(崔南善)을 중심으로 하여 1908년 11월에 잡지 ≪소년 少年≫을 창간하였다. 종래 ≪소년≫지는 최남선의 개인 잡지로서 많이 알려졌으나, 일제 관헌의 조사 자료가 밝히는 것처럼 신민회의 기관지로 창간되어 활동하였다. ≪소년≫지가 105인사건과 때를 같이해 폐간된 것도 이 때문이다.

신민회가 1909년 9월에 청년학우회(靑年學友會)를 창립하자, ≪소년≫지는 청년학우회 기관지로 전환되었다. 신민회가 비밀결사였기 때문에 ≪소년≫지는 공공연히 신민회의 기관지임을 내세우지 못했지만, 청년학우회는 신민회의 합법 외곽단체였으므로 ≪소년≫지는 대내외에 청년학우회 기관지임을 내세웠다. ≪소년≫지는 몇 차례 발행이 정지되는 수난을 겪으면서도 청년들의 국권회복 의식 계발에 큰 성과를 거두었다.

출판 사업은 외곽 단체로서 1910년에 조직된 조선광문회(朝鮮光文會)의 활동이 두드러졌다. 이 단체는 신민회 회원 중 민족문화와 근대 국사학의 창립에 관심을 가지고 고전의 보존과 간행을 주장하는 회원들의 요청에 의해 만들어졌다. 조선광문회의 조직은 ① 고문, ②주간, ③ 종사(從事)로 편성되었다.

고문에는 유근(柳瑾)·박은식(朴殷植) 등을 추대해 도서의 선택 등 정책 결정을 담당하도록 하고, 주간은 최남선이 담당해 이 회의 사무를 총관하였다. 종사는 주간 밑에서 편집과 교감(校勘) 등 일체의 회무를 처리하였다. 조선광문회는 창립 후 한국의 귀중한 고전들을 출판하는 데 큰 성과를 내었다. 그 밖에 서점 겸 출판소로서 평양에 태극서관(太極書館)을, 안악에 면학서포(勉學書舖)를 설립하여 도서 공급을 맡도록 하였다.

(4) 민족산업진흥운동

신민회는 일제의 경제 침략을 군사 침략과 마찬가지로 극히 위험시하였다. 때문에 신교육과 한가지로 민족 산업을 진흥하는 것도 실력을 양성하는 길임을 특히 강조해 이 부문의 사업을 매우 중시하였다. 그들은 민족 산업의 진흥을 위해 우선 신민회 회원들이 출자해서 ‘본보기’ 공장과 회사를 세우기로 하였다. 이를 실업가들에게 제시하고, 그들의 영업 방침을 지도함으로써 민족 산업자본의 발흥을 촉진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신민회가 이러한 목적으로 설립한 대표적인 실업체는 평양자기제조주식회사·협성동사(協成同事)·상무동사(商務同事)·조선실업회사, 안악의 소방직공장(小紡織工場)·연초공장, 사리원의 모범농촌 등이다. 그러나 신민회의 민족산업진흥운동은 민족 자본이 취약한 상태에서 일제의 대독점자본의 압력을 받고 그에 대항해야 했으므로 교육구국운동과 같은 큰 성과는 내지 못했다.

(5) 청년운동

신민회는 국권회복운동의 주체를 국민으로 보았지만, 세대별로는 청년층이 그 핵심체가 되어야 한다고 보았다. 때문에 청년운동을 독립시켜 전개하게 되었다. 신민회의 청년운동은 주로 청년학우회를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청년학우회는 신민회 중앙본부에 의해 1909년 8월 신민회의 합법적인 외곽 단체로서 조직되었다. 청년학우회는 중앙총회 외에 한성연회(漢城聯會)·평양연회·의주연회·안주연회 등 지방조직을 정비하였다. 그 밖에 곽산·선천·용천·진남포 등지에서 지방 연회를 세우기로 뜻을 모았으나 1910년 8월 일제의 병탄을 맞게 되었다.

청년학우회운동은 의기는 높았으나 민족산업진흥운동과 비슷하게 큰 성과는 내지 못하였다. 그 이유는 무엇보다도 신민회의 실력이 부족해, 청년단체를 너무 늦게 만들었기 때문이었다.

(6) 무관학교 설립과 독립군기지 창건운동

신민회는 국내의 활동에만 뜻을 두지 않았다. 국외에 무관학교(武官學校)를 설립하고 독립군기지를 창건, 기회가 오면 독립전쟁을 일으켜서 내외의 호응을 얻어 단숨에 일본 제국주의를 물리치고 실력으로 국권을 회복하려고 하였다.

신민회가 국외에 무관학교 설립과 독립군기지 창건 문제를 최초로 검토한 것은 1907년 8월이었다. 일제가 1907년 7월 31일 대한제국 군대를 강제 해산하고 그 이튿 날 해산식이 있자, 해산당한 군인의 일부가 봉기해서 의병운동에 합류, 의병전쟁을 전개하게 되었다. 신민회는 이 의병운동을 지지하였다.

신민회가 의병운동에서 문제삼은 것은 일본 정규군과 대전할 때 반드시 갖추어야 할 현대적 군사훈련과 무기였다. 신민회는 의병운동이 성공하려면 무엇보다 현대화가 필요하다는 걸 절감하고 있었다. 그러나 신민회는 1907년부터 1908년 말까지 의병운동의 문제점을 정확히 파악했으면서도 이에 대한 대책을 세우지 못했다. 그 이유는, 첫째 신민회의 실력이 부족했고, 둘째 이 시기에 의병운동이 고양되어 성과를 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신민회가 국외의 무관학교 설립과 독립군기지 창건을 본격적으로 논의한 것은 의병운동이 퇴조기에 들어간 1909년 봄이었다. 신민회는 총감독 양기탁의 집에서 전국 간부회의를 열고, 국외에 적당한 후보지를 골라 무관학교를 세우고 독립군기지를 창립, 현대전에서 이길 수 있는 강력한 독립군을 양성하기로 뜻을 모았다.

그러나 이 사업이 채 실천에 들어가기도 전인 1909년 10월 안중근(安重根)이 이토(伊藤博文)를 총살한 사건이 일어났다. 일제는 안중근과의 관련 혐의로 안창호·이동휘·유동열·이종호·김희선(金羲善) 등 다수의 신민회 간부들을 구속하였다가, 이듬 해인 1910년 2월에야 석방하였다.

1910년 3월, 신민회는 긴급간부회의를 열어서 ‘독립전쟁전략’을 채택하고, 무관학교 설립과 독립군기지 창건운동을 본격적으로 시작하였다. 신민회가 이때 결정한 독립군기지 창건사업과 독립전쟁전략의 골자는 다음과 같다.

① 독립군기지는 일제의 통치력이 미치지 않는 청국령 만주 일대에 설치하되, 후일 독립군의 국내 진입에 가장 편리한 지대를 최적지로서 선정한다. ② 최적지가 선정되면 자금을 모아 일정 면적의 토지를 구입, 이에 필요한 자금은 국내에서 신민회 조직을 통해 비밀리에 모금한다. 또한 이주민에게도 어느 정도의 자금을 휴대하도록 한다.

③ 토지를 구입하면 국내에서 애국적 인사들과 애국 청년들을 계획적으로 단체 이주시켜 신영토로서의 신한민촌(新韓民村)을 건설한다. ④ 새로 건설된 신한민촌에는 민단(民團)을 조직하고 학교와 교회, 기타 문화시설을 세우는 한편, 무엇보다 특히 무관학교를 설립하여 문무쌍전교육(文武雙全敎育)을 실시해 사관(士官)을 양성한다.

⑤ 무관학교에서 독립군 사관이 양성되면, 이들과 이주 애국 청년들을 중심으로 강력한 독립군을 창건한다. 독립군 장교는 현대적 장교 훈련과 전략전술을 습득한 무관학교 출신 사관으로 편성하며, 병사들 역시 모두 무관학교에서 현대 군사교육과 전략전술을 익히는 정병주의(精兵主義) 군사훈련을 채택한다. 이는 일본 정규군과의 현대전에서 승리할 수 있는 강력한 현대적 독립군을 양성하는 데 꼭 필요한 조치였다.

⑥ 강력한 독립군이 양성되면 최적의 기회를 포착, 독립전쟁을 일으켜 국내에 진입한다. 최적의 기회는 일본 제국주의의 힘이 더욱 커지고 침략 야욕이 팽배하여 만주 지역이나 태평양 지역까지 집어삼키려고 할 때 불가피하게 일어날 중일전쟁·러일전쟁·미일전쟁 중으로 추정했다. 일제에게도 힘겨운 전쟁이 될 것이므로 이 기회를 재빨리 잡아서 그 동안 국외에서 양성한 독립군을 국내로 들여보내고, 국내에서는 신민회가 주체가 되어 내외 호응해서 일거에 봉기, 실력으로 일본 제국주의를 물리치고 국권을 회복하기로 하였다.

무관학교와 독립군 창건, 독립전쟁 전략 등은, 크게 볼 때 일제의 식민지 강점책이 진전되는 것에 대한 신민회의 응전이었다. 그것은 종래의 갑신정변·동학혁명운동·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운동을 비판적으로 검토하고, 애국계몽운동과 의병운동을 실제 경험에 의해 종합 지양하여 한 단계 더 발전시킨 개화자강파적 전략이며, 한국 근대민족운동의 여러 가지 전략들의 총결론과 같았다.

신민회는 만주에 무관학교와 독립군기지를 만들기 위해 1910년 4월 안창호·이갑·유동열·신채호·김희선·이종호·김지간(金志侃) 등을 출국시켰다. 1910년 가을에는 이동녕·주진수 등이 만주 일대를 비밀리에 답사하여 후보지를 선정하고, 1910년 12월부터 선발대인 이동녕·이회영 조가 비밀리에 독립군기지 건설을 위한 단체 이주를 시작하였다.

신민회는 1911년 봄에 대대적인 단체 이주를 실행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움직임을 포착한 일제가 1911년 1월에 ‘안악사건(安岳事件)’과 ‘양기탁 등 보안법위반사건’, 같은 해 9월에 소위 ‘데라우치(寺內正毅) 총독 암살음모사건’ 등을 날조하여 신민 회원을 대량 체포하였다.

국내의 신민회가 일제의 탄압으로 해체되는 중에도, 신민회 회원들은 1911년 이른 봄만주 봉천성 유하현 삼원보(柳河縣三源堡)에 신한민촌을 건설하고 신흥무관학교(新興武官學校)를 세우는 데 성공하였다. 이 무관학교는 만주 군벌의 탄압을 피하기 위해 처음에는 신흥강습소로 불렀다가 뒤에 신흥무관학교로 이름을 바꾸었다. 신흥(新興)이란 ‘신민회가 흥국(興國)한다’는 뜻이다.

신민회 회원들은 온갖 고초를 겪으면서도 신흥무관학교를 크게 발전시켰다. 이 무관학교에서는 4년제 본과 외에 6개월·3개월의 속성과를 두어 찾아오는 모든 애국 청년들과 의병들에게 철저한 현대식 군사교육과 군사훈련을 시켰다. 1917년에는 통화현(通化縣)의 소북대(小北岱)에 분교를 설치할 만큼 크게 발전하였다.

이 밖에 1913년에 이동휘 등이 중심이 되어 왕청현 나자구(汪淸縣羅子溝)에 동림무관학교(東林武官學校)를, 밀산현 봉밀산자(密山縣蜂蜜山子)에 밀산무관학교(密山武官學校)를 세우는 데 성공하였다. 신민회는 결국 세 개의 무관학교와 독립군기지를 창건하는 데 성공한 것이다.

신민회의 무관학교 설립과 독립군기지 창건운동은 국내의 신민회가 해체되는 도중에 진행되어, 원래의 계획대로 이루어지지 못하고 부분적으로만 성공하였다. 그러나 이 세 곳의 무관학교와 독립군기지 창건은 그 뒤 만주에서의 독립군 창건의 모체가 되었다.

신민회 회원들이 세운 무관학교에서는 무엇보다 철저한 애국주의로 정신 무장을 시켰다. 그런 상태에서 현대적 사관 교육을 받은 장교와 병사들이 체계적으로 양성되어 이들을 중심으로 현대적 독립군이 편성되었다. 의병들도 재훈련되어 현대적 독립군의 대원으로 발전하였다. 이렇게 만들어진 독립군은 과거의 의병과는 달리 일본 정규군을 현대전에서 능가할 수 있는 막강한 힘을 가지고 있었다.

처음 신민회가 창건한 독립군은 사병이 부족해 장교 중심의 소규모 부대로 꾸려나갔다. 그러나 3·1운동 후 국내에서 청소년들이 물밀듯이 찾아오자 이들을 훈련해 대규모 독립군단을 편성, 청산리전투에서 볼 수 있듯이 만주 도처에서 일본 정규군을 상대로 크고 작은 독립전쟁을 전개해 승리를 거둘 수 있었다.

일제는 1911년 1월 안악군을 중심으로 하여 황해도 일대의 애국적 지도자 160여 명을 검거하였다. 이와 동시에 양기탁·임치정·주진수·이동휘·이승훈·고정화(高貞華)·김도희(金道熙)·옥관빈 등 17명도 검거하였다.

또한, 1911년 9월에는 소위 ‘데라우치총독 암살음모사건’이란 것을 날조, 신민회 평안남북도지회 회원을 비롯해 전국의 지도적 애국계몽운동가 700여 명을 검거해 온갖 고문을 가하고, 그 중 105명에게는 실형을 선고하였다. 이 과정에서 국권회복을 목표로 한 한국인 애국자들의 지하단체가 신민회라는 이름으로 결성되어 있었음이 드러나, 신민회는 일제에 의해 해체되고 만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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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주한인 민족운동사연구』(박환, 일조각, 19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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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민회와 대한매일신보의 민족운동」(신용하, 『산운사학』 4, 1990)
「신민회의 독립군기지창건운동」(신용하, 『한국문화』 4, 1983)
「신민회의 창건과 그 국권회부운동 상·하」(신용하, 『한국학보』8·9, 1977)
「한말 신민회에 관한 연구」(이재순, 『이대사원』14, 1977)
「新民會の活動と百五人事件」(姜在彦, 『辛亥革命の硏究』, 19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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