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 광주 출생. 건국 초 국회의장 익희(翼熙)의 장남이다. 1941년 중국 상해 광화대학(光華大學) 상과를 졸업하였다.
중일전쟁 중인 1941년 중국 국민정부 감찰원위임관을 비롯하여 국민정부군의 소교복무원(少校服務員:소령급문관), 중앙은행 과원조장(科員組長), 중앙신탁국조장(中央信託局組長) 등 직책을 가졌다.
전쟁 말기에는 충칭(重慶) 대한민국임시정부에서 한국광복군에 입대하여 전지공작·초모공작 훈련 등 독립운동을 계속하여 정위(正尉)가 되었다.
뒤늦게 중국에서 귀국하자 한때 한국연건기업(韓國聯建企業) 사장으로 사업계에 투신하였고, 1955년에는 한국외국어대학 강사로 있었다. 그의 정계 진출은 아버지가 민주당 대통령후보로서 선거유세차 전주로 내려가던 호남선열차 안에서 사망한 뒤부터였다.
당시 국회의원이기도 한 선친의 뒤를 이어 경기도 광주(廣州)보궐선거에서 무소속으로 출마, 제3대 국회진출의 첫발을 내디딘 데 이어 4·19혁명 뒤인 1960년의 제5대 국회의원선거에서도 역시 무소속으로 출마, 당선되었다.
그 뒤 민주당 분당과 함께 민주당 구파인 신민당(新民黨)에 들어갔으며 5·16군사정변 이후인 1963년의 제6대 국회의원선거에서도 지난날의 민주당 구파가 주류를 이룬 민정당(民政黨) 후보로 당선되었다.
그는 민정당 경기도당위원장에 이어 통합야당인 민중당 정치훈련원장을 지냈다. 광주 유권자들은 1948년 신익희의 제헌의원선거 무투표당선으로부터 1967년의 제6대 국회 임기 말에 이르기까지 제4대 국회의원선거에서 자유당(自由黨)의 최인규(崔仁圭) 외에는 줄곧 신씨 부자(申氏父子)에게 표를 던진 셈이 된다.
그는 서예에도 뛰어났다. 1958년 귀국기념서예전에서는 한국 최초로 중국고대의 해서체(楷書體)인 학보자비체(學寶子碑體)를 소개한 데 이어 몇 차례의 서예전을 열었다.
1950년대 중반 서울특별시 종로구 인사동의 민주당중앙당사 간판을 신익희가 썼듯이, 그는 1960년대 중반 관훈동의 민중당중앙당사 간판에 그의 필적을 남겼다. 1990년 독립운동의 공적으로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