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원특별자치도 삼척지방에 있었던 것으로 비정된다. ‘실직곡국(悉直谷國)’으로 표기되기도 한다.
『삼국사기(三國史記)』의 102년(파사이사금 23) 기사에 따르면 “음즙벌국(音汁伐國)과 실직국(悉直國)이 영역을 다투어 (파사)왕에게 해결을 청하였다. 이에 왕이 난처하여 금관국(金官國) 수로왕(首露王)이 연로하고 지혜롭다하여 불러 물었다. 수로가 의견을 내어 분쟁지를 음즙벌국에 주도록 하였다. 이에 왕은 육부에 명하여 모여서 수로를 위해 향연을 베풀게 하였는데, 오부(五部)는 모두 이찬을 접대 주인으로 삼았으나 오직 한기부(漢岐部)만이 미천한 자를 향연에 참여케 하였다. 수로가 노하여 거느리고 있던 탐하리(耽下里)라는 노비에게 명하여 한기부주인 보제(保齊)를 죽이고 돌아갔다. 그 노비는 도망하여 읍즙벌주(音汁伐主) 타추간(陀鄒干)의 집에 머물게 되었다. (파사)왕이 사람을 보내어 그 노비를 찾았지만 타추가 보내지 아니하였다. 이에 왕이 노하여 군사를 동원하여 음즙벌국을 공격하니, 그 우두머리가 무리와 함께 스스로 항복하였다. 이에 실직과 압독(押督) 두 나라 왕이 항복해왔다.”라고 한다.
해당 기사에 분쟁국인 음즙벌국은 『삼국사기』 지리지 ‘양주조(良州條)’와 『삼국유사(三國遺事)』 왕력(王曆)의 제6 지마이사금(祗摩尼師今)조 기사를 통해 볼 때, 현재 경상북도 안강과 포항일대에 비정할 수 있다. 실직국은 『삼국사기』 지리지 ‘명주(溟州)조에 “삼척군은 원래 실직국으로 파사왕 때 항복해 왔는데, 지증왕 6년 주(州)를 설치하고 이사부(異斯夫)를 군주(軍主)로 삼았다.”는 기사에 의해 강원특별자치도 삼척으로 비정한다.
그러나 2세기대 진한의 사회 상황을 고려해 보면, 원거리에 위치한 두 소국이 영역 분쟁을 할 수 없다는 입장에서 실직국을 경주시 인근 곧 한기부 일대라거나, 현 경주시 북천면, 흥해나 안강 또는 경주삼척일대, 삼척청하일대, 삼척~영일만일대, 동해안 일대 등에 비정하기도 한다.
한편, 『삼국사기』의 기사와 당시 정세를 합리적으로 연계하려는 입장에서 음즙벌국과 분쟁을 일으킨 집단은 삼척 실직국에서 남하한 예(穢) 집단이라거나 실직국이 동해안으로 남하하며 중간 기착지이자 거점으로 삼은 곳이 실직곡국이라는 견해도 있다. 이러한 견해는 ‘진솔선예백장동인(晉率善穢伯長銅印)’이 영일군 신광면 일대에서 발견된 것을 근거로 삼기도 한다.
반면 「진흥왕창녕순수비」의 수가인명의 ‘우추실직아서아군행사대등(于抽悉直阿西阿郡行使大等)’ 직명 기사를 주목하여 실직이 삼척이라는 점을 재확인하고, 비록 양국이 상호 원거리에 위치하였지만 인접한 영토 분쟁이라기 보다 원거리 해상교역권을 놓고 일어난 분쟁으로 보기도 한다.
그런데 이와 같은 음즙벌국과 실직국의 영토 분쟁은 최종적으로 사로국의 음즙벌국의 병합에 뒤이어 실직국과 압독국의 항복으로 이어졌다. 이를 계기로 사로국은 울산만-영일만을 거쳐 북방의 삼척만에 이르는 동해 연안 해로를 장악할 수 있었다. 이를 통해 사로국은 김해를 중심으로 하는 가야제국과의 경쟁에서 밀리지 않은 국력을 갖추게 되었고, 이후 내륙을 통한 서북 방향 진출에 대한 배후 안정을 확보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