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년 보물로 지정되었다. 비단바탕에 채색. 세로 160.3㎝, 가로 87.7㎝. 윤두서는 매일 함께 어울리며 학문을 강마하던 친구 심득경이 1710년 8월 21일 38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나자, 그해 11월 그를 추념(追念)하여 이 초상을 그렸다.
남태응(南泰膺)의 「청죽화사(聽竹畵史)」에는 이 초상에 얽힌 일화가 수록되었다. 이 기록에 의하면, 윤두서와 심득경은 금석(金石)의 사귐을 하였다. 심득경이 죽자 윤두서는 그의 모습을 생각하여 화상을 그렸는데, 터럭 하나 틀리지 않았다. 이것을 그 집에 보내 벽에 걸었더니 온 집안 사람들이 놀라서 울었다. 마치 죽은 이가 되살아 온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화면 상단에는 예서로 “정재처사심공진”이라는 제목이 적혀있다. 그 아래에 심득경을 그리는 이서(李漵)의 글이 좌우에 적혀 있다. 화면 하단에는 윤두서의 관서가 적혀있다. 글씨를 쓴 사람은 윤두서이다. 평소 심득경과 돈독한 우정을 나누었던 윤두서, 이서가 그를 추모하여 함께 제작한 초상화이다.
심득경은 동파관(東坡冠)에 도포 차림을 하였다. 손을 앞에 모으고 얼굴을 7분면 정도 오른쪽으로 틀고 의자에 앉아 있는 모습이다. 심득경의 인상은 인자하고 내성적이다. 눈은 맑고 코는 단정하며 입술은 붉고 눈썹은 가지런하다. 피부는 깨끗하고 귀는 시원하며 살쩍(관자놀이와 귀 사이에 난 머리털)은 성글고 수염은 깨끗하고 간결하다. 윤두서의 자화상만큼 사실적이지는 않으며 도식적으로 그려진 부분에서 판화의 영향도 눈에 띈다. 이는 심득경이 사망한 후 기억에 의지해 그렸기 때문이다. 그러나 심득경이 지닌 맑고 깨끗한 처사의 정신세계를 잘 표현하고 있다.
이서(李潊)가 쓴 초상 찬문에 이르기를, “그 상(像)은 단아하고 공근(恭勤)하며, 목소리는 맑고 모습은 근엄하며, 그 생생함이 완연하고 방불하여, 그 성정(性情)과 덕의 성실함을 알 수 있다”고 하였다. 이러한 심득경의 선비로서의 깔끔하고 단정한 용모가 윤두서의 필력에 의해 그 내면적 정신세계의 표현에까지 이르렀다고 할 수 있다.
심득경초상은 윤두서의 「자화상」, 「노승도」와 함께 18세기 초를 대표하는 인물화로서 평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