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8년 보물로 지정되었다. 17세기경. 비단 바탕에 채색. 세로 167㎝, 가로 89㎝.
정탁의 자는 자정(子精), 호는 약포(藥圃)이며, 예천 출신이다. 1526년(중종 21년)에 출생하여 1558년 문과에 급제, 5조판서와 좌·우의정을 모두 역임한 인물이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좌찬성으로 왕을 의주까지 호종하였으며, 정유재란 때는 동궁을 호종하였고, 옥중의 이순신이 죄가 없음을 아뢰어 구원하는 등 주요한 역할을 하였다. 1603년에는 영중추부사에 오르고, 이듬해 1604년에는 호성공신(扈聖功臣) 3등에 녹훈되었으며, 서원부원군(西原府院君)에 봉해졌다. 현재 정완진 소장의 이 정탁상은 바로 호성공신책록을 기념하여 선조(宣祖)의 왕명에 의해 그려진 공신상(功臣像)이다.
초상의 얼굴은 오른쪽을 바라보는 칠분면[左顔七分面]에 오사모(烏紗帽), 단령(團領)의 관복(官服)을 입고 의자에 앉은 전신상[全身坐像]이다.
손을 앞으로 모은 공수(拱手) 자세와 족좌대(足座臺) 위에 한껏 벌린 양발의 놓임새, 바닥에 깔린 화려한 색감과 문양의 채전(彩氈: 카펫)은 조선 중기 공신상의 한 전형을 보여 준다.
단령에는 쌍공작문양의 흉배(胸背)가 부착되어 있으며, 서대(犀帶)를 둘렀는데, 이것은 초상화가 그려질 당시 정탁의 품계가 정1품이었음을 말해 준다.
얼굴 표현은 갈색선으로 이목구비 및 주름 선을 묘사한 뒤, 음영을 약간 주었다. 경사(經史)는 물론 천문, 지리, 상수, 병가(兵家)에 이르기까지 정통했던 노대신(老大臣)의 면모가 매서운 눈매와 굳게 다문 입의 표현에 그대로 나타나 있다. 삼각형으로 접혀진 단령이 대개의 17세기 공신상과 같이 위로 뻗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약간 뉘어져 있고, 단령의 윤곽선이 흐르는 듯 유연하게 표현되는 등 색다른 특징을 보여 초상화의 제작시기에 대해서는 단정지을 수 없다.
정탁초상에는 “경연에서 우연히 듣고 유상(遺像)을 가져다 보니, 그 상이 우뚝 빼어난 선조의 이름난 재상이네. 백년 후에 대궐에 들어왔으니 특별히 그 제명을 하여 사람들을 격려하노라[筵中偶聞, 取覽遺像. 厥相偉然, 穆廟名相. 百年之後, 入于楓宸. 特題其銘, 以聳嶺人]”라는 어제화상찬(御製畵像贊)이 적혀 있다. 이것은 1756년(영조32) 9월 초6일에 영조대왕이 친히 초상화 찬문을 짓고, 당시 승지로 입시해 있던 정옥(鄭玉: 정탁의 5대손)에게 명하여 정옥이 이를 받들어 적어 놓은 것이다. 이 사실은 『영조실록』(88권, 32년 9월 경오조)에도 “고 상신 정탁의 화상에 대한 찬을 친히 지어 정탁의 5대손 정옥에게 내렸다. 이때 정옥이 승지로 입시했기 때문이었다(親製故相鄭琢畵像贊, 賜琢五代孫玉. 時以承旨入侍也)”라고 기재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