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제주(濟州). 자는 공섭(公燮), 호는 송천(松川). 양담(梁湛)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양이하(梁以河)이고, 아버지는 교리 양팽손(梁彭孫)이다. 어머니는 금산김씨(錦山金氏)로, 김화(金話)의 딸이다. 동래부사 양응태(梁應台)의 아우이다.
1540년(중종 35) 생원시에 장원으로 합격하고, 1552년(명종 7)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검열(檢閱)이 되었다. 공조좌랑으로 1556년 중시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호당(湖堂: 독서당의 다른 이름으로 신하들에게 학문을 권장하기 위하여 독서할 수 있도록 만든 장소)에 들어갔다.
그 이듬해 공조좌랑으로 있을 때 당시 권신이었던 윤원형(尹元衡)에 의하여 김홍도(金弘度)와 함께 탄핵을 받고 파직당하였다가, 1560년에 다시 복직되었다. 그 뒤 수찬(修撰)·진주목사를 거쳐 1574년(선조 7) 경주부윤으로 재직 중, 진주목사로 있을 당시 청렴하지 못하였다는 대간의 탄핵으로 파직되었다.
1578년에 공조참판으로 기용되어 성절사로 명나라에 갔으나, 부정을 저질렀다는 이유로 다시 파직되었다가 대사성에 복직되었다. 시문에 능하여 선조 때 8문장의 한 사람으로 뽑혔으며 효행으로 정문이 세워졌다. 저서로는 『송천집』·『용성창수록(龍城唱酬錄)』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