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주 소놀이굿은 경기도 양주 일대에서 전승되고 있는 굿 형식의 연희이다. 1980년 중요무형문화재(현, 중요무형유산)로 지정되었다. 소굿·쇠굿·소놀음굿·마부타령굿 등으로 불린다. 집안에 재수가 형통하기를 바라는 경사굿의 일부로 제석거리에 이어 행해진다. 양주 소놀이굿은 소놀이굿 보유자들이 팽수천이라는 사람에게 배워 전하고 있다. 단순한 농경의례나 무속에서 벗어나 연희의 성격을 갖춘 놀이의 모습을 보여준다. 무당과 원마부·곁마부 사이의 대화와 타령(가사)으로 굿이 진행된다. 이는 일찍이 농경의례에서 발전한 연희의 하나로 주목할 만한 유산이다.
1980년 중요무형유산로 지정되었다. 소굿 · 쇠굿 · 소놀음굿 · 마부타령굿 등으로 불리기도 하며, 경사(慶事)굿의 일부로 제석거리에 이어 행해진다.
「양주소놀이굿」은 단순한 농경의례나 무속에서 벗어나 무당과 원마부 · 곁마부 사이의 대화와 타령(가사)으로 진행되며, 연희의 성격을 갖춘 놀이이다. 따라서 일찍이 농경국가로 정착해 온 우리나라의 농경의례에서 발전한 연희의 하나로 주목할 만한 문화유산이다.
양주 일대에 전승되고 있는 이 놀이의 기원에 대하여 현지 연희자들 사이에 구전하는 바를 정리하면 다음 다섯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① 양주지방에서 신산(神山)으로 여기는 감악산(紺岳山)의 감악사(紺岳祠)에서 나왔다. ② 농경의례의 하나로 풍년을 빌던 의례에서 유래했다. ③ 소장수가 잘 되기를 바라던 데서 나왔다. ④ 궁중의례에서 비롯되었다. ⑤ 굿의 여흥으로 이루어졌다. 그러나 이들은 모두 소놀이굿 기원의 배경은 될 수 있겠으나, 직접적인 발생의 근거는 되지 못한다.
현재 양주 일대에 전승되어 오는 소놀이굿은 다른 지방에서 배워 온 것인지, 또는 양주지방의 무속에서 형성된 것인지도 확인되지 않은 채, 소놀이굿 보유자들이 팽수천(彭壽天)으로부터 배워 전하고 있다. 팽수천은 어려서부터 무당인 작은어머니의 굿에 따라 다녀 무가(巫歌)를 잘 알았고, 나중에는 작은어머니의 신딸 이씨(李氏)와 재혼하여 무당서방이 되었다고 한다. 또, 염불 · 타령 · 소놀이굿 외에 수많은 무가 · 잡가를 잘하였고, 여러 사람들에게 노래를 가르쳐 주었다고 한다.
그는 양주공립보통학교(楊州公立普通學校)를 3학년에 중퇴하였을 뿐 달리 학력이 없다. 오늘날 전하는 소놀이굿 대사(가사)는 대단히 세련되어 있기 때문에 이를 그의 창작으로 보기는 어렵다. 그러므로 이 소놀이굿의 발생과 형성에 대하여서는 더 이상 알 수 없고, 다만 거의 전국적으로 분포되어 있는 ‘우마숭배’와 농경의례인 ‘소멕이놀이’에 그 기원을 두고, 무속의 ‘제석거리’와 마마배송굿의 ‘마부타령’의 자극을 받아 형성된 것으로 추측하고 있을 뿐이다.
소놀이굿의 마부를 지냈거나 구경한 일이 있는 관람자들의 증언에 의하면, 소놀이굿이 행해진 곳으로는 경기도의 양주 · 파주 · 연천 · 고양 · 장단 · 포천 · 시흥, 황해도의 연백 · 봉산 · 신계 · 곡산 · 신금천 · 평산, 평안남도의 평양, 강원도의 원주, 서울의 왕십리 · 노량진, 충청북도의 진천군 진천읍 · 이월면 동성리 등이 있다. 대체로 기호(畿湖)와 해서(海西) 지방에 분포되어 있는데, 충청북도 지방에 분포하는 것은 과거 영남 소장수들이 서울로 올라갈 때의 노정과 관련된 것으로 보인다.
그들은 경상북도 상주에서 떠나 보은→청주→진천→이월(梨月)들→광혜원(廣惠院)→안성→용인→수원→광나루→서울의 경로로 서울에 도착하거나, 광혜원에서 죽산→용인을 거치거나, 아니면 죽산에서 여주나 이천 쪽으로 하여 서울로 당도하였다고 한다. 현재는 양주지방 외에는 소놀이굿이 전하는 곳이 없으므로, 이들 분포 지역에 따른 변이 양상을 알 수가 없다. 다만 충청북도 진천의 경우 소의 모양이 양주의 것과 비슷했다는 것을 알 수 있을 뿐이다.
「양주소놀이굿」은 환자가 생겨 악귀를 쫓고 달래는 우환굿과는 달리, 잘 되라고 하는 경사굿에 속하는 것으로 오락 · 예능적인 기능이 강하다. 이 소놀이굿은 단독으로 행해지는 것이 아니라 제석거리에 이어서 노는 것이다. 그러나 그 소리 내용과 진행 방식은 소놀이굿이 제석거리에 종속된 일부가 아니라 독립된 하나의 연희임을 보여준다. 그러므로 소놀이굿은 제석거리의 연장으로 발생한 것이 아니라, 독자적 형식의 ‘소놀이굿’이라는 놀이가 경사굿의 제석거리와 결합되어 현전하는 연희 형태를 갖춘 것으로 보인다.
소놀이굿이 무의(巫儀) 열두거리 중에서 특별히 제석거리와 결합하게 된 이유는, 제석거리가 자손창성과 수명장수를 비는 것이며, 제석항아리의 곡신적(穀神的) 성격에서도 볼 수 있듯이 농경의례적인 요소가 불교적 요소와 습합되어 있는 점 등에서 소놀이굿의 성격과 비슷했기 때문일 것으로 추측된다.
소놀이굿의 진행은 무당과 마부와의 대화, 마부의 타령(唱)과 덕담, 마부의 동작과 춤, 소의 동작 등으로 엮어진다. 이 때 무의나 판소리가 거의 무당이나 광대의 독연(獨演) 형태인 데 비하여, 소놀이굿은 마부와 무당과의 대화 형식으로 진행된다. 그리고 무당과 악사, 마부와 곁마부, 가장(假裝)한 소와 많은 구경꾼의 참가로 이루어진다.
내용은 마부가 부르는 타령이 주가 되는데, 이는 잡가의 일종으로 볼 수 있는 극히 세련된 평민 가사체의 노래로서, 「누가 나를 찾나」 · 「마부 노정기(路程記)」 · 「보물타령」 · 「마부 대령 인사」 · 「소의 머리 치레」 · 「절[寺] 타령」 · 「소뿔 치레」 · 「소귀 치레」 · 「소눈 치레」 · 「소입 치레」 · 「소이 치레」 · 「소혀 치레」 · 「소꼬리 치레」 · 「소다리 치레」 · 「소굽 치레」 · 「소모색(毛色) 치레」 · 「소 글 가르치기」 · 「마부 복식 치레」 · 「소의 굴레 치레」 · 「잡곡 타령」 · 「소흥정타령」 · 「말뚝타령」 · 「소장수마누라타령」 · 「성주풀이」 · 「축원」 · 「살풀이」 순으로 진행된다.
이렇게 소리 대목의 연속이므로 서사적인 줄거리는 없다. 소놀이굿에 나오는 소는 고무래에 짚을 싸서 머리의 윤곽을 잡고 얼굴 모양을 백지에 그려 붙인다. 귀와 혀는 짚신이나 고무신 바닥으로 만들며, 고삐는 명주 또는 광목으로 한다. 소 몸뚱이는 큰 멍석을 반으로 접고 그 안에 5, 6인이 들어간다. 뿔은 짚을 꼬아 만든다. 송아지는 소(큰 소)와 같은 방법으로 만들되 치수가 작아, 한 사람이 짚 멍석을 뒤집어쓰고 고무래로 만든 소머리를 든다.
원마부는 검은 전립과 남색 전복을 입고 홍띠를 띠며 오른손에 삼신부채를 들고 왼손에 소의 고삐를 잡는다. 곁마부는 원마부와 같은 복색으로, 보통은 약식으로 복색을 갖추지 않다가 원마부와 교대하여 소놀이가 시작되면 복색을 갈아입는다. 손에는 채찍을 든다.
무당은 제석거리 때 입은 복색대로 흰 고깔을 쓰고 흰 장삼을 입으며, 오른손에 흰 제석부채를 든다. 조무(助巫)와 악사는 보통 무의의 복색과 같다. 반주 악기로는 장고 · 피리 · 해금을 사용한다. 1980년 중요무형문화재(현, 무형유산)로 지정되었으며, 현재 기예능보유자로는 김인기(金仁起: 원마부)와 고희정(高熙貞: 악사)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