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제주(濟州). 자는 길중(吉仲), 호는 지강(芝江). 전라남도 해남 출신. 양상태(梁相泰)의 아들이다.
1894년 탁지부주사(度支部主事)가 되어 능주세무관(綾州稅務官)으로 근무하다, 1897년 사직하였다. 그 뒤 북경(北京) 등지를 유람하고, 이듬해 일본에 건너가 일본의 국정과 세계 대세를 살폈다.
1902년 일본 나라[奈良]에서 망명중인 손병희(孫秉熙)·권동진(權東鎭)·오세창(吳世昌) 등의 권유로 동학(東學)에 입교하였다. 진보회(進步會)를 결성하여 구국민중운동을 지도하던 중, 1905년 이용구(李容九) 등이 친일파로 변절하자 이에 대항하여 이준(李儁)·윤효정(尹孝定)과 헌정연구회(憲政硏究會)를 조직하였다.
이듬해 손병희·권동진·오세창 등이 귀국하여 서울에 천도교 중앙총부를 두고 대헌을 발표하여 제도와 기관을 설립하자 집강진리과장(執綱眞理課長)·우봉도(右奉道)·법도사(法道師)를 지냈고, 또 윤효정·장지연(張志淵) 등과 헌정연구회의 후신인 대한자강회(大韓自强會)를 조직하여 일진회와 적극 투쟁하였다.
1910년 일제에게 강제로 나라를 빼앗기자 교육 진흥을 위하여 서울에 사범강습소(師範講習所)를 개설하는 한편, 보성전문학교(普成專門學校)·보성중학교·동덕여학교(同德女學校) 등의 경영에 참여하였다.
1911년 직무도사(職務道師)에 취임하였고, 이듬해 교리강습소를 개설, 천도교인 500여 명을 수련시키면서 강습과 집회를 통해 극렬한 배일사상을 고취, 함양시켰다.
교주 손병희를 보좌하여 국권 회복을 꾀하면서 안으로는 자체의 실력을 양성하고 밖으로는 국제 동향을 살피던 중, 1919년 3·1운동을 일으켜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으로 「독립선언서」에 서명하였다. 그 일로 붙잡혀 서대문감옥에서 옥사하였다. 저서로는 『동경연의(東經演義)』·『무체법경(無體法經)』이 있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