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영월(寧越). 자는 윤익(允翼), 호는 범재(凡齋). 엄석우(嚴錫愚)의 아들이다.
1864년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해 승정원가주서·부사정에 임명되었고, 다음 해에 주서가 되었다.
1866년에는 홍문관부수찬·남학교수(南學敎授)·부사과로 선전관·수찬 등을 역임하였다. 그 해 10월부터 1867년 4월까지 동지사(冬至使) 이풍익(李豐翼)의 서장관(書狀官)으로 임명되어 청나라에 다녀왔다. 귀국 후 부교리·교리·부수찬·부응교·사헌부집의·장악원정, 1868년에는 종친부정(宗親府正)·분승지(分承旨) 등을 역임하였다.
그 뒤 6년만에 발탁되어 전라우도암행어사로 임명되었고, 1875년과 1878년에 이조참의를지냈다. 1881년 2월 신사유람단의 한 사람으로 일본에 파견되었을 때, 수행원으로 엄석주(嚴錫周)·최성대(崔成大)를, 통사로 서문두(徐文斗) 등을 대동하였다.
이 때 엄세영이 시찰을 담당한 부서는 사법성(司法省)이었고, 이러한 일본 시찰이 토대가 되어 귀국 후 경리통리기무아문사(經理統理機務衙門事)로서 율례사당상(律例司堂上)이 되었다.
1882년에는 병조참판·한성부우윤, 임오군란 때에는 청군영접관(淸軍迎接官)·한성부좌윤·성균관대사성, 1883년에는 한성부우윤·이조참판·예조참판·호군으로 정부당상(政府堂上), 1884년에는 한성부좌윤·반접관(伴接官)을 역임하였다.
1885년에는 정부유사당상(政府有司堂上)으로 협판교섭통상사무(協辦交涉通商事務) 묄렌도르프(Mollendorf, 穆麟德)와 함께 거문도를 조사하였다. 1886년에는 감리인천항통상사무(監理仁川港通商事務)·인천부사, 1888년에는 행호군(行護軍)으로 정부당상, 1890년에는 사헌부대사헌·한성부우윤, 1891년에는 형조참판·한성부좌윤·병조참판, 1893년에는 사헌부대사헌·병조참판·형조참판을 역임하였다.
1894년 동학운동이 일어났던 시기에 행호군으로 삼남염찰사(三南廉察使)와 호남선무사로 임명되어 동학교도의 귀향을 주관하였다. 김홍집(金弘集) 내각 성립 후 두 차례에 걸쳐 농상아문대신(農商衙門大臣)·판중추부사를 지냈다. 1895년부터 1900년까지 중추원일등의관(中樞院一等議官)·경상북도관찰사·종일품관으로 궁내부특진관 등을 역임하였다.
편찬서로는 『일본문견록(日本聞見錄)』·『일본문견별단초(日本聞見別單草)』·『일본사법성시찰기(日本司法省視察記)』 등이 있다.
시호는 숙민(肅敏)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