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92년(선조 25) 정문부(鄭文孚)의 관민 합작 의병에 경원부사(慶源府使)로 참가해 차장이 되었다. 1595년 회령부사로서 여러 진(鎭)을 통제하지 못한다는 비변사(備邊司)의 탄핵을 받았다.
1597년 북병사(北兵使)로서 정병을 뽑아 남쪽으로 내려갔다. 그곳에서 변지(邊地)가 공허한 뒤 인심이 어수선하므로 방어에 대한 대책을 마련하고, 춘경(春耕)에 농민들이 들에 나갈 때 단천 이남의 군사잡류인(軍士雜類人) 등을 속히 뽑아 방어 진지를 더 만들어 나누어 운영해야 한다고 계청(啓請)하였다.
그 뒤 비망기(備望記: 잊어버리지 않기 위해 어떠한 사실들을 기록함)에 비루하고 미천한 사람으로서 북병사(北兵使)에 제수될 때 불만의 뜻을 표시했으며, 일 처리도 자기 멋대로 했으므로 체차(遞差: 관직을 다른 사람으로 교체시키거나 해임시킴)되어야 한다고 탄핵을 받았다.
전라병마사 이복남(李福男)과 함께 북상하는 왜적을 방어하는 명나라 군사를 돕기로 했으나 새로이 방어사로 임명되었기 때문에 참가하지 못하였다. 또 전라병사로서 지방을 버렸다는 이유로 장벌(杖罰)과 함께 사간원의 탄핵을 받아 파직되었다.
그러나 전라도의 들리는 소식이 오래 끊겨 적의 정세를 알 수 없다는 비변사의 계청에 따라, 군관교생(軍官校生) 왕종백(王宗伯)과 더불어 그곳에 가겠다고 자원하였다. 이에 왕종백은 제수받았으나, 오응태는 왕옥(王獄)에 연루되었다는 이유로 제수받지 못하다가 1598년에 충청수사에 임명되었다.
그 뒤 함경남도병사를 거쳐, 노량전(露梁戰)에 참여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추국을 당하기도 했으나 광해군 즉위년에 경상좌수사에 임명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