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4년 3월 과수원에서 중장비로 작업하던 중 간돌검과 민무늬토기조각을 발견, 신고함으로써 알려지게 되었다. 1994년 4월부터 1995년 4월까지 국립전주박물관에 의해 발굴조사되었다.
발굴조사 결과, 청동기시대의 주거지 2기와 분묘 8기(石蓋二段土壙墓 5기, 추정 石棺墓 1기, 土壙墓 2기), 원삼국시대의 주거지 1기와 원형 구덩이 1기가 확인되었다. 이 외에도 발굴 조사되지는 않았지만 제1차 조사 때 확인된 청동기시대의 움무덤[土壙墓] 6기(석개이단토광묘로 추정), 원삼국시대의 주거지 3기가 있다.
청동기시대의 주거지는 직경 363∼503㎝, 깊이 43∼76㎝의 원형 수혈주거지이다. 중앙에는 타원형 구덩이가 있고 벽을 따라 부분적으로 구(溝)가 있었다. 모두 화재로 폐기되어 탄화된 목재, 초목류 등이 바닥에 깔려 있었다.
유물은 주거지 바닥에서 민무늬토기 · 적색마연토기 · 갈돌 · 지석(砥石) · 석촉(石鏃) · 삼각형석도(三角形石刀) · 석제방추차(石製紡錘車) 등이 출토되었다. 특히, 제1호 주거지 내의 퇴적층에서 출토된 뚜껑형 민무늬토기 13점은 울산 검단리 유적 등에서 보이는 것과 유사성을 띠고 있다.
분묘 유구 중 석개이단토광묘는 평면 장방형으로 상단 묘광(上段墓廣)은 길이 110∼188㎝, 너비 75∼107㎝, 깊이 10∼30㎝이며, 하단 묘광은 길이 64∼154㎝, 너비 24∼40㎝, 깊이 32∼59㎝이다. 유구의 전체 깊이는 52∼69㎝이다.
시상(屍床)은 바닥에 작은 할석(割石)과 토기조각 등을 드문드문 깔거나 맨바닥으로 마련하였다. 하단 묘광의 어깨에 3∼4매의 판석을 덮은 후 다시 여러 매의 소판석 등으로 개석을 이중으로 덮고 있다. 제3호 유구에서는 목관의 흔적이 단면 토층상에서 뚜렷이 확인되기도 하였다.
유물은 시상 및 하단 토광의 상부에서 민무늬토기가 출토되거나 전혀 없는 등 빈약한 양상을 보여주고 있다. 또한 추정 돌널무덤[石棺墓]에서는 일단병식간돌검 · 민무늬토기조각 등이 출토되었다.
움무덤은 길이 193∼210㎝, 너비 100∼110㎝, 깊이 36㎝ 내외이다. 제8호 움무덤의 경우, 묘광 내의 하층부에서 민무늬토기와 적색마연토기, 상층부에서 단면원형점토대토기조각 등이 출토되었다.
원삼국시대 주거지는 평면 290㎝×270㎝, 깊이 50∼60㎝의 방형 수혈주거지로 내부에 기둥구멍 6개가 있다. 화재로 폐기된 주거지의 바닥에서는 다량의 목탄과 토기가 출토되었다.
유물은 남서쪽에 마련된 길이 60㎝, 깊이 10㎝의 장타원형 구덩이와 네 벽면에 치우쳐 시루 · 발형토기(鉢形土器) · 직구장동호(直口長胴壺) · 원저단경호(圓底短頸壺) · 주구토기(注口土器) · 숫돌 · 돌도끼 등이 출토되었다.
원형 구덩이는 직경 60㎝, 깊이 20㎝의 정원형 수혈구덩이로 주구토기, 장동옹(長胴甕) · 원저단경호 · 완형토기(盌形土器) 등이 1점씩 출토되었다.
청동기시대의 주거지는 구릉의 사면에, 분묘는 정상부에 밀집되어 분포하고 있다. 송국리형인 주거지는 주변 지역에서 알려진 부여 송국리, 전주 영의동, 익산 부송동 · 영등동 등과 연결되어, 전형적인 송국리형 주거지 중에서 대체로 이른 시기의 것으로 보인다.
분묘에 있어서 석개이단토광묘 역시 부여 송국리 유적 51·52지구 분묘군, 서천 오석리 유적 · 관산리 유적, 이웃한 전주 여의동 유적과 관련된다. 대체로 전주 여의동 유적보다는 선행하면서 송국리형 문화의 늦은 시기에 해당하는 서기전 4세기경으로 추정된다.
원삼국시대의 주거지 유구는 출토유물을 중심으로 보아 전주 여의동, 군산 여방리, 보성 죽산리, 승주 낙수리 · 대곡리 주거지 출토품과 연결되며, 전북 지역에서 몇 안 되는 원삼국시대의 주거 유적으로 중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