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진 봉평리 신라비 ( )

울진 봉평리 신라비
울진 봉평리 신라비
고대사
유적
문화재
경상북도 울진군 죽변면에 있는 삼국시대 신라 시기의 비. 국보.
정의
경상북도 울진군 죽변면에 있는 삼국시대 신라 시기의 비. 국보.
개설

1988년 국보로 지정되었다. 1988년 4월 경상북도 울진군 죽변면 봉평리에서 발견되었다. 비의 석질은 변성화강암으로 상태가 좋은 편은 아니며, 비의 제작 당시 이미 몇 군데 금이 나 있었으므로 이를 피해 글을 새겼다.

그러나 비가 지상에 노출되지 않고 오랫동안 땅속에 파묻혀 있었던 탓인지 파손 없이 거의 원형을 유지하고 있다. 비석으로 판명되기 전 돌을 옮기는 과정에서 포클레인에 의해 일부가 손상되었으나 비편도 발견되어 완형을 갖추고 있다. 한 면에만 약간의 인공을 가해 글자를 새겼다.

이 비가 발견된 울진지역은 조선시대 행정구역으로 강원도 울진현이며, 이곳과 관련된 비문상의 지명은 거벌모라(居伐牟羅), 남칭지촌(男称只村), 갈시조촌(葛尸條村), 아대혜촌(阿大兮村) 등으로 나타나고 있다. 이곳과 관련된 지명은 『대동여지도(大東輿地圖)』의 울진 바로 옆의 ‘건이치(建伊峙)’. 『여지도서(與地圖書)』 강원도 울진현의 산천조에 갈령(葛嶺)이 보이고 있어 연관성을 추측하게 한다. 또한『여지도서』 울진조의 각 면에 소속된 촌·리의 명칭 가운데 원남면(遠南面)에 소속된 ‘갈면리(葛面里)’란 명칭은 갈시조촌과의 상관성을 연상하게 하고 서면(西面)의 ‘남회룡리(南回龍里)’는 남칭지촌과의 관계를 상정하게 한다.

내용

비의 높이는 204㎝, 글자가 새겨진 면의 윗너비 32㎝, 가운데너비 36㎝, 밑너비 54.5㎝로 전체 모양은 사다리꼴에 가까운 부정형(不整形)이다.

비문의 구성은 전체 10행으로 행마다 글자 수가 달라 1행 31자(하부 일부가 파손되어 단정하기는 어려우나 그렇게 추정됨.), 2행 42자, 3행 41자, 4행 42자, 5행 25자, 6행 46자, 7행 45자, 8행 44자, 9행 40자, 10행 42자로 전체 글자 수는 모두 398자로 추정된다.

그러나 논자에 따라서는 1행을 32자 또는 33자로 보아 399자 또는 400자로 보기도 한다. 서체는 중국 남북조시대 북조풍(北朝風)의 해서(楷書)로 되어 있으나, 자획의 형태에는 예서(隷書)의 모습이 많이 남아 있다. 비문 자체는 대체로 양호하나 이자체(異字體)가 많고 또 일부는 마멸되어 읽기 어려운 글자가 30여 자에 달한다.

문체(文體) 또한 전형적인 한문이 아니라 신라식의 독특한 한문을 사용해 해석상 애매한 곳이 적지 않아 구체적인 내용 파악은 상당히 어렵다. 그 까닭으로 논자에 따라 견해 차이를 심하게 보이는 부분도 있지만 전체적인 윤곽은 대충 짐작할 만하다.

울진 지방이 신라의 영토로 편입된 뒤 이 비가 세워지기 얼마 전에 대군(大軍: 중앙군을 의미함)을 일으킬 만한 어떤 사건이 발생했고, 이 사건을 해결한 뒤 모즉지매금왕(牟卽智寐錦王: 법흥왕)과 13명의 신료들이 그에 대한 사후처리로서 이 지역에 모종의 조처를 취하고, 소(斑牛)를 죽이는 등 일정한 의식을 행하였다.

그리고 관련자에게 책임을 물어 장육십(杖六十)·장백(杖百) 등의 형을 부과하고 다시는 이러한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지방민에게 주지시킨다는 것이 내용의 줄거리이다.

비의 성격에 대해서는 국왕이 순행한 것으로 보고 순행비(巡行碑)로 보려는 견해가 있는가 하면, 율령에 관련되는 내용이 주류를 이룬 것으로 보아 율령비(律令碑)로 보려는 견해 등 한결같지가 않다.

비문의 전체적인 구조는 550년대에 건립된 단양 신라 적성비(丹陽新羅赤城碑)와 상당히 유사해 이들 사이에 어떤 공통성을 볼 수 있는데, 520년(법흥왕 7) 율령이 반포된 뒤 한동안 같은 성격의 비문 작성에 일정한 정형이 있음을 느끼게 한다.

특징

이 비는 지금까지 알려진 신라비보다 많은 글자 수를 보유해 내용이 풍부하고, 문헌사료에 보이지 않는 새로운 내용을 많이 담고 있다. 따라서 6세기를 전후한 신라사의 이해를 보다 심화시켜줄 수 있을 것이다.

첫째, 그 동안 많은 논란의 대상이 되어왔던 법흥왕 때의 율령을 둘러싼 문제들이 해명될 수 있는 실마리를 가지게 되었다. 비에는 영(令)뿐만 아니라 율(律)의 구체적인 내용으로 장육십·장백이 보여 법흥왕 7년에 반포한 율령의 실재를 믿을 수 있게 되었다. 또한 그것이 신라사회에 기능하는 폭넓은 내용을 가진 성문법전(成文法典)이었음을 확인할 수 있게 되었다.

특히, 노인법(奴人法)과 같은 율령의 한 편목(篇目)은 이 비의 성격문제와도 밀접하게 관련되는 것으로서, 신라에 복속된 지방민을 대상으로 한 율령의 편목이라 생각되나 구체적인 내용 구명은 앞으로의 과제라 하겠다. 여기서 노인(奴人)은 원래는 비신라계였다가 신라에 점령당해 포로로서 집단적으로 복속되면서 집단적으로 노예적 존재가 된 집단적 예속민으로 보인다. 노인법이란 이러한 집단적 예속민을 대상으로 한 법령으로 국가가 노인촌에 대해 일정한 책임을 부담지우는 것을 명문화한 것으로서 율령의 한 편목(篇目)이었을 것으로 보고 있다.

따라서 울진 봉평리 신라비를 세운 목적은 6세기 초 이래 영토를 확장해가는 과정에서 520년에 반포된 율령을 새로이 영토로 편입된 지역에도 시행함으로써 그 지역을 신라적인 지배질서로 전환하고자 하는 데에 있는 것으로 보는 것이다.

둘째, 지금까지 신라사의 이해를 위한 큰 고리의 하나는 왕경의 육부(六部)에 대한 문제였는데, 그 성립연대나 과정 및 성격 문제를 둘러싸고 논란이 많았다. 육부의 성립시기를 대체적으로 6세기 이후로 보는 견해가 유력하였다.

그러나 이 비에 신라 육부라는 말이 보이고 있어 성립 하한선이 6세기 초임을 알 수 있게 되었으며, 5세기 또는 그 이전으로 소급해볼 가능성도 높아졌다. 그리고 성격에 대해서도 일치된 견해가 없어, 이를 혈연적인 성격의 씨족 혹은 부족 조직으로 보거나, 아니면 왕도의 지역적 구분으로 보기도 하였다.

이 비에 국왕인 법흥왕은 탁부(啄部)를, 그의 동생인 사부지갈문왕(徙夫智葛文王, 立宗葛文王)은 사탁부(沙啄部)를 관칭(冠稱)해 형제가 부를 달리하고 있어 부의 성격을 전반적으로 새롭게 검토해볼 여지를 마련해준다. 이에 대해서 눌지왕대부터 탁부 소속의 매금왕이 사탁부까지 통합하여 정치적 영향력을 확대하였다고 보고 있다. 이사금 시기(尼師今時期)에 갈문왕에 봉해진 인물들은 주로 왕비나 왕모의 부(父)였다. 그러나 마립간 시기(麻立干時期)부터는 왕의 동생이나 친족이 갈문왕에 봉해지고 매금왕은 탁부에 갈문왕은 사탁부에 소속한 관행이 있었던 것으로 보고 있다. 또한 냉수리비와 봉평비를 통해 사탁부 소속의 관리들이 탁부 소속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관등을 보유하고 있으므로 사탁부가 매금왕의 직접적인 관할 아래 있었던 것으로 보고 있다.

셋째, 본피부(本彼部), 사피부(斯彼部), 잠탁부인(岑喙部人)이 칭한 간지(干支)를 부의 지배자인 부주(部主)로 볼 것인지, 아니면 단순하게 관등(官等)이나 직명(職名)의 의미로 이해해서 왕의 지휘와 감독을 받는 관리로 볼 것인가에 대한 논의가 있었다. 이 가운데 어느 견해를 취하느냐에 따라 6세기 초반 6부의 성격뿐만 아니라 당시 정치운영이나 지배구조에 대한 이해를 달리 할 수 있을 것이다. ‘∼부∼간지’의 성격을 부주로 이해하면, 당시 6부가 단위정치체로서의 성격을 지닌 부집단을 중심으로 국정이 운영되는 체제라고 규정할 수 있다. 반면 이들을 후자의 성격으로 이해한다면, 당시 6부는 단지 왕경의 행정구역으로만 기능하였고, 왕권이 권력의 중심에 있는 중앙집권적인 정치구조를 기초로 하는 사회였다고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넷째, 당시 국왕의 지위와 왕권의 실태를 파악할 수 있는 실마리를 제공하고 있다. 국왕도 부에 소속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다른 관료들과 동등한 자격으로 어떤 정책을 결정한 듯하다. 이는 당시 신라 국왕이 아직 초월적 권력자로 부상하지 못했음을 보여준다. 이 비는 그와 같은 국왕의 지위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의의와 평가

이 밖에 신라 17관등(官等)의 성립연대문제나 지방통치조직 및 촌락구조, 그리고 복속민에 대한 시책 등 사회 전반에 걸친 여러 면들을 재검토해볼 수 있는 실마리를 제공해 지금까지 알려진 어떠한 비보다 학문적으로 시사하는 바가 많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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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미디어 (2)
집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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