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중빈은 그의 나이 26세에 일원상(一圓相)의 진리를 대각하고, ‘진리적 종교의 신앙’과 ‘사실적 도덕의 훈련’으로써 파란고해(波瀾苦海)의 일체생령을 광대무량한 낙원으로 인도하기 위하여 개교한 것이라고 밝히고 있다(『정전(正典)』, 「개교의 동기」).
원불교 교명에 대하여 제2대 종법사인 송규(宋奎)는 “원(圓)이란 형이상으로 말하면 언어와 명상(名相)이 끊어진 자리라 무엇으로 이를 형용할 수 없으나, 형이하로써 말하면 우주만유가 이 원으로써 표현되어 있으니, 이는 곧 만법(萬法)의 근원인 동시에 또한 만법의 실재인지라, 이 천지 안에 있는 모든 교법이 비록 천만가지로 말은 달리하나 그 실(實)에 있어서는 원(圓) 이외에는 다시 한 법(法)도 없는 것이다”라고 밝혔다.
그리고 “불(佛)은 곧 깨닫는다(覺)는 말씀이요 또는 마음이라는 뜻이니 ‘원의 진리’가 아무리 원만하여 만법을 다 포함하였다 할지라도 깨닫는 마음이 없으면 다만 이는 빈 이치에 불과한 것이다. 그러므로 원불(圓佛) 두 글자는 각자 마음에서 근본적 진리를 깨친 바탕 위에서 나타낸 것이므로 서로 떠나지 못할 관계가 있다”라고 말하였다.
원불교는 그 연원을 불법에 두고 있으며, 시대에 맞는 새로운 불교이다. 그러나 외면상으로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차이는 신앙 대상의 상징이 다르며, 불교와의 역사적 교섭관계가 전혀 없다는 사실이다. 교단의 운영방식과 제도면에서도 종래의 사찰제도와는 다르게 운영되고 있다.
즉 근본적 진리는 서로 상통하나, 교단은 기존 불교의 분파적 입장이 아니다. 창조 · 모방 · 개혁을 시도하는 새로운 교단으로 볼 수 있다. 소태산은 불법을 주체로 삼아 새 종교를 주창하였는데, 그가 깨달은 일원상의 진리, 즉 법신불(法身佛)사상을 주체로 하고, 모든 종교의 장점을 취하여 시대화 · 생활화 · 대중화의 개혁을 시도한 것이다.
시대화란 어느 시대에 처하든지 불법을 그 시대에 맞게 구현하자는 것을 말한다. 시대적 변화에 잘 동화하면서도 높은 차원으로 사람들을 지도해나갈 수 있도록 불법을 응용하자는 뜻이다. 생활화란 생활 속에서 불법(佛法)을 찾고 깨달아서 그 불법으로 새 생활을 개척해 나가자는 것이다.
대중화란 민중화, 서민화 또는 시민화라고도 해석할 수 있다. 특수한 계층을 위한 불교가 아니라 누구나 다 같이 보람을 찾을 수 있도록 국한 없이 불법을 구현하자는 것이다. 원불교는 정신개벽(精神開闢)을 표방하고 있다. 다른 기성종교와는 달리 우리 나라에서 발생된 종교로서 후천개벽의 이념과 그 맥(脈)을 같이하고 있다.
최제우(崔濟愚) · 강일순(姜一淳) 이후 또 하나의 민중종교를 탄생시킨 소태산은, 앞으로의 세계는 동방이 중심이 되어 발전해가며, 특히 우리 나라가 그 중심국가가 될 것을 예견하였다.
‘정신의 지도국’ · ‘도덕의 부모국’이 되기 위해서는 먼저 인류 보편윤리에 입각한 민족정기(民族精氣)를 되살려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주인정신을 길러야 한다고 말하였다. 이러한 점에서 원불교는 다만 불교의 혁신에 그치지 않고 기성종교에 대하여 새종교의 출범이라 말할 수 있다.
소태산은 1891년 전남 영광군 백수면 길룡리에서 농민의 아들로 태어났다. 7세에 우주 자연현상에 대한 의문을 일으켰고, 9세 되던 해에는 인간만사에까지 큰 의심을 일으켰다. 이를 해결해보려고 산신과 도사를 찾기도 하였으며, 극진한 공을 드린 일도 있었다. 그러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스스로 기도와 고행을 15년 동안 행하였다.
15세에 양씨(梁氏)와 혼인하여 2남 1녀의 자녀를 두었지만, 계속하여 의문나는 일에 몰두하였다. 부모의 후원으로 가정을 겨우 지탱하여오다가 20세에 부친상을 당하자, 생활고는 더욱 심하게 되었다. 그는 마침내 “장차 이 일을 어찌할고” 하는 탄식과 더불어 오직 의심뿐 모든 것을 갑자기 다 잊어버리는 지경(頓忘狀態)에까지 이르렀다.
그러다 보니 온몸에 부스럼이 나고, 수염과 머리카락은 자랄 대로 자라 동네 사람들이 전염병에 걸린 것으로 생각할 정도로 험상궂게 변해 갔다. 이웃 사람들은 그를 완전한 폐인으로 인정하였다. 그러던 중 1916년 4월 28일 이른 아침, 문득 생각이 밝아지면서 온몸이 상쾌하여지고 모든 의심이 풀리기 시작하였다. 이것이 그의 대각의 경지였다.
소태산은 그때의 깨달음의 경지를 “만유가 한 체성(體性)이며 만법이 한 근원이로다. 이 가운데 생멸 없는 도와 인과보응되는 이치가 서로 바탕하여, 한 두렷한 기틀을 지었도다”라고 말하였다(대종경 서품 1장).
소태산은 우주 자연현상을 통하여 진리를 깨달은 그 순간 인간사 변혁도 절실하게 요청 받았다. 다가오는 세상의 인간화작업이 시급함을 느끼고 새 도덕의 확립을 모색하기에 이른다. 그는 ‘물질이 개벽되니 정신을 개벽하자’는 개교표어(開敎標語)를 내걸고 정신개벽의 기치를 쳐들었다.
소태산은 그가 태어난 고향을 떠나지 아니하고 구도(求道)하였으며 그곳에서 도를 이루었다. 또한 그가 창교이념을 실현한 곳도 고향이었다.
그는 1917년 고향에서 뜻 있는 동지들을 모아 저축조합을 조직하여, 근검절약과 허례폐지, 금주 · 금연과 숯장사라는 제1차 시련으로 경제적 기초를 세우고, 1918년 3월에는 조상 대대로 버려 둔 해변의 갯벌에 자력으로 방언공사(防堰工事)를 시작하여 제2차 시련을 감행하여 1년만에 2만 6,000평의 옥답을 개간하였다.
그 당시 쓰러져 가는 한민족 국가 사회에 생산기반을 조성하는 역할을 하였다. 원불교의 창립정신은 공익의 길로 나아가고자 함이었으며, 사람들을 모아서 일심합력으로 나아가면 장차 어떠한 큰 일이라도 이룰 수 있다는 신념을 기르기 위한 것이었다.
3·1운동이 한창이던 1919년 3월 소태산은 제2차 시련을 거친 제자들을 이끌고 새로운 회상(會上) 창립을 위하여 제3차 시련에 들어갔다. 소태산은 8인의 제자들을 이끌고 산상기도에 들어갔다. 그 해 8월 21일 마침내 백지혈인(白指血印)의 이적(異蹟)이 나타났다. 기도를 마칠 무렵, 흰 종이에 맨손으로 인장을 찍자 혈인이 나타난 사건이다.
소태산은 “무아봉공(無我奉公)의 참뜻이 법계(法界)의 인증을 받았으니 만사는 이로부터 비롯되었도다”라고 말하며, 이 백지혈인의 기적은 진리로부터 새 회상의 창립을 인가 받은 것으로 해석하였다.
소태산은 방언공사와 산상기도를 통하여 교단창립의 기초를 다진 것이었으며, 소태산과 그의 제자들은 그의 탄생지인 길룡리를 토대로 또 다시 회상 공개의 준비에 들어갔다. 도와 학이 겸비된 수제자 송규(宋奎)를 얻은 후 교법의 틀을 짜 갔다.
한편 1924년 4월 전북 익산군 북일면 신룡리(지금의 원불교중앙총부)에 총부를 건설하려고, 「불법연구회」라는 임시 명칭으로 교문(敎門)을 열었다. 여기에서도 그는 제자들과 6만여 평의 황무지를 개간하는 한편, 주경야독의 생활로 오늘의 원불교 터전을 닦아나갔다. 이 과정이야말로 원불교 창립의 제4차 시련이었다.
소태산은 당시 모여든 인재들을 정기훈련법과 상시훈련법을 제정하여 훈련, 육성시켰다. 낮에는 농업부에서 개간과 생산의욕에 불타게 하고, 밤에는 소태산의 직접 설교와 훈도로 새 회상 건설의 희망에 부풀게 하였다. 여기에서 바로 소태산이 실현하려고 한 ‘진리적 종교의 신앙과 사실적 도덕의 훈련’이 된 것이다.
동정일여(動靜一如) · 영육쌍전(靈肉雙全) · 이사병행(理事竝行)의 실천이기도 하였다. 원불교의 이러한 개척정신과 훈련방식은, 여기에 참여한 사람이면 그 누구나 근면하고 성실한 지도자가 되도록 한 것이었다.
1926년에는 민중의 생활의식을 개혁할 방침으로 신정의례준칙(新定儀禮準則)을 발표하고, 종래의 생활의식에 변화를 가져와야 한다는 사상을 널리 선양하였다. 1935년에는 산업기관으로 약업사 보화당(普和堂)을 개설하고, 교역자의 손으로 이를 운영하게 함으로써 생산성 있는 종교, 자력생활하는 종교의 터전을 닦아나갔다.
1940년에는 전북 완주군 삼례면 수계리에 대농장을 건설하였다. 이는 원불교 창립의 제5차 시련 작업이었다. 과수원과 축산업을 겸한 새로운 영농방식에 착수하여, 명실공히 산업종교의 면모를 갖춘 것이다.
소태산은 교단의 사업목표를 교화 · 교육 · 자선에 두고, 차츰 이를 추진해나갈 기관을 확장해나간 것이다. 「원불교」란 교명은 해방을 맞이하고 소태산의 유시에 의하여 제2대 종법사인 정산 송규가 개칭한 것이었으며, 1947년 4월에 재단법인 원불교의 등록을 필한 후 공포되었다.
소태산은 그가 깨달은 진리를 ‘○’으로 그려 상징하고, 이는 불생불멸의 진리와 인과보응의 이치가 서로 바탕하여 우주만상이 전개되고 있음을 밝혔다. 원불교의 교리는 이 일원상의 진리를 최고 종지로 하였다. 곧 일원상의 진리는 만사만리(萬事萬理)의 근원이요, 만생령을 움직이는 생성력(生成力)이라고 본 것이다.
이 진리를 근거로 하여 소태산은 사은사요(四恩四要)의 신앙문(信仰門)과 삼학팔조(三學八條)의 수행문(修行門)을 열게 된 것이다. 일원상의 진리는 모든 존재를 서로 가능하게 하는 이법(理法)과 큰 힘을 지니고 있다는 것이며, 이 ‘없어서는 살 수 없는 힘’의 관계를 ‘은(恩)’이라고 하였다.
인간이 이 큰 은혜를 자각하고 항상 감사(感謝) · 보은(報恩)한다면, 진리의 위력을 얻게 되고 자신은 언제나 상생상화(相生相和)의 기운을 받게 된다는 것이다. 이 은혜를 네 가지로 구분하여 사은(四恩)이라 하였는데, 천지은(天地恩) · 부모은(父母恩) · 동포은(同胞恩) · 법률은(法律恩)이 그것이다.
이 사은에 보답하는 것을 밝힌 것이 신앙문이다. 또한 원불교에서는 인간의 본성은 일원상의 진리에 근거한 것이어서 그릇됨도 없고, 요란함도 없고, 어리석음도 없다. 그렇지만 이 본래의 마음이 경계에 끌려 욕심을 일으키게 되어, 사람들이 이 때문에 본성을 잃는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정신을 수양하고, 사리(事理)를 연구하고, 작업을 취사하는 태도로써 끊임없이 수행해 나아가면 일원상과 같이 원만하고 거짓 없는 본래 마음을 회복하고, 그 마음을 활용하면 한없는 은혜와 위력을 얻게 된다는 것이다. 이 길을 밝힌 것이 수행문이다.
이 밖에 신앙문에 있어서는 자력양성(自力養性) · 지자본위(智者本位) · 타자녀교육(他子女敎育) · 공도자숭배(公道者崇拜) 등 사회개조에 임해야 한다. 이 네 가지 실천요목을 사요(四要)라 이르고, 사은과 사요를 합하여 인생의 요도(要道)라 하였다.
수행문에 있어서는 신(信) · 분(忿) · 의(疑) · 성(誠)의 조목을 추진해야할 네 가지 조목(進行四條)이라 하며, 불신 · 탐욕 · 나(懶) · 우(愚)의 조목을 버려야할 4가지 조목(捨捐四條)이라 이르고, 이 둘을 합하여 8조라 하였다. 정신수양 · 사리연구 · 작업취사의 3학과 이 8조를 합하여 인생으로 꼭 수련하여야 할 공부의 요도로 정하고 있다.
이상의 내용을 다시 요약하면 원만구족(圓滿具足)하고 지공무사(至公無私)한 법신불 일원상을 신앙의 대상으로 하여 우주만유가 천지 · 부모 · 동포 · 법률의 사은으로 얽혀 있으니, 인간은 1분1각도 이 은혜에서 떠날 수 없음을 알아 곳곳이 부처(處處佛像)요, 일일이 불공(事事佛供)하는 생활로 세상만사를 처리해 가자는 것이다.
또는, 원만구족하고 지공무사한 법신불 일원상을 수행의 표본으로 하여 어느 때, 어느 곳에서든지 선(禪)하는 마음을 놓지 않고(無時禪 無處禪), 수양 · 연구 · 취사의 삼대력(三大力)을 길러나가자는 것이다. 전자의 사회적 실현이 곧 사요의 실천이며, 후자의 추진요소가 8조목이다.
이러한 신앙과 수행을 통하여, 인간은 마침내 원만구족하고 지공무사한 법신불일원상과 계합(契合)하여 스스로 부처를 이루고, 나아가 제생의세(濟生醫世)의 목표를 달성하자는 것이다. 원불교 경전은 9종 교서 및 그 밖의 교서로 나누어져 있다.
9종 교서는 『정전(正典)』 · 『대종경(大宗經)』 · 『불조요경(佛祖要經)』 · 『원불교예전(圓佛敎禮典)』 · 『성가(聖歌)』 · 『정산종사법어(鼎山宗師法語)』 · 『세전(世典)』 · 『원불교교사』 · 『원불교교헌』을 말한다.
이 중 『정전』과 『대종경』은 원불교의 기본경전으로 『정전』은 소태산이 원불교 교리의 강령을 밝힌 원경(元經)이며, 제일경전(第一經典)이라고도 한다. 『대종경』은 소태산 일대의 언행록인 통경(通經)으로 총 15품 547장으로 되어 있다.
『불조요경』은 원불교의 보조경전으로서 원불교 사상과 관련이 깊은 불경과 조사(祖師)의 글을 선택 · 수록한 경으로, 『금강경』 · 『반야심경』 · 『사십이장경』 · 『현자오복덕경(賢者五福德經)』 · 『업보차별경(業報差別經)』 · 『수심결(修心訣)』 · 『목우십도송(牧牛十圖頌)』 · 『휴휴암좌선문(休休庵坐禪文)』 등이 수록되어 있다.
『원불교예전』은 개인 · 가정 · 교단에서 필요한 각종 예의규범을 수록하였다. 『성가』는 찬송 · 축원 · 전도의 성가집으로서 처음에 126장이 수록되었는데 계속하여 추가하고 있다. 『정산종사법어』는 정산종사(鼎山宗師, 宋奎)의 일대 언행록이며, 『세전』은 태교(胎敎)로부터 천도(遷度)에 이르기까지의 인생 일세의 도리 강령이다.
『원불교교사』는 원불교 창립 당시부터 지금까지 교단의 역사를 기록한 책으로 계속 추가하고 있다. 『원불교교헌』은 원불교 교단의 기본 헌장으로 전문 10장 90조로 되어 있으며, 교단 운영의 기본방침과 제도 및 기구와 하는 일들이 명시되어 있는데, 이 또한 시의에 맞도록 절차에 따라 개편하고 있다.
원불교는 교단을 총괄하기 위하여 중앙총부를 두고, 종법사와 수위단회(首位團會) · 중앙교의회(中央敎義會) · 교정원(敎政院) 및 감찰원(監察院)을 두고 있다. 그리고 각 지방별로 국내 15개의 교구와 500여 개의 교당이 있으며, 해외에는 미주동부교구 · 미주서부교구 · 유럽교구 · 일본교구 등 4개 교구와 40여 개의 교당이 있다.
아울러 교육기관 · 훈련기관 · 문화기관 · 복지기관 · 의료기관 · 산업기관 및 기타 관련 단체를 두고 있다. 신도는 약 100만으로 집계된다. 종법사는 교단을 주재하고 대표하며 수위단회의 회장이 된다. 수위단회는 교단의 최고의결기구일 뿐만 아니라 소태산의 초기 교단조직의 이념에 근거하여 ‘이단치교’의 교단통치의 최고기구로서 역할되고 있다.
중앙교의회는 교단의 의결기관으로 재가 · 출가 교역자들의 대표가 모여 교헌개정 및 예산결산을 하는 기관이다. 교정원은 교단의 중앙집행기관으로 종법사의 명을 받아 집행각부와 산하 기관 재단을 통리 감독하며 현재 1실 7부로 되어 있다. 감찰원은 교단의 중앙감찰기관으로 종법사의 명을 받아 교단감찰 전반을 책임진다.
원불교의 교도란 광의로 원불교에 입교하여 원불교의 교지(敎旨)를 믿고 실천하는 사람이며, 협의로는 연원에 의해 법명(法名)을 받고 4종의무(四種義務)를 이행하는 자를 일컫는다. 교도는 크게 재가교도와 출가교도로 구분된다.
출가교도는 전무출신(專務出身)이라 하며, 일에 따라 교무(敎務), 도무(道務), 덕무(德務)로 나뉘어져 있다. 교무란 소정의 교육과정을 거쳐, 교무자격을 취득하고 교리강설 법요의식을 집행할 수 있으며 교화업무를 전담하거나, 교화와 연관된 교단의 일반업무를 맡아한다.
도무는 소정의 과정을 거쳐 도무자격을 취득하고, 교단의 교육, 행정, 자선, 연구, 기술 의료 등 전문분야에서 봉사한다. 덕무는 소정의 과정을 거쳐 덕무자격을 취득하고, 근로직에서 노무와 기능을 가지고 봉공하는 전무 출신이다.
소태산이 죽고 난 뒤, 종법사가 된 정산(鼎山)송규(宋奎, 1900∼1962)는 일제강점기 말엽 극심한 탄압을 받다가 광복이 되자 임시로 내걸었던 ‘불법연구회’라는 간판을 내리고, 이미 내정되었던 ‘원불교’ 교명을 붙였다. 정산은 전재동포구호사업 · 교육사업 · 한글보급운동 등을 건국 3대사업으로 정하였다.
그리고 서울 · 익산 · 전주 · 부산 등지에 구호부를 설치하여 해외에서 귀국하는 동포들을 맞아 안내 · 급식 · 방역 및 치료 등을 실시하였다. 또한 친척과 가족을 잃고 방황하는 무의무탁한 동포들을 수용하기도 하였다.
또한 서울 덕성여학교 자리에 학병귀국자를 모아 건국을 위한 사상강연회도 가지고, 1946년에는 유일학림(唯一學林: 현 원광대학교 전신)을 개설하여 일제하에 실현하지 못하였던 교육사업을 개시하였다. 특히 국어교육의 시급함을 알고 각 지방의 교역자를 총부로 모이게 하여, 한글학자를 초빙하여 단기강습을 실시하였다.
그리고 단기 강습을 마친 교역자들이 각 지방에 돌아가 문맹퇴치운동에 앞장서게 하였다. 또한 정산은 해방 후 혼란기에 종교지도자의 처지에서 『건국론(建國論)』을 집필하기도 하였다. 그는 『건국론』을 통하여 정국안정의 지도강령을 밝히고 이를 실천하도록 각 방면에 지도하였다.
정산은 소태산의 대세계주의(大世界主義)의 뜻을 이어받아, 이를 우리 나라에서부터 실현하고자 하였기 때문에 정부가 수립되었다. 그러자 교단의 사업목표를 교화 · 교육 · 자선의 세 방면으로 다시 정비하였다.
그리하여 교육사업으로 1951년 종전의 유일학림 전문부를 개편하여 원광대학으로 만들고, 중등부는 원광남 · 녀중고등학교로 만들어 인가를 받았다. 1953년에는 특수한 훈련기관으로 동산선원(東山禪院)을 개설하고, 인재육성에 박차를 가하였다.
사회사업기관으로는 1945년 서울과 익산 총부내에 고아원을 설립하였고, 1950년에는 총부 구내에 요양원과 동화병원(東華病院)을 개원하였으며, 또 1952년에는 익산양로원을 세웠다. 1953년에는 총부 내에 있던 고아원을 익산 시내로 이전하여 운영하였는데, 전국을 통하여 모범적인 고아원으로 인정받기도 하였다.
1955년에는 익산시에 삼창공사(三昌公社)를 설립하고, 복숭아통조림 공장시설을 갖춤으로써 지역사회의 산업발전과 고용확대에 이바지하였다. 그 해 원불교의 발상지인 영광에 제2차 방언공사를 착공하여, 언답(堰沓)을 더욱 크게 늘렸다.
출판문화활동으로는 1951년에 원광사를 발족, 교단기관지 『원광(圓光)』을 편집 · 발간하였으며, 기타 교재 및 교양서적 등도 간행하였다. 1958년에는 교서편수기관(敎書編修機關)으로 정화사(正化社)를 발족시켜, 각종 교서의 편수를 완료하였다.
편술된 중요교서는 개정판 『정전』 · 『대종경』 · 『불조요경』 · 『원불교예전』 · 『성가』 · 『원불교교사』 등이다. 최근 교서편수위원회에서는 원불교 기본경전인 『정전』 · 『대종경』 · 『정산종사법어』 등을 영어 · 일어 · 중국어 · 독일어 · 프랑스어 · 스페인어 · 러시아어 · 힌두어 등 외국어로 번역하는 작업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정산의 업적 중에서도 역사적으로 매우 높게 평가되어야 할 몇 가지 작업이 있다. 첫째는 불법을 주체로 한 삼교회통사상을 삼교에 대한 풍부한 지식을 통해서 구현하였다는 것이며, 둘째는 조국해방이 되면서 정치적 노선을 달리하는 혼란상태를 잠재우기 위해 종교지도자의 입장에서 「건국론」을 집필하였다는 점이며, 셋째로 정산의 회갑식 기념 법설로서 삼동윤리(三同倫理)를 선포하였다는 점이다.
이 삼동윤리는 정산이 1962년에 63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날 때 자기 평생의 게송이라고 하여 이를 강조하고 열반에 들었다. 동원도리(同源道理)는 모든 종교와 각종각파의 교단들은 다 같은 한 근원임을 알아서 대동화합하자는 것이다.
그러므로 모든 종교들은 서로 문호를 열어놓고 성자혼이 무엇인가를 체험하면서 그 근본을 추구하여 다 같이 일원화(一圓化)의 도리를 펴자는 것이다. 동기연계(同氣連契)는 지구상의 모든 인종과 생령들은 다 같은 한 기운으로 연계된 동포인 것을 알아서 대동화합하자는 것이다.
따라서 인종이나 민족이나 지역을 초월하여 모두 생성의 한 기운으로 연하여 있으니, 다 같은 동포 · 형제임을 자각하고 금수초목까지도 이를 함부로 하지 말자는 것이다.
동척사업(同拓事業)이란 인간이 세상에 살면서 모든 사업이나 주의 · 주장을 펴고 있지만 그 궁극목적은 모두 잘 살기 위해 개척하자는데 있으니, 이 뜻을 알아서 대동화합하자는 것이다. 1962년 2월에 정산종사의 종통을 이어 대산(大山)김대거(金大擧, 1914∼1988)가 종법사로 취임하였다.
대산은 교조의 창조적 의지와 정산의 계승사업을 점철하여, 1963년에는 ‘개교반백년기념사업회’를 발족시켰다. 이 사업이 성취되자 교단이 내외적으로 알찬 실력을 갖추고, 세계를 향하여 봉공(奉公)해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그러면서 선사(先師)의 의지를 받들어 ‘진리는 하나, 세계도 하나, 인류는 한가족, 세상은 한 일터, 개척하자 일원세계’라는 표어를 내걸고, 국내외의 교도 6만여 명이 모여 단합대회를 가졌다.
또한 대산은 1991년 교조 소태산대종사의 탄생백주년을 기념하는 대회를 개최하여 외국인 약 200여 명이 모인 가운데 「인류문명과 원불교사상」이라는 주제를 걸고 국제학술회의를 개최하였다. 다른 한편으로 대산은 소태산 · 정산의 뜻을 받들어 평소 주장해 오던 종교연합운동(U.R.M)을 국제적으로 발족시키는 행사도 가졌다.
이를 계기로 대산은 세계평화를 위한 삼대운동으로 심전계발, 공동시장개척, 종교연합운동 등을 제창하고 인간화 작업으로 각종 훈련을 강조했으며, 세계 평화를 위한 종교간 협력운동에 원불교가 앞장서도록 박차를 가해왔다. 1994년 11월 대산의 뒤를 이어 이광정(李廣淨, 호는 좌산 左山, 1936∼)이 종법사로 취임하였다.
좌산은 역대 종법사의 뜻을 계승하여 안으로 인재육성 · 체제정비 · 경제기반확립 등 내실을 통한 교단 각분야의 성숙을 이루고 밖으로 교화 · 교육 · 자선의 3대 사업을 적극적으로 추진하는 한편, 세계적 종교로서의 위상확립과 역할 수행에 주력하고 있다. 이를 위해 좌산은 세계교화의 한 단계를 열려는 작업으로 교헌을 개정하였다(제5차 개정).
교헌개정의 주요한 골자는 수위단회의 새로운 편성과 해외총부를 두고 이를 통해 세계교화로 나가는 방향을 설정한 것이다. 또한 좌산은 취임 후 특별사업으로 원불교방송국인 원음방송국(圓音放送局)을 개국하였으며, 정산종사탄생백주년기념사업을 추진하여 정산종사 탄생지의 성역화와 정산종사의 삼동윤리 이념을 더욱 확산시켜나가고 있다.
좌산은 1995년 9월 22일 UN본부에서 개최된 UN창설 50주년 기념 WCRP 주최 강연회에서 세계평화의 이념 구현을 위해 연설한 바 있으며, 최근에는 UN의 NGO기구를 통해 21세기 인류보편윤리헌장(人類普遍倫理憲章) 편성에 삼동윤리 사상을 반영하도록 적극 노력하고 있다.
원불교가 역사적 상황 속에서 지향하고 있는 창조적 특징을 크게 종교적인 특징과 사상적인 특징, 그리고 사회적 측면에서의 특징으로 나누어 살펴보기로 한다. 먼저 종교적인 특징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한국으로부터의 종교라는 점이다. 원불교는 불교의 불법(佛法)을 주체로 하고, 한국에서 나온 개혁종교이다. 그러나 한국에서 나왔다 하더라도, 그 내용 면으로 보면 국가적 종교나 민족적 종교에 한정되지 않는다.
종교가 절대적인 세계를 지향한다고는 하나, 그 종교가 발생한 지역에서 발전적인 변화를 가져오지 못한다면 대중화 · 생활화의 길을 걷지 못할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원불교는 한국에서 발생하였지만 조용한 가운데 변화를 시도하면서 인간의 의식구조를 전환시킴으로써 세계 인류에게 개명된 생활을 전개하도록 개혁하는 자세로 나가고 있다.
둘째, 자타력병진(自他力竝進)의 신앙을 제창한 점이다. 소태산은 우주 자연의 이치를 깨닫고, 그 깨달음을 문자나 언어를 빌리기 전에 일원상(一圓相)으로 표현하였다. 그리고 이 ‘○’으로 상징된 진리 당체(當體)를 자타력 병진신앙체계로 형성한 것이다.
즉, 자력신앙이나 타력신앙의 어느 한 면에 기울어짐이 없이 원만한 신앙으로 조화롭게 추진시키도록 한 것이다. 셋째, 불법으로 교리체계를 세우고 이를 주축으로 불교뿐만 아니라 모든 종교들을 시대화 · 생활화 · 대중화시키려 했다. 교조 소태산은 20여 년의 구도 끝에 대각을 성취하였다.
그러나 그 구도과정이나 출발점에서 어떠한 기성종교에 영향받은 바가 없었다. 대각의 내용을 통하여 볼 때, 궁극적 진리는 불타의 깨달음과 일치하는 것이었다. 소태산이 비록 불법에 변혁의 주체성을 두고 있기는 하지만, 불교의 개혁만을 시도한 것이 아니며, 이를 기치로 종교혁명을 시도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렇기에 그는 새로운 교단을 세움에 있어 종교가 그 시대, 그 생활, 그리고 모든 대중을 선도하는데 적합한 종교라야 한다는 점을 강조했다.
넷째, 종교윤리(宗敎倫理)를 제기한 점이다. 종교윤리란 명일심 통만법(明一心通萬法)의 정신이다. 현대처럼 지역과 공간을 좁힌 상황에서 모든 종교가 횡적으로 서로 넘나들고, 하나 되는 일부터 하여야 된다고 본 것이다.
자기 종교의 교리에 국집되지 말고 타종교 및 타종교의 지도자들과 화해의 문호를 열어 놓는 윤리를 말한다. 이러한 종교윤리는 원불교에서 줄기차게 실천하여 왔는데, 소태산은 이를 일원주의로 표방했고, 정산은 이를 삼동윤리로 표방했고, 대산은 종교연합운동(UR)으로 표방해 오고 있다.
사상적인 면에서 특징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존재철학(存在哲學)을 제시하고 있는 점이다. 존재개념은 서양인의 분석적인 태도에서 보는 존재라든가 사변적 인식론적으로 탐구하려는 진리의 논리적 추구가 아니다.
소태산이 대각(大覺)의 경지에서 바라다본 이 우주는 생생약동(生生躍動)하는 기운이 꽉 차 있음을 발견한 것이다. 그래서 그는 우주 및 인생의 근거를 밝힘에 있어서 철학적이기도 하지만 종교의 방향으로 이끌게 된 것이었다.
둘째, 보은사상을 제기한 점이다. 은혜를 알고 은혜를 갚아야 한다는 당위적(當爲的) 인간관계(人間關係)의 윤리만을 강조하는 것에서 머무르는 것이 아니다. 이 우주에는 무한한 생명력이 있으며 여기에는 기본적인 원리가 있는데, 그것은 바로 인과법칙이라는 것이다.
소태산은 인간의 자각을 통해서 ‘은(恩)’의 방향을 인과법으로 받아들여 구체적인 생성철학을 제기한 것이다. 우선 이 우주가 무심(無心)하지 않다고 하는 사실을 스스로가 체험하여 생성의 관계가 인과의 이치에 의해서 존재하는 사실을 발견하고 이를 통해 보은사상을 제기한 것이다.
셋째, 과학사상과 도덕사상의 일치이다. 물질은 과학을 의미하고 정신은 도덕문명을 의미한다. 그러나 오늘날 과학이 우세하여 인간의 정신세력은 날로 미약해가고 있음에 소태산은 도덕으로 축(軸)을 세우고, 과학을 활용하는 사상을 내세우며 주객이 전도되지 않고 과학을 활용하는 원형으로 되돌려 나가야함을 강조하였던 것이다.
과학은 아무리 그 세력이 우세하나 그것 역시 인간의 정신력으로 이루어진 것이기 때문이다. 정신력은 도덕성으로 회복시키는 길밖에 없다고 소태산은 보았기 때문이다.
넷째, 새로운 역사관을 제시한 점이다. 소태산은 최초법어(最初法語)에서 ‘강자 약자 진화상 요법(强者 弱者 進化上 要法)’을 내놓았다. 강자와 약자가 항상 대결의식을 가지고 있어서는 인간다운 역사가 성립되지 않음을 간파한 것이다.
강자는 약자를 보호하여야 진정한 강함을 유지하며, 약자는 강자에게 배우고 단합력을 길러 지도력을 형성해 나가야 능히 강을 획득할 수 있다고 하였다. 이것을 자리이타(自利利他)의 도라고도 하며, 음양조화의 상생윤리라고도 표현한 바 있다.
그리하여 강자는 강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먼저 진취력 있는 약자를 도와 강자이게 하며, 그러한 조화윤리로 더 내려서서 약자들을 강자로 변화하도록 지도하여 나가는 이념을 말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사회적 측면에서의 특징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개척정신을 불러일으킨 점이다. 저축조합운동에서부터 교단 창립과정을 더듬어보면, 개인이나 단체나 사회를 막론하고 자립갱생의 개척정신으로 일관되어야 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소태산은 인적 · 물적 자원이 고갈되어 있는 최저생활의 농촌에서도 저축으로 자본을 만들고, 맨손으로 언답을 일궈냈다. 그는 일제의 압제하에서도 이러한 창립정신에 입각하여, 주경야독의 간고한 생활을 디디고 서서 끊임없이 인재양성과 산업육성을 추진해 왔다.
둘째, 인간훈련을 강조한 점이다. 훈련이라고 하면 우선 군대훈련, 국가적 정책훈련, 산업가의 산업훈련 등을 들 수 있으나 소태산이 지향한 훈련이야말로 아무런 전제조건이 붙지 않는다. 순수한 「인간훈련」의 길을 만들었던 것이다.
「인간훈련」이라 함은 의지교육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의지는 인격형성의 3대 요소 중의 하나다. 의지교육을 위한 프로그램은 첫째가 인고(忍苦)의 단련이며, 이는 인간교육의 중요한 요소로 도덕을 창출해 내는 방법인 것이다. 이와 같은 훈련된 인간이 나올 때 사회는 달라진다.
소태산은 명랑하고 진취적이며 참신하고 창조적이며, 자력적이고 봉사적인 인간상을 창출해 내려는 훈련법을 내 놓은 것이다. 이렇게 훈련된 인간상을 전무출신(專務出身)이라고 하였다.
셋째, 남녀평등사상을 실현시킨 점이다. 그 당시 남존여비사상으로 묶인 제도 속에서 과감히 부녀자들을 신도로 만들어 훈련시켰던 것이다. 특히 조선조 남존여비사상에 찌든 속에서 일제가 되면서도 그대로 교육의 제한을 받았던 젊은 여성들을 인연 따라 모여들게 하고 그들에게 ‘남녀권리동일(男女權利同一)’을 내세워 교육시켰던 것이다.
그리하여 소태산은 초창기 교육에서부터 그토록 무지몽매했던 젊은 여성들을 훈련시키며 교육하여 여자전무출신을 대량 배출해냈던 것이다.
남자교역자와 동등하게 교화 활동을 할 수 있는 자격을 부여했다는 점이며, 교단의 조직체제에 있어서도 최고 지도급인 수위단원을 남녀 10명씩 동등하게 선출해 냈다는 점이라든가, 지방교화의 책임자로 여자 전무출신을 등용시켰다는 점이다.
원불교는 오늘도 이 정신에 입각하여 중앙으로부터 지방 각 교화장소의 주역들은 여자전무출신이 60∼70%를 점유하고 있다.
넷째, 민주화의 선구적 역할을 들 수 있다. 교단조직법을 보면 교법전수를 단전(單傳)으로 하지 않고 공전(公傳)으로 하였으며, 남녀수위단회가 민주적 협의를 거쳐 교단을 통치하도록 하고 있다. 종법사외 모든 주요임원을 선거에 의한 임기제를 시행하도록 하며, 교조 재세(在世) 당시부터 민주방식으로 교단을 운영해 왔다.
원불교의 이러한 교단운영체제는 한국 민주화의 역사상에서도 높이 평가할만한 제도였으며, 특히 종교적 지도자들의 카리스마를 극복해 나가는데 있어서도 매우 선구적인 길을 제시하고 있다.
다섯째, 예법(禮法)의 개혁을 들 수 있다. 재래의 예법은 지나치게 형식화되고 분수에 넘치는 낭비를 초래하게 하였으나, 소태산은 허례허식에 치우치지 않고 실질적으로 의미가 있는 새로운 예법을 제정하였다.
원불교의 예전은 소태산 재세시에 이미 ‘신정의례준칙’이라고 하여 시행해 오면서 모든 사람들의 생활의식의 변화를 그 무엇보다도 시급하며 중요하게 생각하여 이미 일제시에 『예전』을 발행하고, 이를 신도들에게 생활개조의 법으로 시행하도록 하였다.
이 『예전』의 형성은 민족해방이 된 이후 정산에 의하여 더욱 미래지향적인 예법이 되도록 보충하며 확대시키는 작업을 함으로써, 오늘날 『원불교예전』, 그리고 『세전』등을 만들어 냈던 것이다. 이는 교역자들로부터 하나하나 실현하여 대중화되도록 교화의 길잡이 역할을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