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양 출생. 아버지는 상인이었던 유기연(柳基淵)이며, 어머니는 김확실(金確實, 개명 후 김기복)로 9남매 중 맏아들이다. 주식회사 유한양행(柳韓洋行) 창업자이다.
1904년 9세 때 외부 참서관을 지낸 박장현(朴章鉉)과 그의 조카 박용만(朴容萬)을 따라 미국에 건너갔다. 고학으로 미시간대학교에서 학사학위를, 캘리포니아대학에서 상학석사학위를 받은 뒤 다시 스탠포드대학원에서 3년간 법학을 전공하였다.
학업을 마친 뒤 전자회사 사원으로 잠시 근무하다가, 1922년 자립하여 숙주나물을 취급하는 라초이식품주식회사를 설립하여 1925년까지 50여만 달러의 거금을 벌었다. 1926년 3월에 결혼한 뒤 얼마 되지 않아 귀국하였다. 그해 12월 유한양행을 설립하였다.
1934년에는 독일의 도마크(Domagk, G. )박사에 의하여 개발된 ‘프론토실(Prontosil)’을 동양에서 제일 먼저 도입하였다. 1939년 우리나라 최초로 종업원지주제를 실시하였고, 이 무렵에 사세도 확장되어 만주·다롄[大連]·톈진[天津] 등 동북아 일원에 걸치는 방대한 시장을 확보하였다.
1939년 사업상의 이유로 도미하였으나, 1941년 12월 태평양전쟁의 발발로 귀국하지 못한 채 8·15광복을 맞이하였다. 광복 후 미국에서 돌아와 유한양행을 재정비하였다. 유한양행은 1953년 휴전 이후 계속 성장하여 성실한 우수약품생산업체로서 안정된 지위를 구축하였다.
1969년 기업의 제일선에서 은퇴하여 혈연관계가 전혀 없는 조권순(趙權順)에게 사장직을 물려주었다. 이로써 전문경영인 등장의 길을 여는 데 선구자적 역할을 하였다. 산업동탑훈장을 받았으며, 1965년 연세대학교에서 명예법학박사학위를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