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문화(文化). 전라북도 고산(高山: 지금의 전북특별자치도 완주군) 출신. 충경공(忠景公) 유량(柳亮)의 후손으로 유홍렬(柳洪烈)의 아들이다.
1907년 8월 한국군이 강제 해산되자 스스로 창의대장 또는 삼남의병대장을 칭하고 수백명의 의병으로 의진을 구성하였다.
그 해 9월 22일 전라북도 용담군 건무리에서 일본군과 교전하였으며, 그뒤 여러 차례에 걸쳐 용담 · 고산 · 은진 일대에서 일본 보병 · 기병 · 헌병 등과 접전하였다.
10월 3일 밤에는 정성일(丁成一) · 김치삼(金致三) 등 수십명을 이끌고 용담군 읍내의 일본인 거주지에 들어가 일본인 2명을 사살하고, 한국인 경찰 정상권(鄭尙權)을 쓰러뜨리고 무기를 탈취하였다. 이어서 10월 10일에 유치복(柳致福) 및 동지 3명과 함께 우북면 장암의 이화순(李化順) 집에서 군자금 30원을 조달하였다.
그 뒤 1908년 호남의 대부호인 김진사의 사음 이성순(李聖順) 등 수십명에게 도조 수백석을 징발하는 증서를 발행하여 군량을 보관하게 하고, 수백명의 부하를 이끌고 전라북도 용담과 충청남도 은진 등지에서 일본군과 교전하여 많은 성과를 올렸다.
그 해 7월 일본헌병에게 잡혔다가 탈주하였다. 그러나 1909년 1월 23일에 다시 잡혀 그해 3월에 광주지방재판소에서 교수형을 선고받고 공소하였으나 그대로 형이 확정되었다.
1977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