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지명 ()

유지명 / 칼
유지명 / 칼
근대사
인물
대한제국기 때, 의병을 일으켜 삼남의병대장으로 활동한 의병.
인물/근현대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882년(고종 19)
사망 연도
1909년(순종 2)
본관
문화(文化)
출생지
전라북도 고산(高山: 지금의 전북특별자치도 완주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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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대한제국기 때, 의병을 일으켜 삼남의병대장으로 활동한 의병.
개설

본관은 문화(文化). 전라북도 고산(高山: 지금의 전북특별자치도 완주군) 출신. 충경공(忠景公) 유량(柳亮)의 후손으로 유홍렬(柳洪烈)의 아들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1907년 8월 한국군이 강제 해산되자 스스로 창의대장 또는 삼남의병대장을 칭하고 수백명의 의병으로 의진을 구성하였다.

그 해 9월 22일 전라북도 용담군 건무리에서 일본군과 교전하였으며, 그뒤 여러 차례에 걸쳐 용담 · 고산 · 은진 일대에서 일본 보병 · 기병 · 헌병 등과 접전하였다.

10월 3일 밤에는 정성일(丁成一) · 김치삼(金致三) 등 수십명을 이끌고 용담군 읍내의 일본인 거주지에 들어가 일본인 2명을 사살하고, 한국인 경찰 정상권(鄭尙權)을 쓰러뜨리고 무기를 탈취하였다. 이어서 10월 10일에 유치복(柳致福) 및 동지 3명과 함께 우북면 장암의 이화순(李化順) 집에서 군자금 30원을 조달하였다.

그 뒤 1908년 호남의 대부호인 김진사의 사음 이성순(李聖順) 등 수십명에게 도조 수백석을 징발하는 증서를 발행하여 군량을 보관하게 하고, 수백명의 부하를 이끌고 전라북도 용담과 충청남도 은진 등지에서 일본군과 교전하여 많은 성과를 올렸다.

그 해 7월 일본헌병에게 잡혔다가 탈주하였다. 그러나 1909년 1월 23일에 다시 잡혀 그해 3월에 광주지방재판소에서 교수형을 선고받고 공소하였으나 그대로 형이 확정되었다.

상훈과 추모

1977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참고문헌

『독립운동사자료집 별집』1(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1974)
『한국독립운동사』(애국동지원호회, 1956)
『朝鮮獨立運動』1(金正明 編, 原書房, 1967)
관련 미디어 (1)
집필자
박성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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