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기계(杞溪). 자는 여인(汝人). 유명뢰(兪命賚)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유광기(兪廣基)이다. 아버지는 유언탁(兪彦鐸)이며, 어머니는 풍양조씨(豊壤趙氏)로 조휘벽(趙輝璧)의 딸이다. 부인은 김원태(金元泰)의 딸이다.
1740년(영조 16) 증광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1745년(영조 21) 사관 때 왕이 경연에서 한 말이 누설되자 유한소를 의심해 처벌하였다. 다음해부터 시강원설서, 사헌부지평, 세자시강원문학 등을 두루 거쳤다. 1749년 정언으로서 임금이 학문과 정사에 부지런할 것을 상소하고 시정의 잘잘못을 논하였다.
그러나 상소의 내용 중 이조 참의를 지적한 것이 문제를 일으킬 소지가 있다고 하여 관직이 교체되었다. 다시 정언에 복직되었다가 문학, 사헌부지평에 임명되었다. 1751년 진하 겸 사은사(陳賀兼謝恩使)의 서장관에 임명되어 북경을 다녀온 뒤 헌납을 지냈다.
1753년 홍문록에 일등으로 뽑혀 시강원필선에 임명되고, 왕의 특명으로 사복시 소유의 땅을 양전(量田: 토지조사)할 때 내농포(內農圃) 경작인들의 원망이 있자 양전을 다시 시행하였다. 다음해 홍문관부수찬이 되고 동래부사의 물망에 올랐으나 노부모 때문에 임용되지 않았다.
1756년 3월 당상관으로 승진해 승지가 되고, 1758년 이후 대사간, 장례원판결사를 역임하였다. 1761년 9월에는 사도세자가 평양을 몰래 다녀왔을 때 승지로 재직하면서 보고하지 않아 파직되었다가, 다시 대사간으로 복직하였다. 1767년(영조 43) 저경궁(儲慶宮)의 고유제(告由祭) 때 입직하지 않아 월곶첨사로 좌천되었다.
다음해 대사헌·예조참판에 임명되고, 1769년 함경도관찰사로 부임하는 도중 길주에 이르러 갑자기 졸하였다. 영조가 애도해 친히 제문을 지어 보내 제사케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