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진주(晉州). 자는 사온(士溫), 호는 석담(石潭). 할아버지는 유진동(柳辰同)이고, 아버지는 경원부사 유용(柳溶)이다. 어머니는 선산임씨(善山林氏)이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창의사 김천일(金千鎰)을 따라 강화에서 활동하다가, 의주 행재소(行在所)에 가서 선전관에 임명되었다.
1594년 무과에 급제, 선조의 친유(親諭)를 받고 감격하여, 충성을 다하여 나라에 은혜를 갚겠다는 ‘진충보국(盡忠報國)’ 네 자를 등에 새겨 스스로 맹세하였다. 신설된 훈련도감에서 군사조련에 힘쓰다가 해남현감으로 나갔다.
1597년 정유재란 때 원균(元均)이 패전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통곡하면서, 통제사 이순신(李舜臣)의 막료가 되어 수군재건에 노력하였다. 남해 앞바다에서의 전투에서는 명나라 제독 진린(陳璘)과 이순신의 곤경을 구하기도 하였다.
노량해전에서 적탄에 맞아 부상을 입고도, 전사한 이순신을 대신하여 전투를 지휘한 사실이 왕에게 알려져 부산진첨절제사(釜山鎭僉節制使)에 발탁되었다. 유형은 이순신의 신망이 두터운 인물로 1600년에 경상우도수군절도사로 임명되었으며, 1602년 삼도수군통제사가 되었다.
다시 충청도병마절도사를 거쳐, 1605년(선조 38) 회령부사와 1607년(선조 40) 함경북도 병마절도사에 제수되었다. 이어서 경상도병마절도사·평안도병마절도사를 역임하고, 황해도병마절도사로 재임 중에 죽었다.
용병(用兵)에 능하고, 특히 통제영(統制營)의 기계설비와 회령·경성의 축성 등 적을 방어하기 위한 군사시설의 확립에 주력하였다. 해남의 민충사(愍忠祠)에 제향되고, 시호는 충경(忠景)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