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해남(海南). 자는 경백(敬伯), 호는 낙서(駱西), 연옹(蓮翁), 연포(蓮圃), 현옹(玄翁). 윤선도(尹善道)의 현손으로, 윤두서(尹斗緖)의 맏아들이며, 윤용(尹熔)의 아버지이다. 가선대부(嘉善大夫) 동지중추부사에 추증되었다.
초년에 그는 서울 회동(會洞)에 살며 이저(李渚)에게 학문을 배웠다. 중년기에는 해남의 백련동에 살면서 가전유물을 정리하고 서화를 수련하였다. 1748년 화명(畵名)으로 삼성진전(三聖眞殿) 모사중수도감(摸寫重修都監)에 조영석(趙榮祏)과 함께 감독격인 감동(監董)으로 참여하였다. 그 공으로 6품으로 승진하여 정릉현감을 지냈다. 만년에 해남으로 낙향하였으나 한쪽 눈을 실명하여 작품 활동에는 주력하지 못했고 시를 쓰는 데 몰두하였다.
아버지 윤두서의 영향으로 화업을 계승하였으며 아버지의 화풍을 전수하여 전통적이고 중국적인 소재의 도석인물(道釋人物), 산수인물, 말그림을 잘 그렸다. 그러나 윤두서의 탁월한 필력과 경지에는 이르지 못한 것으로 평가된다. 현재 해남의 연동녹우당(綠雨堂)에 종손이 소장한 윤두서의 작품 『해남윤씨 가전고화첩』(보물, 1968년 지정)은 그가 정리해서 꾸며놓은 것이며, 윤두서의 행장 역시 그가 쓴 것이다.
최근 윤씨 종가에서 윤덕희의 문집 『수발집(淺勤集)』이 발견되어 그의 생애에 관해 상세히 알려지게 되었고 82세라는 긴 생애 동안 활동하여 현재까지도 많은 작품이 전해지고 있다. 산수화를 비롯한 그의 작품은 윤두서의 화풍을 따르면서 동시에 당시 화단에 만연하였던 남종화풍(南宗畵風)을 비교적 깊게 수용한 면모를 지니고 있다. 아버지의 화풍을 적극적으로 따른 연유로 비교적 보수적인 성향이 강하다. 아울러 도담(島潭)의 실경을 그린 「도담절경도(島潭絶景圖)」가 남아 있다.
18세기 전반기 화가 중 가장 많은 도석인물화를 남겼다. 신선 사상에 관심이 많았던 그는 『삼재도회(三才圖會)』, 『선불기종(仙佛奇蹤)』과 같은 서적에 수록된 신선도를 적극적으로 활용하여 조선 후기 도석인물화 발전에 기여하였다.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종리권도(鐘離權圖)」와 「유해섬도(劉海蟾圖)」 등에서『삼재도회』의 삽화를 수용하였음이 뚜렷하게 나타난다.
대표작으로는 「독서하는 여인」, 「오누이」(서울대학교박물관 소장)와 같은 풍속화를 비롯하여 「송하고사도(松下高士圖)」, 「마상부인도(馬上婦人圖)」, 「마도(馬圖)」, 「산수도첩(山水圖帖)」, 『연옹화첩(蓮翁畵帖)』(이상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월야송하관폭도(月夜松下觀瀑圖)」(개인 소장), 「송하인물도(松下人物圖)」(간송미술관 소장)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