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파평(坡平). 자는 백분(伯奮), 호는 용서(龍西). 시강원필선 윤전(尹烇)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해평윤씨(海平尹氏)로 첨지(僉知) 윤환(尹晥)의 딸이다.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문장이 뛰어나 이수광(李睟光)의 칭찬을 받았다. 가정에서 학문을 익힌 뒤 1625년(인조 3) 김장생(金長生)의 문하에 들어가 성리학과 예학을 전습하였다.
1633년 생원·진사 양시에 합격해 1635년 성균관재생으로 들어갔다. 이 때 이이(李珥)·성혼(成渾)의 문묘종사운동에 참여하여 그 반대자들과 논쟁을 벌였으나 성사되지 못하였다.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주전론을 제기했으나 아버지가 강화도에서 순절한 뒤에는 일절 국사를 논하지 않고 재야에 은거, 학문에만 몰두하였다.
1658년(효종 9)부터 학문과 덕행으로 추천되어 공조좌랑·정랑·종부시주부·성균관사업·사헌부지평 등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퇴하고 벼슬에 나아가지 않았다.
1660년 복제예송(服制禮訟)에서 남인 권시(權諰)를 옹호하는 발언을 했다가 송시열(宋時烈) 일파의 비난을 받았다. 1661년부터 여러 차례 사헌부장령에 임명되었으나 사양하였다.
1670년 세자시강원 진선에 임명되었을 때에는 상소를 올려 수기치인(修己治人)의 도를 논하였다. 그 요지는 솔선수범·입지·정심(正心)·면학·휼민(恤民)·근검절약·무사봉공 등이었다. 그 뒤에도 여러 차례 청요직에 임명되었으나 끝내 사양하고 나아가지 않았다.
이산(尼山)에서 가난하게 살았지만, 윤문거(尹文擧)·윤선거(尹宣擧)·윤순거(尹舜擧) 등의 종형제와 학문을 연마하고 후생을 가르치는 것으로 즐거움을 삼았다.
특히 시율에 격조가 높았으나 저술은 즐겨하지 않았다. 뒤에 이조참판에 추증되고 연산의 구산서원(龜山書院)에 제향되었다. 시문집 『용서문집(龍西文集)』과 부록 합 4권 2책이 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