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파평(坡平). 초명은 의립(義立). 자는 지중(止中), 호는 월담(月潭). 공조판서를 지낸 윤국형(尹國馨)의 아들이며, 선비화가 윤정립(尹貞立)의 형이다.
1594년(선조 27)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검열(檢閱)에 등용되었고, 이어 설서(設書)를 거쳐 1624년(인조 2) 정자로 재직 중 조카가 이괄(李适)의 난에 연루되어 처형됨에 따라 벼슬을 그만 두었다. 1626년 다시 관직에 복귀되어 경주부윤이 되었으며, 그 뒤 경상도, 함경도, 충청도, 경기도의 관찰사와 형조판서, 예조판서 등을 역임하고 의정부의 좌참찬에 이르렀다. 『동국문헌』 화가편(畵家篇)에 의하면 그림을 잘 그렸다 한다.
현존하는 그의 작품은 매우 드문 편으로 국립중앙박물관 소장의 『산수화첩(山水畵帖)』 정도가 알려져 있다. 이 화첩에 보이는 준법(皴法), 수법(樹法), 필법(筆法) 등에서 남송(南宋)의 마하파(馬夏派)와 조선 초기의 안견파적(安堅派的)인 요소가 함께 간취된다. 그리고 울퉁불퉁한 산형(山形)과 그 표면처리에서는 그의 개성적인 특징을 엿볼 수 있어 그가 15세기의 화풍을 즐겨 따르면서 자신의 작풍도 아울러 이룩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는 그림 이외에 『야언통재(野言通載)』와 『산가청사(山家淸事)』라는 저서를 남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