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해남(海南). 자는 치원(致遠), 호는 낙천(駱川) 또는 태천(駘川). 윤경(尹耕)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윤효정(尹孝貞)이다. 아버지는 정랑 윤구(尹衢)이며, 어머니는 임휴(任畦)의 딸이다. 윤선도(尹善道)의 할아버지이다.
1543년(중종 38) 사마시에 합격하여 진사가 되고, 1548년(명종 3)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승정원주서·저작 등을 거쳐 1553년 부수찬이 되고, 이듬해 검토관을 역임하였다. 1555년 부교리로서 제주선로사(濟州宣勞使)가 되어 다녀왔으며, 이 해 사가독서(賜暇讀書)한 뒤 이조정랑에 올랐다.
1557년 의정부검상·사인을 거쳐, 집의·응교·직제학·형조참의·예조참의·승정원동부승지 등을 지냈다. 1562년 성균관대사성·홍문관부제학·도승지에 이어 대사간·이조참의·병조참의 등을 역임하였다.
1566년 호조참판에 올라 이듬해 안주영위사(安州迎慰使)가 되어 명나라 사신을 맞았으며, 그 해 경상도관찰사로 나갔다. 다시 이조참판이 되어 동지춘추관사(同知春秋館事)를 겸직하였고, 아울러 『명종실록』의 편찬사업에 참여하였다.
1572년(선조 5) 평안도관찰사, 이듬해 병조참판·대사헌을 거쳐, 1574년 대사간·예조참판·대사헌·부제학을 역임하였다. 1581년 형조판서에 올랐는데, 재산을 많이 모아 호남에서 제일 가는 갑부라는 탄핵을 받았다.
1589년 정여립(鄭汝立)의 옥사가 일어나자 동인의 지도자로서 정여립과 친하고, 또 이발(李潑)의 외숙이라고 하여, 전라도 유생 정암수(丁巖壽)가 축재를 비난하는 탄핵상소를 올리자, 이에 연좌되어 벼슬에서 삭출되었다가 1610년(광해군 2) 복관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