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파평(坡平). 자는 양숙(養叔), 호는 죽재(竹齋)·죽당(竹堂). 윤사하(尹師夏)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윤탕(尹宕)이다. 아버지는 첨정 윤응규(尹應奎)이며, 어머니는 이수동(李壽童)의 딸이다.
어려서부터 총명해 6세에 글을 지을 줄 알았다고 한다. 1552년(명종 7) 진사가 되고, 1555년 식년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예문관검열·대교를 거쳐 1559년 흥문관정자가 되었고, 이어 저작·박사·부수찬 겸 지제교 등을 지냈다. 1561년 병조·이조의 좌랑을 지낼 때 서장관(書狀官)으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1563년 이조정랑으로 재직 중 이량(李樑)과 친교가 있었다는 무소(誣疏)와 동료들에게 전선(銓選)에 관한 기밀을 누설한 죄로 파직되었다. 그 뒤 성균관전적에 등용되어 종부시첨정(宗簿寺僉正)을 거쳐, 부모를 모시기 위해 외직인 풍덕군수가 되었다가 양주목사로 옮겨갔다. 1578년(선조 11) 사복시정, 1581년 황주목사를 지내고 1584년 동지사로 명나라에 다녀와 공조·호조의 참의에 올랐다.
1592년 임진왜란 때 경주부윤이었는데, 정부에서 윤인함이 유신(儒臣)으로 나약하고 겁을 낸다 하여 교체하였다. 판관 박의장(朴毅長)이 혼자 성안에 있다가, 적이 언양에서 지름길로 들이닥치자 성을 비우므로 경주성이 함락되었다.
이에 의병을 모집해 적병 수백 명을 죽였다. 뒤에 윤두수(尹斗壽)의 추천으로 호서(湖西)의 관찰사가 되었으나 곧 파직되고, 호조참의에 재임한 뒤 1596년 형조참판이 되었다. 이듬해 정유재란 때 영위사(迎慰使)를 겸해 명나라 장수를 평양으로 영접하러 나갔다가 죽었다.
문장과 그림에 뛰어났고, 특히 대나무를 잘 그려 호를 죽재라 했다 한다. 저서에 『죽재유고(竹齋遺稿)』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