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행교 ()

조선시대사
인물
조선 후기에, 사헌부집의, 이조참의, 홍문관부제학 등을 역임한 문신.
이칭
장문(長文)
인물/전통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661년(현종 2)
사망 연도
1725년(영조 1)
본관
파평(坡平, 지금의 경기도 파주)
주요 관직
홍문관부수찬|사간원헌납|홍문관교리|사헌부집의|이조참의|홍문관부제학
관련 사건
신임사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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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조선 후기에, 사헌부집의, 이조참의, 홍문관부제학 등을 역임한 문신.
개설

본관은 파평(坡平). 자는 장문(長文). 대사간 윤황(尹煌)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증 영의정 윤선거(尹宣擧)이다. 아버지는 소론의 영수로 우의정 윤증(尹拯)이며, 어머니는 안동 권씨로 한성부우윤 권시(權諰)의 딸이다. 부인은 병조좌랑 박태소(朴泰素)의 딸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1694년(숙종 20) 별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고 홍문록에 선발되었다. 1696년(숙종 22) 세자시강원설서, 홍문관부수찬·수찬·부교리, 사간원정언·헌납 등을 지냈다. 1699년(숙종 25) 부수찬 때 백골징포(白骨徵布)와 황구첨정(黃口添丁)의 폐단을 논하고 각종 조세와 군역 등에 대해 개혁안을 건의하였다. 왕이 해당 부서에 명해 시행토록 했으나, 실제로 시행된 것은 없었다.

1728년에는 소론의 중신인 최석정(崔錫鼎)·윤지완(尹趾完)·강세구(姜世龜) 등의 억울함을 논변하고, 송시열(宋時烈)·김수항(金壽恒) 등의 화는 자초한 것이라는 뜻으로 상소했다가, 노론 김창집(金昌集) 등의 공격을 받았다. 홍문관교리·부응교·응교, 시강원보덕·필선, 사간원사간, 사헌부집의를 두루 지냈다.

1710년에는 흉년의 재해를 보고하고 여러 가지 구제책을 건의하였다. 다음 해 당상관인 승지로 발탁되어 일본에 보낼 서계와 예단을 전례대로 하고 더하지 말도록 주청하였다. 이 해 충청도관찰사에 임명되었으나 노부모 때문에 사퇴했다가 다시 임용되었다. 이 때 유계(兪棨)와 윤선거(尹宣擧)가 공동으로 지은 『가례원류(家禮源流)』를 유계의 후손들이 단독으로 간행하자 상소해 논란하였다.

1714년(숙종 40) 부친 윤증이 졸하자, 상소해 유언을 진달하고 조정의 은전을 일체 사양하기를 청하였다. 윤증의 장례는 조정에서 대신의 예를 사용토록 했으나 사절하고 선비의 예로 치렀다. 1722년(경종 2) 이후 승지·부제학·이조참의 등을 지냈다.

영조 즉위 후에는 대사헌, 비변사당상, 홍문관부제학을 역임했으나 노론이 득세해 신임옥사를 무옥(誣獄: 무고로 인한 옥사사건)으로 번복하자 다른 소론 관원들과 함께 파직되었다. 뒤에 유수를 지냈다.

참고문헌

『숙종실록(肅宗實錄)』
『경종실록(景宗實錄)』
『영조실록(英祖實錄)』
『정조실록(正祖實錄)』
『국조방목(國朝榜目)』
집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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