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55년(철종 6) 미국상선 투브라더스호(Two Brothers號)가 동해안 통천 앞바다에 표착하여 선원 4인이 서울로 이송되었는데 역관들도 그들과 의사소통을 하지 못하자, 정부에서는 당시 서양의 문헌을 많이 가지고 있던 윤협과 이종원(李鍾元)을 보내어 필담하게 하였다.
윤협이 선원들에게 『근세해도환기(近世海圖寰紀)』 등 유럽풍속도를 보여주자, 그들은 대단히 기뼈하였다. 또 그들의 자취를 남기기 위하여 서생을 시켜 이들의 전신을 그리게 하고 알파벳과 단어 몇 마디를 한글로 표기하여두었다.
1864년(고종 1) 경흥부사로 재임할 때 러시아인들이 통상을 요구하자, 이를 거부하고 정부에 보고하였다가 방비를 소홀히 하였다는 이유로 감봉처분을 받았다.
그뒤에도 러시아인들의 몇 차례에 걸친 통상요구를 거부하였고, 1867년 러시아인들이 우리나라 사람들과 말썽을 일으키자 교졸(校卒)을 동원하여 쫓아버렸다. 1870년에 황해도수군절도사가 되어 해안방비에 힘썼으며, 그뒤에 인천부사로 부임하였다.
1875년 1월 수호조약을 강요하러 온 일본사절 일행인 모리야마[森山茂]와 제물포에서 담화하였다. 모리야마는 조선측 대표의 성명과 관직을 윤협에게서 알아낸 뒤 일본내의 정한론(征韓論)과 대만출병군으로 정한하겠다고 윤협를 위협하였다.
그 해 6월에는 수호조약부록을 체결하러 온 미야모토[宮本小一] 일행에게 정부의 허가도 없이 배를 빌려주어 한강에 직접 닿게 하였다 하여 파직당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