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등은 이찬(伊飡)에 이르렀고 거문고 타는 법을 전수하는 데 공헌하였다.
거문고는 진나라 사람이 고구려에 보낸 칠현금(七絃琴)을 왕산악(王山岳)이 개량하여 하나의 악기로 발전시켰는데 신라에서는 지리산을 중심으로 옥보고(玉寶高)-속명득(續命得)-귀금이貴金)으로 전수되었다. 그런데 귀금이 지리산에 입산하여 나오지 않으므로 왕은 금도(琴道)가 단절될 것을 염려하였다. 이에 왕명을 받들어 남원경(南原京)의 사신(仕臣)이 되어, 총명한 소년 안장(安長)과 청장(淸長) 2인을 뽑아서 지리산 운상원(雲上院)에 보내어 귀금에게 거문고 타는 법을 배우게 하였으나 귀금은 그 기술을 다 가르쳐주지 않았다. 이에 윤흥이 귀금을 찾아가서 예의와 정성을 다하여 비법을 전수해줄 것을 청하였다. 이 후 귀금은 비법을 안장에게 전해주고 안장은 극종(克宗)에게 전하여 널리 퍼졌다 한다.
그런데 윤흥은 866년(경문왕 6) 10월에 동생인 숙흥(叔興)·계흥(季興)과 더불어 모반을 도모하였다. 이 모반은 그들이 문성왕대에 왕실측근으로 왕권에 밀착되어 활약하다가 경문왕이 왕위에 오름으로써 왕위가 균정계(均貞系)에서 헌정계(憲貞系)로 옮아감에 따라 균정내에서 불만이 쌓였고 이에 균정계에서 다시 왕위를 찾으려는 의도에서 일으킨 것이다. 그러나 일이 발각되어 대산군(岱山郡 : 지금의 경상북도 성주)으로 달아났지만 체포되어 일족과 더불어 죽임을 당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