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0년대에 활발한 활동을 보였으며, 1920년대 말부터 1930년대에 걸쳐 민족주의 급진파를 표방하는 단체로 변모되어 갔다. 1919년의 거족적인 3·1독립운동을 겪은 뒤, 해외로 독립운동기지를 옮긴 애국지사들은 강력한 일제의 무력에 대항하여 독립을 쟁취하기 위하여는 보다 조직적이고 강력한 독립운동단체의 조직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였다.
이러한 요망에 부응하여 1919년 11월 9일 밤, 만주 길림성 파호문(把虎門) 밖 중국인 반모(潘某)의 집에 모인 독립지사들은 밤을 새워가면서 숙의한 끝에 그 이튿날인 10일 새벽에 급진적 민족주의 노선을 지향하는 항일비밀결사인 의열단을 조직하였다. “정의의 사(事)를 맹렬히 실행한다.”고 한 데서 유래된 단체명만 보아도 이 단체의 성격을 알 수 있다.
의열단은 당시 만주와 중국 본토지역에 조직된 많은 독립운동단체가 미온적이고 온건한 독립운동을 전개하고 있다고 보고, 이에 대한 반성으로서 과격하고 급진적인 폭력투쟁을 목적으로 하였다.
의열단 창단 당시의 단원은 대체로 신흥무관학교 출신이 중심이 되었고, 그 명단은 자료에 따라 한결같지 않으나, 김대지(金大池) · 황상규(黃尙奎)가 고문으로서 지도하였고, 단원은 김원봉(金元鳳) · 윤세주(尹世胄) · 이성우(李成宇) · 곽경(郭敬) · 강세우(姜世宇) · 이종암(李鍾岩) · 한봉근(韓鳳根) · 한봉인(韓鳳仁) · 김상윤(金相潤) · 신철휴(申喆休) · 배동선(裵東宣) · 서상락(徐相洛) · 권준(權俊) 등 13명이며, 단장에는 김원봉이 선출되었다.
일설에는 김원봉의 고모부인 황상규가 단장이라고 전해지고 있으나 대부분의 다른 자료에서 김원봉이 단장으로 기록되어 있는 점으로 보아 이는 오류인 것 같다.
의열단의 지도이념 및 사상을 정립하는 데는 창단의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던 김원봉의 동향 선배이며 고문인 김대지와 황상규의 영향이 컸으며, 뒤에는 신채호(申采浩)가 독립운동의 경륜과 강령을 체계화한 것으로 보인다. 신채호가 1922년 12월에 작성에 착수하여 1923년 1월에 완성, 발표한 <조선혁명선언>(일명 의열단선언)에는 의열단의 독립투쟁노선과 행동강령이 잘 나타나 있다.
즉, 민중직접혁명과 평등주의에 입각하여 당시 일부 민족주의자들의 독립운동노선이었던 문화주의 · 외교론 · 준비론 등 일체의 타협주의를 배격하고, 오직 폭력적 민중혁명에 의한 일제의 타도라는 전술을 통하여 독립의 쟁취를 목표로 한 것이다. 의열단의 민중직접혁명노선과 전술은 시대의 흐름에 따라 당시의 시대사조를 반영하여 수정이 가해져, 창단 초에 비하면 강령상의 변질을 보게 되었다.
1926년부터 점차 당대를 풍미하던 사상계의 영향을 받아 사회주의 이론을 수용하기 시작한 의열단의 강령 및 사상은 1928년 10월 ‘조선의열단중앙집행위원회’ 이름으로 발표된 <창단9주년기념성명>을 계기로 종래의 조국광복을 목표로 한 순수한 민족주의노선에서 계급적 이데올로기에 기반을 둔 급진적 민족주의 내지 사회주의노선으로 전환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이 무렵만 하더라도 의열단은 항일독립운동에 있어서 전민족적 통일전선의 구축을 위한 항일민족공동전선을 세계약소민족의 반식민제국주의전선으로 연결시키려는 시대적 · 민족적 요망을 반영한 것으로 보인다.
의열단이 본격적으로 급진좌파의 노선으로 가게 되는 것은, 1929년 12월 북경에서 ML파와 합동하여 조선공산당재건동맹을 조직하였을 때부터라고 하겠다. 의열단의 창단 초기에는 성문화된 강령은 없었으나, 특히 구축왜노(驅逐倭奴) · 광복조국(光復祖國) · 타파계급(打破階級) · 평균지권(平均地權)을 단원들의 이상이며, 강령과 같이 여기고 있었다.
이 중 구축왜노와 광복조국은 모든 독립운동단체가 추구한 목표였고, 타파계급과 평균지권은 민중을 직접혁명의 중핵으로 하는 3·1운동 이후 독립운동의 새로운 흐름을 나타낸 것이다. 특히, 의열단의 초기 사상을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은 다음의 주장에서 살펴 볼 수 있다.
즉, “우리 동포가 광복운동을 시작한 이래 임시정부를 조직하고, 혹은 군대를 조직하고, 혹은 공산당과 제휴하고, 혹은 국민대표회의를 개최하는 등 여러 가지 실책(實策)을 강구하여 보았으나 무슨 얻은 바가 있었는가? 우리 단원이 노리는 곳은 동경(東京) · 경성(京城)의 2개 소로서 우선 조선총독을 죽이기를 대대로 5, 6명에 미치게 되면 반드시 그 후계자가 되려는 자가 없게 될 것이고, 동경시민을 놀라게 함이 매년 2회에 달하면 한국독립문제는 반드시 그들 사이에서 제창되어 결국은 일본국민 스스로가 한국통치를 포기하게 될 것임은 명약관화한 일이다.”고 한 것만 보아도 민족적 지상과제인 독립의 쟁취를 위하여는 오직 직접적 투쟁방법인 암살과 파괴라는 과격한 방법을 택할 수밖에 없었다는 점에서 순수한 민족독립운동을 지향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강령은 1928년 이후에는 21개 조의 강령으로 확대되고 창단 초기와는 변질된 사상경향을 보이게 되었다.
의열단은 창단 직후 ‘공약10조’와 뒤에 ‘5파괴’, ‘7가살(可殺)’이라는 행동목표를 기본규약으로 삼아 독립운동의 지침으로 채택하였다. ① 천하의 정의의 사(事)를 맹렬히 실행하기로 함. ② 조선의 독립과 세계의 평등을 위하여 신명을 희생하기로 함. ③ 충의의 기백과 희생의 정신이 확고한 자라야 단원이 됨. ④ 단의(團義)에 선(先)히 하고 단원의 의(義)에 급히 함.
⑤ 의백(義伯) 1인을 선출하여 단체를 대표함. ⑥ 하시(何時), 하지(何地)에서나 매월 1차씩 사정을 보고함. ⑦ 하시, 하지에서나 초회(招會)에 필응(必應)함. ⑧ 피사(被死)치 아니하여 단의에 진(盡)함. ⑨ 1이 9를 위하여 9가 1을 위하여 헌신함. ⑩ 단의에 배반한 자는 처살(處殺)함.
이와 같이 의열단은 조국독립을 위하여 과감하고 과격한 적극투쟁과 희생정신을 강조하고 있으며, 암살대상으로서 ① 조선총독 이하 고관, ② 군부 수뇌, ③ 대만총독, ④ 매국노, ⑤ 친일파 거두, ⑥ 적탐(밀정), ⑦ 반민족적 토호열신(土豪劣紳) 등을 지목하였다. 이 의열단의 이른바 ‘가살(可殺)’은 이미 대한민국임시정부에서 선언한 ‘7가살’과 대동소이하였다.
한편, 파괴대상으로는 ① 조선총독부, ② 동양척식회사, ③ 매일신보사, ④ 각 경찰서, ⑤ 기타 왜적 중요기관 등 일제의 식민지 통치기관 및 그 관련기관의 시설에 대한 폭파를 목적으로 하였다. 의열단은 위의 계획을 실천에 옮기기 위하여 우선 폭탄제조법을 배울 필요가 있었다.
김원봉 등은 이미 신흥무관학교 학생 때 중국인 교관 주황(周況)에게서 폭탄제조법을 배운 바 있었는데, 이 무렵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별동대인 구국모험단(救國冒險團)의 김성근(金聲根)이 폭탄제조를 연구하고 있었으므로, 그를 길림으로 초빙하여 상해에서 익힌 폭탄제조법의 기술을 단원들에게 가르치기도 하였다.
의열단은 단원 중 모험가로 일컬어지는 김대지 · 김천 · 한봉근 · 김상윤 등이 중심이 되어, 창단된 지 얼마 뒤에 근거지를 길림에서 북경(北京)으로 옮기고, 다시 상해지방에서 열렬단원을 포섭하고 세력확대에 힘씀으로써, 1924년경에는 중국인을 포함하여 약 70여 명의 결사적 단원을 가지게 되었다.
후일에는 한국민족운동사에 있어서 지도적 위치에 있던 김구(金九) · 김규식(金奎植) · 김창숙(金昌淑) · 신채호 등을 실질상의 고문으로 삼고, 장개석(蔣介石) 중화민국총통의 후원을 받게 되었다고 한다. 초기 의열단의 의거활동을 중심으로 그 중요한 것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① 밀양 · 진영 폭탄반입사건:일본 고관에 대한 암살과 중요관공서의 폭파를 목적으로 하는 의열단의 제1차 암살파괴계획은 1920년 3월에 시작되었다. 우선 폭탄을 국내로 반입하기 위하여 3월 중순경 의열단원 곽재기(郭在驥)가 만주 안동현(安東縣)에서 밀양의 김병완(金炳完)에게 보낸 폭탄이 경기도 경찰부에 탐지되어 수색한 결과 폭탄 3개도 압수되고, 폭파계획의 행동책임을 맡은 관련자 18명 중 곽재기 등 12명이 일본경찰에게 붙잡혔다.
5월 중순경에는 의열단원 이성우(李成宇)가 다시 폭탄 13개 및 권총 2점을 입수하여 안동현 이륭양행(怡隆洋行)을 통하여 경상남도 진영(進永)의 강원석(姜元錫)에게 보냈는데, 이것이 일본경찰에 발견됨으로써 압수되고 이 사건의 관련자 윤치형(尹致衡) 등 6명이 붙잡혔다. 한편, 이 폭탄의 반입과 함께 의열단의 행동대원들은 파괴대상을 선정, 검토하면서 거사 준비에 착수하던 중 붙잡힘으로써 거사는 좌절되었다.
1920년 6월에는 곽재기 · 이성우 등 전원이 검거되어 취조를 끝내고 10월에는 경성지방법원검사국에 송치되었는데 이 사건의 관련자는 모두 26명이었고, 붙잡힌 단원은 18명이었다. 이 사건은 경성지법에서 8개월간의 예심을 거쳐 붙잡힌 지 1년이 지난 1921년 6월 언도공판에 회부되어 16명 중 강원석 1명만 면소(免訴) 방면되고 나머지 15명은 모두 유죄로 결정되었다. 특히, 선고공판에서 이성우와 곽재기는 주범으로 지목되어 8년형이 선고되었다.
② 부산경찰서 폭탄투척의거:제1차 암살파괴계획이 좌절된 지 얼마 안된 1920년 9월 14일, 이번에는 경상남도 부산경찰서가 의열단원 박재혁(朴載赫)에 의하여 폭파되고 서장 등 3명이 즉사한 사건이 일어났다. 이 의거는 의열단에 의하여 계획된 암살폭파사건의 하나로 부산 출신의 박재혁에게 명하여 그 대상을 부산경찰서로 정한 것이다.
1920년 9월 초 그는 선편(船便)으로 상해를 떠나 나가사키(長崎)를 거쳐 9월 13일 부산에 상륙하였다. 싱가포르에서 사업을 경영하고 있던 그는 의열단의 ‘공약 10조’ 제7항의 “하시, 하지에서나 초회에 필응한다.”는 단명에 의하여 상해로 와서 부산경찰서 폭파의 임무를 띠고 입국하였던 것이다.
입국한 다음날 아침 그는 중국인 고서적상(古書籍商)으로 변장하고 평소 지면이 있던 부산경찰서장 하시모토(橋本秀平)를 방문, 고서적을 구경하는 그에게 먼저 의열단의 전단을 보인 다음 폭탄 2개를 투척하였다. 폭음과 함께 둘이 함께 쓰러졌는데, 중상을 입은 서장은 병원으로 가는 도중에 사망하고 옆에 있던 일본경찰 2명도 즉사하였다. 박재혁도 중상을 입은 채, 투옥된 날부터 단식을 시작하여 9일 만에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③ 밀양경찰서 폭탄투척의거:부산경찰서 폭탄투척의거가 일어난 지 불과 3개월 만에 이번에는 경상남도 밀양경찰서가 폭탄세례를 입은 사건이 일어났다. 1920년 12월 27일 오전 7시 30분경 밀양경찰서 서장실에서 전경찰서원이 모여 서장 와다나베(渡邊)의 훈시를 듣고 있을 때, 밀양 출신의 의열단원 최수봉(崔壽鳳)이 경찰서 창밖에서 이 기회를 노려 폭탄 2개를 연달아 투척하였다.
제1탄은 남쪽 유리창으로 던진 것으로 정렬하고 있던 순사부장의 오른손에 맞아 불발되고, 다시 정면 현관에서 던진 제2탄은 복도에서 폭발하였으나 인명피해는 없었다. 이 사건은 일본경찰에게 피해를 주지 못하였지만 민심에 충격을 불러일으키는 등 그 끼친 바 영향은 컸다.
의거에 사용된 폭탄은 이종암 · 김상윤 등이 제공한 것인데, 이 거사는 결국 실패로 돌아갔으며, 최수봉은 현장에서 단도로 자결을 기도하였지만 뜻을 이루지 못하고, 곧 붙잡혀 병원으로 옮겨져 치료받은 뒤 검찰로 송치되었다. 그는 대구지방법원에서 무기징역을 언도받고 검사의 공소로 대구복심법원에서 사형이 선고되었다. 1921년 7월 8일 최수봉은 굽힘없이 태연하게 교수대에 올라 27세의 짧은 생애를 장렬하게 마쳤다.
④ 조선총독부 투탄의거:1921년 9월 12일 오전 10시경 서울 남산 밑에 있는 왜성대(倭城臺:지금의 숭의여고 부근) 총독부청사 2층에 있는 회계과와 비서과에 각각 1개씩의 폭탄이 투척되었다. 비서과의 것은 불발이었으나, 회계과의 것은 큰 폭음과 함께 폭발하여 건물의 일부가 파괴되었다. 이 의거가 일어나자 일본경찰은 비상령을 내리고 범인체포에 혈안이 되었으나 색출에 실패하였다.
결국, 이 사건의 진상은 이듬해 3월 상해에서 일본 육군대장 다나카(田中義一)에 대한 암살저격사건으로 김익상이 붙잡혀 그가 실토할 때까지 밝혀지지 않았다. 의열단원 김익상(본명 金鳳男)은 서울 출신으로 1921년 9월 10일 폭탄 3개를 지니고 북경을 떠나 이튿날 서울에 도착, 12일 전기수리공으로 변장하여 총독부 정문을 무사히 통과하고 2층으로 향하여 거사하였던 것이다.
그는 의거 후 일본인 목수로 변장하고 그날 저녁 용산역에서 기차를 타고 중도에 평양에서 하차하여 하루를 소일한 뒤 신의주를 거쳐 무사히 북경으로 돌아갔다. 이 사건은 일제에게는 큰 충격을 주었으며 당시의 서울 시민을 크게 놀라게 하였다.
⑤ 상해황포탄의거(上海黃浦灘義擧, 田中義一大將 저격의거):1922년 3월 28일 일본 육군대장 다나카(田中義一)가 기선편으로 상해에 도착한다는 정보를 접하자, 의열단이는 그의 암살저격계획을 세웠다. 이 계획은 치밀하게 추진되어 부두에서 제1선은 오성륜(吳成崙), 제2선은 김익상, 제3선은 이종암이 맡기로 하였다.
제1선을 맡은 오성륜은 배에서 내려 걸어오는 다나카를 저격하였으나, 때마침 앞으로 나선 영국인 여성이 맞아 즉사하였고, 제2선을 맡은 김익상이 곧이어 자동차에 오르는 것을 저격하였으나 그의 모자를 관통시키는 데 그쳤다. 제3선의 이종암은 앞으로 나아가 폭탄을 던졌으나 자동차 뒤에 떨어진 폭탄이 불발되고 말았다.
결국 의열단의 이 의거는 실패로 돌아가고 3명 중 김익상 · 오성륜이 일본경찰에게 붙잡혔는데, 같은 해 4월 오성륜은 탈옥에 성공하고 김익상만 일본 나가사키로 압송되어 사형언도와 무기징역을 거쳐 20년 징역형으로 감형되어 복역하고, 출옥한 지 얼마 안 되어 일본형사에게 연행된 채 암살당하였다.
⑥ 종로경찰서 폭탄투척 및 삼판통(三坂通) · 효제동 의거:1923년 1월 12일 종로경찰서에 폭탄을 투척한 사건이 일어났다. 이 의거를 일으킨 사람이 의열단원 김상옥(金相玉)이었음은 그가 순국할 때까지 당시의 일본경찰당국도 몰랐다.
그러나 종로경찰서가 폭탄세례를 받은 지 5일이 지난 1월 17일 눈 내리는 새벽 3시, 그의 은신처인 삼판통(지금의 후암동) 고봉근(高奉根)의 집이 종로경찰서 형사진에게 탐지되어 우메다(梅田) 경부 등의 지휘 아래 20여 일본경찰에게 포위되었다. 김상옥은 단신으로 일본경찰과 총격전을 벌여 다무라(田村) 형사부장 등을 사살하고, 그 밖의 수 명에게 중상을 입힌 뒤 포위망을 뚫고 남산 쪽으로 자취를 감추었다.
그는 눈 덮인 남산을 넘어 지금의 금호동에 있는 안장사(安藏寺)를 찾아 승복을 빌려 입고 효제동 이혜수(李惠受) 집에 은신하였다. 1월 22일 새벽 일본경찰은 우마노(馬野) 경기도 경찰부장의 총지휘로 수백 명의 무장경관이 효제동의 은신처를 완전 포위하였다. 김상옥은 단신으로 두 손에 권총을 들고 일본경찰과 접전 3시간 반 끝에 서대문경찰서 경부 구리다(栗田淸造) 외 수 명을 사살하고 총탄이 다하여 최후의 일발로 자결하였다. ⑦ 제2차 암살파괴계획(黃鈺 · 金始顯 등의 폭탄반입사건):1923년 초 의열단은 조선총독부 등 일제 관공서와 총독 사이토(齋藤實) 등 일제 고관을 대상으로 하는 제2차 파괴암살계획을 추진하였다. 이를 위하여 곧 상해에 비밀폭탄제조공장을 두고 폭탄기술자로서 독일인 · 헝가리인 등 각국인을 초빙하여 고성능의 폭탄을 제조하였다.
이를 국내로 반입하기 위하여 상해에서 톈진(天津)으로 운반하였는데 여기에는 <조선혁명선언> 및 <조선총독부관공리에게>라는 유인물도 함께 포함되어 있었다. 이 폭탄반입계획은 그 실행을 김시현이 담당, 톈진에 가서 홍종우(洪鍾祐) 등을 지휘하여 수송하기로 하였다. 그는 당시 경기도 경찰부의 한국인 경부 황옥과도 동지적 결합을 하고, 1923년 3월 7일 안동현의 조선일보사 안동지국장댁에 들렀다.
12일 오전 6시 차로 김시현 · 황옥 · 김재진(金在震) · 권동산(權東山) 등 4명이 폭탄 18개와 권총 5정을 가지고 톈진을 출발하여 서울로 향하고, 나머지 폭탄 18개와 유인물은 안동현 홍종우집과 신의주 조동근(趙東根)집에 숨겨두었다.
그러나 위의 4명 중 김재진이 평안북도 경찰부 고등과 김덕기(金悳基)에게 매수되어 이 계획을 일본경찰에게 밀고함으로써 홍종우 · 백영무(白英武) · 조동근 · 조영천(趙英千) 등 4명이 체포되고 폭탄 10개, 선언서 · 전단 691매를 압수당하였으며, 그 뒤 신의주에서 발견된 폭탄 8개와 합쳐 폭탄 18개를 압수당하였다. 또한, 경기도 경찰부에서는 서울에 도착한 김시현 · 황옥 등 10여 명을 체포하고 폭탄 18개를 압수하였다.
의열단의 암살파괴계획은 의거에 착수하기 위한 준비과정에서 좌절되고 이에 관련된 의열단원들은 모두 체포되고 말았다.
⑧ 동경 니주바시 폭탄투척의거:1924년 1월 5일동경 니주바시 사쿠라다몬(二重橋櫻田門)에 폭탄을 투척한 사건이 일어났다. 이 의거는 의열단원 김지섭(金祉燮)에 의하여 감행된 것으로 일본 천황이 사는 궁성을 파괴하고자 한 것이다.
김지섭은 신년 벽두 동경에서 열리는 의회에 조선총독을 비롯한 일제의 고관들이 참석한다는 소문을 듣고, 이곳에 폭탄세례를 주기 위한 목적으로 1923년 12월 20일 3개의 폭탄을 지니고 상해를 떠나 일본으로 향하였다. 더욱이 1923년 9월에 일어났던 관동대진재(關東大震災)에 희생된 동포들의 영혼을 위로하기 위해서도 이번의 의거계획은 그의 마음을 설레게 하였다.
그러나 막상 동경에 도착하여 제국의회가 휴회중임을 알게 되자 계획을 바꾸어 궁성에 폭탄을 투척하기로 하였다. 1924년 1월 5일 저녁 그는 궁성 니주바시 앞에 접근하여 우선 제1탄을 보초 경찰에게 던졌으나 불발되었으며, 다시 2탄을 던졌으나 역시 불발이 되어 정문 석책(石柵) 밖에 떨어지고, 마지막으로 던진 3탄도 불발이 되고 말았다.
이 거사는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고 실패에 돌아가고 그는 일본경찰에게 붙잡히게 되었다. 그는 사형 구형에 무기징역을 선고받아 복역중, 20년으로 감형되었으나 1928년 2월 몸이 극도로 쇠약하여 옥사하였다.
⑨ 동양척식회사 및 식산은행폭탄투척의거:1926년 12월 28일 하오 2시경 동양척식회사 및 조선식산은행에 폭탄을 투척한 사건이 일어났다. 이는 의열단원 나석주(羅錫疇)에 의하여 이루어진 의거로, 의열단이 그동안 계획한 여러 차례의 암살 및 파괴공작이 실패한 뒤 모처럼 성공을 거둔 것이었다. 나석주는 1926년 7월 하순 톈진에서 김창숙이 준 자금으로 권총과 폭탄을 구입하여 같은해 12월 26일 인천에 도착하였다.
12월 28일 거사를 단행하기로 하고 하오 2시경 먼저 식산은행에 들어가 폭탄 1개를 던지고, 다시 동양척식회사로 들어가 폭탄을 투척하고 권총을 난사하면서 1층과 2층에서 수 명의 사원을 사살하였다. 동양척식회사를 수라장으로 만들고 그 곳을 나와 전차길로 뛰어나왔을 무렵 총소리를 듣고 경기도 경찰부경부보가 달려오자 그를 사살한 다음, 일본경찰 4, 5명의 추격을 받게 되자 권총으로 자결하였다.
1936년 8월 의열단 김원봉단장 지령으로 상해일본영사및 일본인사교클럽을 폭파할 계획을 세웠으나 사전탐사과정에서 폭발이 일어나는 등 실패하였다.
위에서 살펴본 의열단의 의거 외에도 제3차 폭탄계획 · 대구부호암살계획 · 북경밀정암살사건 · 이종암사건 등 의열단이 계획하고 실행한 의거는 계속되었는데, 의열단의 항일투쟁이 민족운동사상에 끼친 공헌은 매우 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