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성산(星山). 자는 원지(元之). 이시(李時)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선략장군(宣略將軍) 이효순(李孝純)이다. 아버지는 진사 이벽(李璧)이며, 어머니는 임천군사(林川郡事) 권수(權需)의 딸이다.
1486년(성종 17) 사마시에 합격하고,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권지승문원정자(權知承文院正字)·박사가 되었다. 1492년 예빈시와 군자감의 주부, 사헌부감찰을 거쳐, 정언·예조좌랑이 되었다. 연산군이 즉위하자 지평·교리·예조정랑을 역임하였다.
1498년(연산군 4) 장악원첨정·장령 등으로 봉직하였는데, 특히 장령으로 있을 때 국상(國喪)과 명나라 사신의 내왕으로 백성들이 매우 피폐하게 되자, 개성부와 한산군의 성 쌓는 작업을 중지하자고 청하여 백성들의 부담을 덜어주었다.
1500년 사간으로, 명나라 요청으로 해도도민(海島逃民)의 수괄(搜括)을 담당할 관리를 선발하는 과정에서 무고를 받아 나주로 유배되었다가, 이듬해 풀려나 대동도찰방(大同道察訪)이 되었다.1504년 갑자사화로 경상도 김산(金山)에 유배되었다. 중종이 즉위하자 직강·시강관을 거쳐, 1507년(중종 2) 홍문관직제학·부제학, 형조·병조의 참의를 역임하였다.
부제학 재임중 명분부정(名分不正), 작상무상(爵賞無常), 시국이사(示國以私), 영불신어민(令不信於民), 숭악장간(崇惡長奸)을 논하여 치도(治道)의 올바른 시행을 역설하였다. 1508년 대사간 등을 거쳐, 좌승지·춘추관·수찬관 등을 역임하였다.
1512년에 황해도관찰사로 나갔다. 이듬해 다시 첨지중추부사를 제수받고, 이어 이조참의로 재직하던 중 관찰사로 나갔을 적에 얻은 병으로 죽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