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76년(충렬 2) 8월 내시좌랑(內侍佐郎) 곽예(郭預)가 육운시(六韻詩)로 세자부시학공자(世子府侍學公子)를 시험할 때 뽑혔고, 10월 과거에 장원으로 남경사록(南京司錄)에 임명되었다. 11월 왕에게 팔관하전(八關賀箋)을 바치러 왔을 때 평소 사감을 가진 자가 있어 내수(內竪)를 통하여 참소하므로 체포된 일이 있었다.
1277년 12월 감찰시승 장군(監察侍丞將軍) 조인규(趙仁規)가 부하 개삼(介三)을 시켜 남경의 백성을 끌어모아 수달을 잡고 수달피를 만들어 축재하는 등 기강을 어지럽히므로 개삼을 잡아 가두고 심문하니 조인규가 공주에게 남경의 관리가 공주의 명령서를 찢어 던졌다고 고하여, 남경부사 최자수(崔資壽)와 함께 귀양을 갔으나 얼마 후 사실 관계가 확인되어 풀려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