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성집(聖執), 호는 미석(渼石). 경기도 양주 출신. 고종의 종척(宗戚)이다.
1877년(고종 14) 충량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우승지에 이르렀으나, 세상이 어지러워지자 벼슬을 그만두고 소박한 선비로 자처하였다. 1905년 을사조약이 강제 체결되자 매국 역적들을 참하자는 소를 올렸다.
이듬해 스승인 최익현(崔益鉉)이 의병을 일으켰다가 일본군에 패해 지도(智島)로 귀양갔다가 온 뒤 임병찬(林炳瓚)의 집에서 거사 계획을 꾸미며 후원을 부탁하였다. 이에 재산을 처분하여 무기를 구입하고 의병장이 되니, 이에 따른 의병이 300여 명이었다.
양주군 설악산으로 집결할 때 일본군이 급습하자 한강 상류 연안 민호리에서 대치하다가 미금면 금곡리에서 교전하고, 다시 광주군 서부면 송파장에서 결전을 전개하였으나 군량과 무기 부족으로 패하였다.
1907년 3월 항일구국운동을 목적으로 북경(北京)을 방문하고, 위안스카이[袁世凱]에게 구원병을 보내 일제의 침략으로부터 우리나라를 구해 주기를 요청하였지만, “중국도 망해 가는 판에 그럴 여력이 없다.”는 위안스카이의 답변에 실망하여 이듬해 10월에 돌아왔다.
1910년 국권이 강탈되자 고향인 양근(楊根)으로 내려왔다. 그러나 연일 일제 헌병의 혹심한 압박과 조사에 격분하고 이제껏 이룬 의거 계획이 수포로 돌아가 항일투쟁이 이루어지지 못하게 되자, 이듬해 7월 13일 나무에 목을 매어 자살을 기도하였다. 가족에게 발견되어 목숨을 건진 듯하였으나 다음날 새벽 사망하였다.
1977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