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군언(君彦), 호는 오백(梧栢). 정종의 서자인 덕천군(德泉君)의 후손으로, 아버지는 이적(李滴)이며, 어머니는 증찬성 구상정(具尙禎)의 딸이다.
1740년(영조 16) 무과에 급제, 이듬 해 선전관에 임명된 뒤 훈련원주부·판관 등을 지냈다. 1748년 통신사를 따라 일본에 갔다온 뒤 호조좌랑에 임명되니 이 때 처음 호조에 무랑(武郎)이 설치되었다. 1754년 충청도수군절제사, 이듬 해 경상우도병마절도사, 1759년 함경북도절도사가 되었다.
1762년 장헌세자(莊獻世子) 장례 때 여사대장(輿士大將)을 역임하고, 1773년 황해도·평안도 병마절도사가 되었다. 이 때 남당(南塘)에 성을 쌓는데 모두가 흙으로 쌓자고 했으나, 이곳은 땅이 습지보다 낮으므로 돌로 쌓아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1776년 총융사에 임명되었으며, 이 해 영조의 장례식이 있자 훈련원도정으로 여사대장이 되었다.
그러나 여사군이 소란을 피워 기율을 바로잡지 못한 죄로 파직되고, 다시 총융사에 보직되었다가 군량미를 비축하지 못한 죄로 파직되었다. 곧 복직해 1778년(정조 2) 평안도병마절도사가 되고, 1780년 어영대장을 거쳐 이듬 해 좌·우포도대장을 역임하였다. 1782년 북한평창(北漢平倉)의 군량미 보관 소홀로 총융사에서 삭직되었으나, 곧 복직해 형조판서를 지냈다.
1796년 훈련대장을 사직하면서 군제삼사(軍制三事)를 올렸다. 내용은 첫째 번상(番上)으로 인한 경비의 낭비와 폐단을 고려해 어영청·금위영의 군자(軍資)로써 경군민(京軍民)을 모병해 충원할 것, 둘째 궁궐 순찰을 위해 50칸에 1군포(軍鋪), 1군포에 군 4인을 두어 수직(守直)할 것, 셋째 수군^육군의 지역 배치를 고려할 것 등이다.
용모는 건장하고 뛰어났다 한다. 성품은 강직해서 권세 있고 부귀한 자에게 아첨하지 않아 명망이 있었으나 남과 반목한 때가 많았고, 여러 번 문신의 횡포를 감수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홍국영(洪國榮)이 실세한 뒤 정조의 두터운 신임을 받고, 성도·궁성 호위의 임무가 주어졌다. 춘당대(春塘臺)에서 활쏘기할 때의 모습이 마치 추운 겨울철에도 잎이 푸른 소나무와 측백나무 같다고 하여 정조가 오백이라는 당호를 하사하였다. 시호는 무숙(武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