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청남도 예산 출생. 경성고등보통학교와 히로시마고등사범학교를 거쳐 교토제국대학[京都帝國大學] 화학과를 졸업하였다. 1931년 촉매에 관한 연구로 이학박사학위를 취득하였고 한국 사람으로는 처음으로 1937년 경도대학 조교수에 임명되었다. 1938년 프린스턴대학(Princeton University)으로 가 테일러(Taylor,H.)·아이링(Eyring,H.) 등 양자화학의 선구자들과 함께 쌍극자능률을 연구해 하전분포를 처음으로 계산해냈다. 1941년 일본으로 돌아가 경도대학에서 일본 최초로 양자화학을 강의하였고 1943년 정교수가 되었다.
경성제국대학 이공학부가 생겼을 때 귀국을 희망하였으나 보내주지 않아 무산되었고, 광복 후 경성대학 이공학부장을 맡게 되었다. 국립서울대학교가 출범하면서 문리과대학 초대학장에 취임하였으나 좌우익투쟁에 환멸을 느껴 1948년 미국으로 갔다.
25년 동안 유타대학(The University of Utah) 교수로 있으면서 액체이론·분자점성학·표면화학·반응속도론 등에 관한 논문 90여편을 발표하였다. 1969년에는 「이-아이링 이론(Ree-Eyring theory)」으로 노벨화학상 물망에 오르기도 하였다.
1960년 빈에서 열린 국제원자력기구회의에 한국대표로 참석하였고, 1964년에는 자신이 1946년에 만든 대한화학회의 초청으로 귀국해 전국을 순회하며 강의하였다. 1973년 귀국하여 한국과학원 석좌교수에 취임하였으며, 대한민국 학술원 회원이 되었다. 고희를 넘긴 나이에도 불구하고 연구를 계속하여 20년 동안 70편에 가까운 논문을 발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