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완산(完山). 자는 경도(景度), 호는 경와(敬窩)·동련(東蓮). 이정태(李鼎台)의 아들이다.
1867년(고종 4) 진사, 1870년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해 홍문관수찬에 특제되었다. 1877년 병조참지, 1878년 경기도암행어사를 역임하였다. 1881년 4월에 파견된 조사시찰단(朝士視察團)의 한 사람으로 발탁되었는데, 이필영(李弼永)·민건호(閔建鎬)·임기홍(林基弘) 등이 통사로 동행하였다. 이때 이헌영이 시찰한 부서는 세관 관계 기구였고, 이 시찰로 인해 개화파 관료로서 성장할 수 있었다.
귀국한 다음 새로운 중앙기구로 통리기무아문(統理機務衙門)이 신설되자 부경리사(副經理事)로 통상사당상(通商司堂上)에 임명되었다. 임오군변 직후인 1882년 8월에는 승정원우부승지가 되었고, 1883년에는 경상우도암행어사·이조참의를 거쳐 부호군으로 감리부산항통상사무(監理釜山港通商事務)에 임명되었다.
1884년 의주부윤, 1886년 참의내무부사(參議內務府事)로 일본주차판사대신(日本駐箚辦事大臣)이 되어 일본에 다녀왔다. 귀국 후 동지춘추관사, 1887년 병조참판·한성부좌윤, 1889년 대사헌 등을 역임하였다. 1890년 이조참판·협판교섭통상사무(協辦交涉通商事務)·성균관대사성·공조참판·병조참판·경상도관찰사를 역임하였다.
1893년 한성부좌윤·형조참판, 1894년 지춘추관사·한성부판윤·공조판서·형조판서·충청도관찰사, 1895년 궁내부특진관을 거쳐 내부대신이 되었다. 1896년 6월 지방제도 개편 이후 평안남도관찰사로 임명되었다.
1897년 봉상시제조(奉常寺提調), 1898년 중추원일등의관(中樞院一等議官)·의정부참정, 1899년 장례원경(掌禮院卿)·궁내부특진관, 1900년 시종원경(侍從院卿), 1902년 경상북도관찰사, 1904년 경효전제조(景孝殿提調) 등을 역임하였다.
편찬서로는 『일본문견록(日本聞見錄)』·『일본문견별단초(日本聞見別單草)』·『일본세관시찰기(日本稅關視察記)』·『조선국수출입반년표(朝鮮國輸出入半年表)』·『나가사키세관규식초(長崎稅關規式抄)』 등이 있다. 시호는 문정(文貞)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