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쪽은 완주군, 서쪽은 군산시, 남쪽은 만경강을 경계로 김제시와 접하고, 북쪽은 충청남도 부여군 · 논산시와 접하고 있다. 동경 126°51′∼127°08′, 북위 35°52′∼36°09′에 위치한다. 면적은 506.52㎢이고, 인구는 30만 2061명(2015년 현재)이다. 행정구역으로는 1개 읍, 14개 면, 14개 행정동(31개 법정동), 581개 행정리(114개 법정리)가 있다. 시청은 전북특별자치도 익산시 남중동에 있다.
시의 동쪽 일부를 제외한 대부분의 지역은 구릉과 충적평야가 넓게 발달해 있다. 동부의 여산면 · 금마면에는 옥천계의 변성퇴적암류가 분포해 노령산맥의 지맥인 천호산(天壺山, 500m) · 미륵산(彌勒山, 430m) 등의 산지를 이루면서 동쪽의 완주군으로 연결된다.
천호산은 석회암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서쪽 사면에는 석회석광산과 석회동굴인 천호동굴이 있다. 이 변성퇴적암류에 접경해 여산면 · 금마면 · 왕궁면 등에는 중생대 쥐라기의 편마상화강암이 분포한다.
이상의 편마상화강암지역을 제외한 나머지 시의 대부분은 중생대 쥐라기의 대보화강암으로 이루어져 있다. 편마상화강암과 대보화강암의 분포지는 대체로 해발고도 50m 미만의 낮고 평탄한 구릉지를 이룬다. 이들 구릉지는 중생대 쥐라기에 형성된 화강암이 심층풍화를 받은 뒤 침식을 받아 형성된 것으로, 이를 모재로 한 적황색토양이 발달해 있다.
북서부 금강 연안에는 규암 · 편마암 등의 변성암류가 대보화강암에 접경해 용안면 · 웅포면 · 성당면 · 함라면 등에 분포하며, 함라산(咸羅山, 241m) 등 100m 이상의 구릉성 산지가 된다. 이 산지는 금강과 만경강의 북서쪽 분수계가 된다.
충적층은 남부의 만경강 연안인 목천동 · 동산동 · 신흥동 · 춘포면 · 오산면 등과 북부의 금강과 그 지류의 연안인 망성면 · 용동면 · 용안면 · 웅포면의 저지에 분포한다. 이들 충적층은 빙하기에 해수준이 낮아져 깊게 팬 골짜기를 후빙기에 만경강과 금강이 매적해 형성된 것이다. 이 충적층과 낮고 평탄한 구릉지는 만경평야의 핵심을 이룬다.
금강은 북서쪽에서 충청남도와 경계를 이루며, 어랑천 · 여산천 · 용안천 · 함열천 등의 지류가 대체로 미륵산을 경계로 시의 중앙에서 만경강과 분수계를 이루며 북쪽으로 흐른다. 만경강은 남쪽에서 전주시 · 김제시와 경계를 이루며, 탑천 · 익산천 · 왕궁천 등의 지류가 흐른다.
금강과 만경강은 경사가 매우 낮아 조석의 영향을 받는 감조구간이 긴 하천으로 시의 곳곳에 조수의 영향을 받았던 흔적이 나타난다. 따라서 하천수를 용수로 사용하기 어려웠으나, 오늘날은 두 하천의 지류에 제수문을 설치해 역류를 막고 그 물을 농업용수로 이용하고 있다.
기후는 남부 서안형 기후구에 속한다. 연평균기온 13℃, 1월 평균기온 -1.0℃, 8월 평균기온 27℃이며, 연강수량은 1,300㎜이다.
구석기시대 유적지로는 심막유적(여산면 원수리)과 쌍정리유적(춘포면 쌍정리) 등이 있으며 이러한 유적들에서 찍개 · 톱날석기 · 좀돌날몸돌 등 구석기시대 유물이 출토되었다.
신석기시대의 유물인 돌도끼 · 화살촉 · 선돌 등은 다수 발견되었으며, 신석기시대 이후 이 지방은 호남평야의 중심지로서 농경문화가 번창하였다. 삼한시대에는 마한의 영역에 속했는데, 마한 54개국 중 건마국(乾馬國) · 감해국(感奚國) · 여래비리국(如來卑離國) 등의 소국이 있었다고 한다.
또, 기자(箕子)의 41대손인 기준(箕準)이 위만의 난을 피해 금마지방에 마한을 세웠다는 설도 있다. 백제의 시조 온조(溫祚)가 마한을 병합하고 이 곳을 금마저(金馬渚)라 했으며, 무왕은 이 곳에 도성을 두어 사비성 · 웅진성과 함께 3경제(三京制)를 경영하였다.
무왕은 거대사찰인 미륵사 · 제석사(帝釋寺)를 창건했고, 왕궁평성(王宮坪城)을 쌓았다. 이때부터 금마지방은 백제의 정치 · 경제 · 문화의 중심지가 되었다. 백제시대에 웅포 · 함열 일대는 금마군(金馬郡) · 감물아현(甘勿阿縣) · 소력지현(所力只縣) · 알야산현(閼也山縣) 등이 있었다고 하는데, 자세한 연혁은 문헌 자료가 미비해 잘 알 수 없다.
다행히 입점리에서 왕릉으로 추정되는 백제고분이 발굴 조사되었을 뿐만 아니라, 주변에 다수의 백제고분이 분포하고 있어 이 지역은 백제시대 상당히 유력한 정치 세력이 존재한 지역이었음을 알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지리적으로 공주와 부여를 잇는 금강하구에 자리잡고 있어서 방어의 요충지로 전초기지의 역할을 했을 것으로 보인다.
삼국을 통일한 문무왕은 668년(문무왕 8)금마에 보덕국(報德國)을 세우고 고구려의 유족인 안승(安勝)을 보덕국왕으로 임명했으나, 683년(신문왕 3) 보덕국을 폐하였다. 경덕왕 때 금마군(金馬郡)으로 개칭되어 옥야현을 영속시켰으며, 감물아현을 함열현으로 고쳐 임피군의 영현으로 삼았다.
또한 백제시대 알야산현을 야산(野山), 소력지현을 옥야현으로 고쳐 금마군의 영현으로 삼고, 지량초현(只良肖縣)을 여량현(礪良縣)으로 덕은군 영현을 삼았다. 그리하여 금마군은 옥야 · 야산 · 우주(紆洲) 등 3개 현을, 임피군은 함열 · 옥구 · 회미 등 3개 현을, 덕은군은 시진(市津) · 여량 · 운제(雲梯) 등 3개 현을 각각 영현으로 거느렸다.
후삼국시대에 고려 태조는 후백제를 정벌하기 위해 연산(連山)을 거쳐 마성(馬城, 일명 미륵산성)에 진을 치고, 신검(神劍)형제를 공격해 탄현과 진터에서 승리를 거두고 후삼국을 통일하였다.
고려시대에는 금마군 · 여량현 · 낭산현 · 함열현 · 옥야현 · 도내산소(道乃山所) 등의 군현이 전주목(全州牧)의 관할하의 속군현으로 있었다. 1012년(현종 3) 거란의 침입으로 현종이 나주로 파천할 때 여량(礪良)을 거쳐 남행하였다. 금마군은 1344년(충혜왕 복위 5) 원나라 순제 황후 기씨(奇氏)의 외향이라 해 익주(益州)로 승격되었다.
고려시대 이 지방은 지방교통의 중심지로서 전공주도(全公州道)에 속한 많은 역참(驛站)이 산재해 있었다. 1390년(공민왕 2) 권근(權近)이 윤이(尹彛) · 이초(李初)의 옥사에 연루되어 청주에 유배되었다가 이 곳으로 이배(移配)되었는데, 그 때 『입학도설(入學圖說)』을 지었다고 한다.
1413년(태종 13) 현재의 명칭인 익산군으로 개칭되었다. 『세종실록지리지』에 의하면, 당시 익산군의 호구는 319호 1,623인이었다. 임진왜란 때 이 곳 사람인 오응정(吳應鼎) · 오욱(吳彧) · 오동량(吳東亮) 부자는 남원성을 지키다가 전사했으며, 의병장 이보(李寶)는 진산전투(珍山戰鬪)에서 전사하였다.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조정에서는 이 곳 여산에 의병청(義兵廳)을 설치하고 정홍명(鄭弘溟)을 호소사(號召使)로 임명해, 많은 의병들을 모아 청주 · 과천 등지에서 큰 승리를 거두었다.
조선시대에는 조운(漕運)의 거점지로 중시되어 웅포에 덕성창(德成倉), 성당포에 성당창(聖堂倉)이 있었으며, 남해에서 서울로 연락되는 함열의 소방봉봉수대(所方峰烽燧臺)와 용안의 광두원봉수대(廣頭院烽燧臺)가 있어 군사상 중시되었다.
1895년 기존의 여산부(礪山府)가 여산군으로 개편됨으로써 여산부에 속해 있던 익산군이 전주부 익산군으로 개편되었고, 1896년 전라북도(현, 전북특별자치도) 익산군이 되었다. 1899년옥야현이 전주부에서 분리되어 익산군에 편입되었다. 이리 지역은 원래 갈대가 무성한 습지였는데, 만경강유역의 황무지개척이 이루어지면서 양전으로 개간되어 농민들이 모여들었고, 군산이 개항된 뒤에는 전주와 군산의 중간지점으로 내왕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1912년부터 호남선이 구간별로 개통되었고, 이어서 이리∼군산간의 지선이 개통되었으며, 1914년이리∼전주간의 철도가 개통됨에 따라 이 지방은 교통의 중심지가 되었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시 익산군 · 여산군 · 함열군 · 용안군을 통합해 익산군으로 개편하였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3월 3일익산지방에 독립선언서가 배포된 것을 시발로 많은 사람들이 만세운동에 가담하였다. 1925년 이 군의 인구는 13만 5503명이었으며, 1931년 읍 · 면제의 실시에 따라 익산면이 익산읍으로 되었다가 곧 이리읍으로 개칭되었다.
근대의 인물로는 종교인과 일반인을 규합해 지하독립운동을 전개했던 김치옥(金致玉), 최익현(崔益鉉) · 임병찬(林炳瓚)과 함께 의병을 모집해 고산 · 장수 · 진안 등지에서 일본과 싸웠던 이규홍(李圭弘), 시조시인이자 국문학자인 이병기(李秉岐), 후진양성과 독립운동에 힘썼으며 『코리아타임즈』를 창간한 하경덕(河敬德), 국창으로 이름이 높았던 유공렬(柳公烈) · 정정렬(丁貞烈) 등이 있다.
1947년 4월이리읍이 이리부로 승격됨에 따라 익산군에서 분리되었고, 1949년 8월 15일이리시로 개칭되었다. 이후 이리시와 익산군은 별도의 행정구역으로서 존재하면서 수차의 행정구역의 개편조정이 있어 왔다.
5·16후 군사정부에 의해서 육군훈련소가 있던 익산군 황화면(지금의 충청남도 논산시 연무읍)이 충청남도로 이속되었다. 1977년 이리역 폭발사고로 많은 인명과 재산피해를 입기도 했으나, 시민들이 합심해 이를 극복하고 오늘날의 발전된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1979년 5월 1일함열면이 읍으로 승격되었고, 그 해 군청사가 이리시에서 함열읍의 현 위치로 이전되었다. 1986년 4월 1일에는 용안면 용동출장소가 면으로 승격되었다. 1995년 5월 10일 도농통합에 따라 이리시와 익산군이 새로운 익산시가 되었다.
1996년 1월 1일춘포면 대장출장소가 춘포면으로 승격되었으며, 같은 해 7월 10일북1동이 영등동과 어양동으로 분동되었다. 1998년 2월 2일 행정동 통폐합이 이루어져 창인동 · 중앙동 · 갈산동이 중앙동으로, 평화동 · 목천동이 평화동으로, 주현동 · 인화동이 인화동으로, 남중1가동 · 남중2가동이 남중동으로 각각 개편되었다. 1998년 10월 9일신동 · 계문동이 신동으로, 어양동 · 영등동이 영등동으로, 금강동(법정동)이 동산동으로, 신흥동(법정동)이 팔봉동으로 개편되는 행정동 통폐합이 있었다.
익산지역은 6·25전쟁 후 전후 복구사업과 함께 1970년대의 새마을운동으로 그 면모를 일신하였다. 그리고 영농의 기계화와 과학화를 추진해 호남지방의 미곡산지로서, 농산물 집산지로서 그 역할을 다하고 있다.
함열읍 다송리 구릉지대에서 발견된 석곽분, 망성면 어량리 유적에서 발견된 마제석검 · 석촉 등을 비롯해, 금마면 서고도리의 오금산 선사유적지에서 다뉴경 · 세형동검, 춘포면 오산리 선사유적지에서 마제석검 · 석촉 등 청동기시대 유물이 출토되고 있다. 이 밖에도 춘포면 쌍정리 선들입석과 왕궁면 왕궁리입석 등의 유물이 있다.
능묘로서는 석왕동의 익산 쌍릉(사적, 1963년 지정)이 있으며, 그 외 익산 입점리 고분(사적, 1991년 지정) · 웅포리 고분군 등이 있다.
산성으로는 금마면 신룡리의 익산미륵산성(전북특별자치도 기념물, 1973년 지정), 서고도리의 익산토성(사적, 1963년 지정) · 금마 도토성(전북특별자치도 기념물, 1984년 지정), 왕궁면 왕궁리의 모질메산성(사적, 1998년 지정), 낭산면 낭산리의 익산낭산산성(전북특별자치도 기념물, 1973년 지정), 굿대숲토성(일명 猪土城) 등이 있다.
그리고 여산면의 선인봉산성(仙人峰山城) · 천호산석성(天壺山石城) · 당치산성(堂峙山城), 왕궁면의 학현산성(鶴峴山城), 황등면의 용산성(龍山城), 용안면의 용안읍성(龍安邑城), 함라면의 함라산성(咸羅山城), 웅포면의 어래산성(御來山城) 등을 들 수 있다.
봉수대로는 웅포면과 함라면의 봉화산(烽火山)에 있었던 소방봉봉수대와 용동면 화실리에 있었던 광두원봉수대 등이 있다.
도요지로는 백제 때의 삼족토기 · 즐문토기와 회유(灰釉)를 바른 토기 조각이 발견되는 금마면 신룡리의 익산 백제토기 도요지(전북특별자치도 기념물, 1973년 지정)가 있다. 그리고 왕궁면 왕궁리에 궁평백제와요지도 있다.
불교 유산으로는 금마면 기양리 익산 미륵사지(사적, 1962년 지정)와 익산 미륵사지 석탑(국보, 1962년 지정) · 익산 미륵사지 당간지주(보물, 1963년 지정), 익산 고도리 석조여래입상(보물, 1963년 지정), 왕궁면의 익산 왕궁리 오층석탑(국보, 1997년 지정) 등이 있다.
그리고 삼기면 익산 연동리 석조여래좌상 · 태봉사 삼존석불, 웅포면 송천리의 숭림사 보광전, 여산면 원수리의 도승사(道僧寺) 출토 금제 소불상, 삼기리 오층석탑 등이 있다. 연동리 석조여래좌상은 1963년 보물로 지정되었고, 태봉사 삼존석불은 1971년 전라북도 유형문화재(현, 전북특별자치도 유형문화유산)로 지정되었으며, 숭림사 보광전은 1985년 보물로 지정되었다.
또한, 모현동 혜봉원(慧峰院) 내의 모현동 부도, 금강동의 관음사(觀音寺), 낭산면 낭산리의 심곡사(深谷寺)와 심곡사 대웅전 여산면 호산리의 문수사(文殊寺)와 문수사 대웅전 등이 있다. 모현동 부도는 1984년, 낭산면 낭산리의 심곡사(深谷寺)와 심곡사 대웅전은 1984년, 여산면 호산리의 문수사(文殊寺)와 문수사 대웅전은 1974년에 전부 전라북도 문화재자료(현, 전북특별자치도 문화유산자료)로 지정되었다.
그 밖에 도승사(道僧寺), 제남리에 남원사 미륵전(전북특별자치도 문화재자료, 1984년 지정), 미륵사지 외에 오금사지 · 제석사지 등이 있다. 한편, 1984년 전라북도(현, 전북특별자치도) 문화재자료로 지정되었던 백운사 보현전은 화재로 소실되어 1996년 문화재 지정이 해제되었으며, 현재는 관음전이라는 이름으로 복원되었다.
유교 유산으로는 여산면 여산리의 여산동헌(전북특별자치도 문화재자료, 1980년 지정) · 여산향교와 여산향교 대성전(전북특별자치도 문화재자료, 1984년 지정), 금마면 동고도리의 익산향교와 익산향교대성전(전북특별자치도 유형문화재, 1985년 지정) 등이 있다.
그리고 함라면 함열리의 함열향교와 함열향교대성전(전북특별자치도 문화재자료, 1984년 지정), 용안면 교동리의 용안향교와 용안향교 대성전(전북특별자치도 문화재자료, 1984년 지정) 등을 들 수 있다.
서원으로는 신룡리의 화산서원(華山書院)과 기양리의 화암서원(華巖書院) 등이 있고, 사우로는 1915년 이 지방 유림들이 정동식(鄭東植)의 충절과 항일운동을 기리기 위해 세운 모현동의 백산원(柏山院) 등이 있다.
왕궁면 광암리의 망모당(전북특별자치도 유형문화재, 1979년 지정)과 동룡리의 함벽정(전북특별자치도 유형문화재, 1986년 지정), 여산면 원수리의 이병기선생생가(전북특별자치도 기념물, 1973년 지정), 망성면 화산리의 화산천주교회(사적, 1982년 지정), 용안면 중신리의 삼세오충렬유적(전북특별자치도 기념물, 1982년 지정), 함라면 함열리의 김안균 가옥(전북특별자치도 민속자료, 1986년 지정) · 조해영 가옥(전북특별자치도 문화재자료, 1986년 지정) 등이 있다.
삼기면 기산리의 연안이씨 종중 문적(보물, 1979년 지정)이 있다.
무형유산으로는 이리농악 · 이리향제줄풍류를 비롯해 삼기면 오룡리의 익산목발노래, 금마면 동고도리의 익산기세배등이 있다. 이리농악은 1985년, 이리향제줄풍류는 1985년에 중요무형문화재(현, 국가무형유산)로 지정되었으며, 익산목발노래는 2012년, 금마면 동고도리의 익산기세배는 2000년에 전북특별자치도 무형문화재(현, 무형유산)로 지정되었다.
천연기념물로는 망성면의 익산 신작리 곰솔(천연기념물, 1967년 지정), 여산면 태성리 및 호산리의 익산 천호동굴(천연기념물, 1966년 지정) 등이 있으며, 노거수로는 성당면 성당리의 은행나무와 괴목, 금마면 용순리의 감나무, 함열읍 용지리의 은행나무 등이 있다.
성당면 와초리의 유계 신도비 및 남원 윤씨 절행 정판(전북특별자치도 문화재자료, 1990년 지정)을 비롯해, 후백제군과 고려 태조의 군사가 격전을 벌였던 용화산 숯고개[炭峴], 고려 말 최문선(崔茂宣)이 왜적선 500여척을 불태운 진포대첩지(鎭浦大捷址) 등이 있다.
조선시대 조창지(遭倉址)인 웅포면 웅포의 덕성창지(德成倉址)와 성당면 성당포의 성당창지(聖堂倉址) 등이 있으며, 일제의 침략에 울분을 참지 못하고 자살한 김근배(金根培)의 충절을 기리기 위해 1927년 건립한 모현동의 매곡사(梅谷祠), 단군영정을 모신 동산동의 단군성묘(檀君聖廟)를 비롯해, 두천사 · 오강원 · 은천사 등이 있다.
또한 웅포면 송천리의 청동은입인동문향로(전북특별자치도 유형문화재, 1974년 지정), 금마면 동고도리의 익산 기세배(전북특별자치도 무형문화재, 2000년 지정) 등이 있다.
조선시대 교육기관으로는 여산향교 · 용안향교 · 익산향교 · 함열향교 등이 있다. 1657년(효종 8)에 창건되어 1662년(현종 3)에 사액된 화산서원과 1552년(명종 7)에 세워진 화암서원, 1852년(철종 3)에 창설된 오강서원(五岡書院)은 1868년 대원군에 의해 철폐되기 이전까지 많은 유생들을 교육시켰다.
1780년(정조 4)에 두천사(豆川祠)가 설립되었고, 그 뒤 은천사(隱泉祠) · 현동사(玄洞祠)가 각각 설립되어 유생들의 교육장이 되었다. 서당으로는 인지당 · 북신서당 · 금마서당 · 여산서당 · 함열서당 · 용안서당 등이 있어 초등교육을 담당하였다.
근대 교육기관으로는 1907년 요셉신부가 망성면 화산리에 계명학교(啓明學校)를 설립해 아동교육을 담당했고, 1909년에는 웅포면에 사립부용학교(私立芙蓉學校)가 개교되었다. 1913년에는 이리공립보통학교가 설립되었는데 지금의 이리초등학교의 전신이다.
1910년대 일본인을 교육하기 위해 학교조합에서 운영했던 이리공립심상소학교는 1946년에 개교한 이리중앙초등학교의 전신이었다. 이후 1면 1개 교의 원칙에 따라 1930년까지 30여개의 보통학교가 설립되었다.
중등교육기관으로는 1921년 북신서당을 모체로 해 사립계문학교(私立啓文學校)가 개교했고, 1924년 이리공립여학교가 개교해 지금의 이리여자중학교로 이어져 오고 있다. 1922년 이리농림학교(裡里農林學校)가 설립되었으며, 1951년 이리농림고등학교로 되어 영농인을 위한 실업교육을 담당하였다. 그 해 이리여자고등학교도 설립되었다.
고등교육기관으로는 원광대학교가 1946년 원불교재단법인에 의해 유일학림(唯一學林)이라는 이름으로 설립되었다. 그 후 1951년 원광초급대학으로 되었다가 1953년 정규대학으로 승격되었으며, 1971년 종합대학교가 되었다. 한편, 1976년 원광학원 산하에 원광보건전문대학이 설립되었다가, 원광보건대학으로 개칭되었다.
교육기관으로는 2015년 현재 초등학교 60개교, 중학교 26개교, 고등학교 18개교, 특수학교 2개교(전북맹아학교, 전북혜화학교), 원광보건대학교, 전북대학교 특성화캠퍼스, 한국폴리텍V 익산캠퍼스, 원광대학교가 있다.
문화예술단체로는 이리지역에 1966년 이리국악원이 설립되어 국악의 바른 이해와 발전에 도움을 주고 있다. 또한, 1990년 8월 21일 익산문화원이 창립되어 지방문화의 진흥과 향토문화 발전에 이바지하고 있다.
문화행사로 이리지역에서는 해마다 시민의 날이었던 4월 1일을 전후해 이리예술제를 주관해, 호남우도농악을 계승 · 발전시킨 이리농악단의 농악 및 사물놀이 연주와 향제줄풍류를 전승 · 발전시킨 이리정악원의 영산회상곡 연주공연이 있어 왔다.
그리고 국악초청공연의 전통예술 부문과 산하단체가 주관하는 각종 총청문학강연회 · 백일장 · 음악회 · 무용 · 연극 · 미술전람회 · 사진전 등의 다채로운 행사들도 예술제의 한 종목으로 치러져 왔다.
마한의 옛 도읍인 금마에서는 1968년부터 해마다 10월중에 마한민속제(馬韓民俗祭)를 개최하여 국악 · 씨름 · 농악 · 선화공주선발대회 등 다양한 민속행사를 열어 왔다.
행사의 주요 내용으로는 행사 전날 전야제를 치르고, 당일에는 익산기세배 · 익산목발놀이 · 닭개비놀이 · 농악경연대회 · 시조경창대회 · 궁도대회 · 학생무용잔치 등을 벌인다. 그리고 각 읍 · 면 단위의 선수로 구성된 미륵장사(彌勒壯士)뽑기 · 서동(薯童)줄다리기 · 선화공주뽑기 등의 행사도 열린다. 이 중에서도 익산기세배놀이와 익산목발놀이는 귀중한 민속으로서 마한민속제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크다.
1995년 시 · 군의 통합 이후, 이리예술제와 마한민속제를 지역민속예술제로 발전시킨다는 취지하에 마한민속예술제로 통합해, 마한민속예술제전위원회의 주관으로 시민의 날인 매년 5월 10일을 전후해 성대하게 행사를 개최해 왔으나 2003년부터 익산서동문화제로 그 명칭이 변경되었다.
그 외에도 익산에서는 백제시대 신라다보탑과 석가탑을 세운 석장 아사달의 전통과 석재문화 발상지로서의 익산을 대외적으로 널리 알리기 위한 행사로 매년 10월 전국 돌문화축제도 열고 있다.
1996년 대소공연장과 전시실 등을 갖춘 솜리문화예술회관이 개관되어 이 고장의 문화예술 발전의 요람이 되고 있다.
이 고장의 민속놀이에는 널뛰기 · 연날리기 · 달맞이 · 다리밟기 · 윷놀이 · 쥐불놀이 · 횃불싸움 · 화전놀이 · 그네뛰기 · 씨름 등이 있지만, 대표적인 민속놀이로는 기세배와 기뺏기놀이를 꼽을 수 있다.
기세배는 금마지방을 중심으로 행해지던 놀이로, 정월 대보름을 맞아 12개 마을의 농기를 한곳에 모아 세배를 교환하고 농악과 기놀이 · 무용 등을 하며 즐기는 놀이이다. 이들 마을은 형제의 서열이 관례에 따라 정해져 있어서 맏형마을을 상대(上大)마을 또는 선생마을이라 부르고 나머지는 동생마을이라 한다.
기놀이패는 각기 마을마다 조직되어 있는데, 좌상(座上) · 공원(公員) · 총각좌상 · 총각머슴 · 기받이 · 보조기받이 · 사령 · 꽃나비(7, 8세의 童男童女) · 꽃받이 · 농악대 등 총 21명으로 구성된다. 그리고 선생마을에는 소룡기(小龍旗)받이와 소기받이가 더 있다.
음력 정월 14일 밤이 되면, 각 마을에서는 마을 당산에 농기를 세워 놓고 농악을 울리며 좌상이 제주가 되어 기제사(旗祭祀)를 지낸다. 이튿날 아침 일찍 상대마을은 소룡기를 앞세우고 외길굿을 하며 맨 먼저 막내동생마을을 방문한다. 그런 뒤 차례대로 동생마을에 들러 모두를 이끌고 상대마을로 돌아오는데, 이것을 영행인솔(迎行引率)이라 한다.
일행이 모두 상대마을의 당산에 이르면 한바탕 당산굿을 하며 일제히 허리를 굽힌다. 그리고 당산굿이 끝나면 광장으로 나아가 방울굿과 마당놀이를 하다가 기세배의 대형으로 배열한다.
11개의 동생마을 농기는 “봉심이요”라는 구령하에 선생마을 농기구에 세배를 하고, 다음 첫동생마을 농기가 선생마을 농기 옆으로 가서 서면, 또 남은 10개 마을 농기들이 세배를 올리고 하는 식으로 차례대로 세배를 교환한다.
이렇게 해서 기세배가 모두 끝나면 이들은 여흥으로 꽃나비놀이 · 기쓸기 · 기받이 등의 갖가지 기놀이를 벌여 힘자랑과 기교자랑을 한다. 그 뒤 각 마을 사람들이 혼무를 이루어 여흥이 절정에 이르게 되면, 상대마을에서 제공하는 주연을 끝으로 이 행사는 모두 끝나게 된다.
함열에서는 정월 보름날 기싸움이 벌어진다. 보름날이 되면 마을마다 한기(韓旗: 農旗)를 앞세우고 징 · 꽹과리 · 북을 울리며 인근마을에 기세배를 청하는데, 마을마다 서로 먼저 절을 받으려 하므로 결국 완력을 쓰게 되어 기싸움이 벌어지는 것이다.
이 밖에도 이런 상무적인 놀이로 죽통(竹筒)에 화약을 넣고 화심(火心)으로 불을 당겨 갈대를 쏘는 화전(火箭)싸움이 있다.
이 고장의 설화로는 오금산에 대한 지명전설인 「마동전설」과 탑에 얽힌 연기전설인 「오누이탑쌓기전설」 등이 전해오고 있다. 「마동전설」은 『삼국유사』에도 전하는 것이지만, 이 고장에서는 특히 오금산에 대한 유래담으로 이야기되고 있다.
오금산은 금마의 서쪽에 있는 다섯 개의 봉우리로 이루어진 산이다. 옛날 이 산에 홀어머니를 모시고 사는 마동이라는 소년이 있었다. 소년이 마[薯]를 캐서 금마장에 갖다 팔았기 때문에 마동이라는 이름이 붙은 것이다.
마동의 나이가 열일곱 살쯤 되었을 때 그는 신라의 선화공주가 절색이라는 소문을 듣고 그녀에게 장가들 생각으로 마를 짊어지고 신라의 수도로 갔다. 대궐 앞에 자리를 잡은 마동은 아이들에게 마를 나누어주며 선화공주가 마동을 좋아한다는 노래를 부르게 했다.
아이들이 부르는 노래가 임금의 귀에까지 들어가자 임금은 화가 나서 공주를 죽이라는 명을 내렸다. 이에 왕비는 공주에게 많은 보물을 주어 어디로든 몰래 떠나게 했다. 마동이 길목에서 공주를 기다리고 있다가 자기 나라에 가서 함께 살자고 하니, 공주는 마동이 장차 큰 인물이 될 사람임을 알아차리고 마동을 따라가 함께 살았다.
그러던 어느 날 공주가 살림에 보태 쓰려고 금덩이를 꺼내놓자 마동은 마를 캘 때 얼마든지 보던 것이라며 산에 가서 큰 금덩이 다섯 개를 공주에게 갖다주는 것이었다. 공주는 기뻐하며 이것을 미륵산의 사자암(獅子庵)에 있는 지명법사(知命法師)를 통해 신라왕에게 보냈는데, 이 때 금이 다섯 덩이가 나왔다 해서 이 산을 오금산이라 불렀다 한다.
후일 마동은 백제의 30대 무왕이 되었고, 왕이 된 뒤에도 늘 금마에 행차했으며, 오금산에다 어머니를 기리는 오금사를 세웠다. 지금도 오금산에는 용못이라는 방죽이 있는데 이 곳에서 마동이 물을 길어다 먹었기에 유래된 명칭이라 한다.
「오누이탑쌓기전설」은 미륵탑과 왕궁탑에 얽힌 전설이다. 옛날 슬하에 남매를 둔 노인이 살고 있었는데, 어느 날 관상쟁이가 와서 보더니 남매 중 하나만 데리고 살아야지 그렇지 않으면 불길하다고 했다. 이 말을 들은 노인은 탑쌓기내기를 해 진 사람을 내쫓기로 하였다.
노인은 아들과 살고 싶었기 때문에 아들에게는 작은 왕궁탑을 쌓게 하고, 딸에게는 큰 미륵탑을 쌓게 하였다. 그런데 아들은 안심하고 천천히 쌓은 반면, 딸은 지지 않으려고 열심히 쌓았기 때문에 남매가 탑을 다 쌓고 손을 터는 시간이 똑같았으므로 노인은 할 수 없이 남매를 모두 데리고 살았다는 내용이다.
이 밖에도 섣달 그믐날 하루 서로 만나 회포를 푼다는 「옥룡천의 인석(人石) 전설」, 예쁜 선녀를 두고 두 장군이 싸움을 했다는 「독산[石山]과 흑산[土山] 전설」, 뒤를 돌아보지 말라는 중의 말을 어긴 여인이 아기를 업은 채 돌이 되었다는 「관음사돌부처전설」 등이 있다.
전체 인구의 8할이 농업에 종사하고 있는 이 고장에는 농사와 관련된 노래가 주로 불려왔다. 이 고장에서 불리고 있는 노래는 「타작노래」 · 「김매기노래」 · 「베틀노래」 · 「물레노래」 등의 노동요가 있다.
그리고 「기와밟기노래」 등의 의식요, 「담넘기놀이노래」 · 「강강수월래」 · 「청어엮기놀이노래」 등의 유희요를 비롯해, 「한량가」 · 「둥당기타령」 · 「산타령」 · 「익산어타령」 등이 있다.
“왔나 어이/애야하행 애야하행/삼복에 가꾼곡식/어어어하 어허허행/어어허허해 애해이히나해/오늘날 타작일세…….” 하는 「타작노래」는 노동의 힘겨움을 덜 수 있도록 해주며 수확의 흥겨움을 나타내 준다.
그 밖의 노동요로는 “아아아아 애애 애애애 얼씨구나 얼씨구나/농사라 하는 것은 자고이래로 대본이라…….” 하는 「김매기노래」, “물레야 가락아 뱅뱅 돌아라/남의집 옥동자 밤이슬 맞는다…….” 하는 「물레노래」, “천하의 우상에 선녀 인간세상 내려와 할일이 전혀 없네/옥남간에 베틀놓으니 베틀다리가 둘이로다…….” 하는 「베틀노래」 등이 있다.
의식요로는 한해 농사가 순조롭기를 신에게 기원하는 농제(農祭)에서 불렸던 「기와밟기노래」가 있다. 이 노래는 징 · 명(銘) · 장구 · 소고 등의 농악기 반주로 불렸는데, 액신들을 진정시키려는 기원이 담겨 있다.
그 내용은 “밟세 밟세 기와나 밟세/이기와가 웬기완가 전라감영 청기왈세/밟세 밟세 기와나 밟세/몇장몇장 밟았는가 스물닷장 밟았다네…….”와 같다. 「한량가」는 “영산홍노 봄바람/농안거천 황복백적/시르릉풍등 오파창남/떠오르는 건 도화로구나…….”와 같다.
한편, 시대적 상황을 반영한 노래도 있는데, “땅좋고 물좋은데 신작로나고/인물좋은 큰애기는 갈보질가네…….”처럼 이들의 처지를 사회적 관계 속에서 인식하려는 태도를 보여준다. 그 밖에 「방아타령」 · 「덕석머리」 · 「지게목발노래」 · 「등짐노래」 등 많은 노래가 전승되고 있다.
주변의 김제시 · 군산시와 함께 호남평야의 중심지로서, 전통적으로 논농사 중심의 농업지역이다. 오늘날에는 육상교통의 중심지로서 전주시 · 군산시와 함께 전북 지역의 중심공업지역이기도 하다.
만경강유역에 넓게 발달한 비옥한 만경평야의 중심부에 위치해 2008년 현재 경지율이 49.6%에 이르며, 총 경지면적 2만 5,116㏊ 가운데 논이 2만 1,322㏊로 경지면적의 84.7%를 차지하는 벼농사 중심의 주곡농업이 이루어진다.
만경강 유역의 넓은 평야는 일제시대에 시행된 대규모 농업개발사업인 산미증식계획(産米增殖計劃)에 의해 직강공사 · 수리시설 등이 이루어짐으로서 개발되었다. 이에 따라 저습지였던 하천 유역의 넓은 충적지가 농경지로 개간되고, 관개수리시설에 의해 농업용수가 공급되면서 만경평야는 전국 제일의 곡창지대가 되었다.
송학동의 농촌진흥청 호남작물시험장에서는 농작물 품종개량, 병충해 방제, 토양 및 비료 연구 등을 하고 있다. 주곡작물 외에도 낮은 구릉지가 넓게 발달한 왕궁면 · 낭산면 · 삼기면 · 황등면 등에서는 밭작물 재배도 활발하다. 특히, 고구마와 감자가 많이 생산되며 그 중심이 되는 주요산지는 삼기면이다.
또한 근교농업도 활발해 왕궁면 · 망성면 · 황등면을 중심으로 한 무 · 배추 · 토마토 · 오이 · 양파 등의 채소류 재배와, 낭산면의 사과, 왕등면의 포도, 망성면의 참외 등의 과수 재배도 활발하다. 이 외에도 망성면 · 춘포면에서 양송이버섯, 삼기면 · 왕궁면에서 인삼이 많이 재배되고 있다.
축산업은 주로 한육우 · 닭 · 말 · 개 · 산양 · 토끼 등의 사육이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광업은 특별한 지하자원은 없으나 석회석 · 규석 · 고령토가 약간 채굴된다. 공업의 경우 만경평야의 중심부에 위치한 전형적인 농업지역이라 발전이 미미했으나, 1970년대 이후 공업단지 조성과 함께 발전이 비교적 빠르게 이루어지면서 인접한 전주시 · 군산시와 함께 전북 지역의 중심공업지대를 형성하고 있다.
공업단지는 1971년에 신흥동에 처음 수출산업단지가 조성되고 1973년에 제2수출자유지역으로 지정되면서 개발이 본격화되었다. 이후 1976년에는 이리국가산업단지, 1979년에는 이리귀금속단지, 1978년에는 팔봉동에 제2공단이 조성되었고, 그 동쪽으로 제3공단이 조성되기 시작하였다. 또한, 1990년대에는 농촌공업화사업에 의해 삼기(三箕) · 황등(黃登) · 낭산(郎山) 등 3개소의 농공단지가 조성되었다.
전통적으로 섬유 · 의복 · 식품 · 귀금속 · 보석가공업 등 경공업이 발달했으나, 현재는 임금상승 등으로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다. 최근에는 반도체 · 자동차부품 등 전자 · 기계공업과 화학 · 고무 및 플라스틱 · 비금속광물 · 조립금속공업 등 다양한 부문에서 발전이 이루어지고 있다.
익산지역의 질 좋은 화강암을 원료로 한 석재가공은 전국적으로 유명하다. 함열읍 · 황등면에 관련 업체가 집중되어 있는데, 익산황등농공단지는 이들 업체로 전문화된 석가공단지이다. 구릉지에는 점토가 풍부해 이를 원료로 한 적벽돌 생산업체가 많다.
시장분포현황을 보면 시내에 7개소의 상설시장과 5개소의 정기시장이 있으며 대형마트 3곳, 백화점 1곳이 있다. 정기시장에서는 주로 농산물 · 생활필수품 거래가 이루어지며, 여산장 · 황등장은 1·6일에, 금마장은 2·7일에 열린다. 황등의 특산품인 석재는 연중 수시로 석재생산협동조합과 소비자의 직거래로 공급된다.
교통은 일제강점기에 미곡집산지로 발달해 1908년에 전주∼군산을 잇는 근대적 도로인 전군가도(全群街道)가 개설되고, 1912년 호남선, 1913년 군산선, 1936년 전라선 철도가 개통되어 일찍이 이 지역의 육상교통의 중심지가 되었다. 2015년에는 경부고속선과 호남선을 잇는 고속철도 노선인 호남고속선이 개통하였다.
광복 후에는 1970년에 호남고속도로가 개통되었다. 이 외에도 논산∼전주간의 1번국도와 강경∼김제간의 23번 국도가 이곳을 통과한다. 조선시대에는 금강의 수운교통도 발달하였다.
시의 일원이 마한 · 백제문화권에 속하는 지역으로, 탑 · 왕릉 · 사지 등의 문화유적이 곳곳에 산재해 역사탐방을 위한 주제관광을 하기 좋은 곳이다. 대표적인 관광자원으로는 금마면 미륵산 미륵사지와 왕궁면의 왕궁리 오층석탑이 있다.
미륵산에서 익산토성을 거쳐 금마 동고도리의 석불입상을 지나, 모질메산성에 있는 왕궁평탑에 이르는 코스는 역사탐방을 위한 조국순례코스로 지정되어 있다. 미륵사지에는 국내 최고최대의 석탑이 있고, 발굴조사가 진행함에 따라 그 웅대한 규모가 들어나 내외국인 방문객이 증가하고 있다.
고려시대의 것으로 추정되는 왕궁리 오층석탑 주변은 잘 정비되어 찾는 이가 많다. 부근에서는 선사시대의 주거지터가 발견되었다. 그리고 익산쌍릉이 있다. 여산면의 여산현 시절의 동헌터와 천주교신자들의 고문터, 순교자의 묘소를 보는 것 또한 의미가 있다. 여산(礪山)은 도호부사가 주재하던 구읍으로, 호남역로의 중요한 역참이 있던 유서 깊은 곳이다.
금마는 백제 후기에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던 고읍으로 동고도리 · 서고도리라는 이름이 있는 것으로 보아도 오랜 고도였음을 알 수 있다.
익산시의 춘포면 · 오산면 일대 만경강변은 일제강점기에 일인들에 의해 개발이 추진된 곳으로, 넓은 평야와 질서정연한 수로와 장방형농토, 인공제방, 그리고 일인지주들의 거점이었던 지역의 취락과 가옥들을 살펴보는 것 또한 역사기행의 좋은 주제가 된다.
전군간 도로인 번영로에는 전주에서 익산를 지나 군산에 이르는 가로 양편에 가로수로 식재된 벚나무의 꽃이 만개하는 봄철이면 수많은 관광객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과거 이리시 지역에는 시민공원인 배산공원이 있어 시민의 휴양소로 이용된다. 또한, 산정에는 팔각정이 축조되어 있어 만경평야를 한눈에 조망할 수 있다.
팔봉컨트리클럽이 있어 국민관광휴양지로 지정되어 있으며, 골프장, 배구장, 테니스코트, 수영장, 놀이터 시설들도 갖추어져 있어 많은 이용객들이 찾는다.
시에서는 이들 역사의 숨결이 어린 지역들을 아우르는 ‘백제향기를 찾아서’라는 역사탐방코스와 보석가공공업의 성장을 활용하는 ‘보석테마관광’ 등과 같은 다양한 테마관광을 개발하여 적극적으로 홍보를 하고 있다.
시의 중앙에 위치한 읍. 면적 18.94㎢, 인구 7,803명(2015년 현재). 읍 소재지는 와리이다. 본래 함열군에 속한 지역으로 백제 때는 감물아현(甘勿阿縣)으로 불렸으며, 통일신라 경덕왕 때 함열현으로 개칭되었다.
고려 초에는 전주에 속했다가 1176년(명종 6) 감무가 파견되었다. 1409년(태종 9)용안현과 합해 안열현(安悅縣)이라 했다가, 7년 뒤함열현으로 복귀하였다. 1895년전주부 함열군이 되었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함열군 남이면 마포리 · 상금리 · 하금리는 옥구군에, 그 밖의 지역은 익산군에 편입되고, 이전의 함열군 동이면 · 동삼면 · 동사면이 병합되어 함열면이 되었다. 그 뒤 1979년 읍으로 승격되었다.
용왕산 줄기인 동지산(冬至山)과 남당산(南堂山) 등 작은 산지를 배경으로 읍시가지가 자리하고 있다. 경지면적 11㎢ 정도로 논농사를 중심으로 한다. 부근의 황등면과 함께 농산물 집산지이고, 화강암 쑥돌의 채취와 반출이 활발한 곳이다.
호남선 철도와 논산∼강경간의 도로, 그리고 전주간의 도로가 발달해 교통이 편리하다. 교통의 발달로 주민들의 구매 · 의료 · 교육 · 직장 등을 익산시나 논산시 강경읍에 의존하고 있다.
문화유적은 다송리의 선사유적지에서 다뉴세 문경, 흑도 등이 출토되었다. 와(瓦) · 남당(南堂) · 흘산(屹山) · 석매(石梅) · 용지(龍池) · 다송(多松) 등 6개 리가 있다.
시의 남부에 위치한 면. 면적 28.36㎢, 인구 5,371명(2015년 현재). 면 소재지는 동고도리이다. 본래 마한의 지역으로 온조왕이 마한을 병합하고 금마저라 칭하였다.
통일신라 경덕왕 때 금마군이 되었고, 고려 초에는 전주의 속현이 되었다. 1344년(충혜왕 복위 5)익주로 승격되었으며, 1413년익산군이, 그리고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군내면 · 미륵면이 통합되어 금마면이 되었다. 면의 명칭은 백제 때 금마저라고 부른 데서 연유한다.
금마산과 오금산이 구릉성 산지를 형성하며 중서부는 평야를 형성하고 있다. 농업이 주산업이고 쌀 · 보리 등 주곡과, 구릉지에서는 사과 · 복숭아 · 땅콩 등이 재배된다. 석재산업이 발달하고 군부대가 주둔하고 있다.
교통은 전주∼논산간국도, 익산∼논산간국도를 비롯해, 호남고속도로 익산인터체인지가 근처에 있고, 웅포∼왕궁간의 지방도가 통과해 편리하다. 전주시와 익산시의 생활권 속에 들어간다.
문화유적은 기양리의 미륵사지 · 석탑 · 당간지주, 동고도리에 석불입상동 · 청심루지, 신룡리에 백제토기 도요지 · 금마지, 서고도리에 마룡지 등이 있다. 신룡리에는 명승지인 황각동계곡이 있어 관광객이 많이 찾는다. 미륵산의 기준성과 사자암이 있다. 동고도(東古都) · 서고도(西古都) · 신룡(新龍) · 산북(山北) · 용순(用脣) · 기양(箕陽) · 갈산(葛山) 등 7개 리가 있다.
시의 중앙에 위치한 면. 면적 34.87㎢, 인구 3,317명(2015년 현재). 면 소재지는 삼담리이다. 본래 낭산현에 속했는데, 낭산현은 백제 때 알야산현(閼野山縣)이었고 통일신라 경덕왕 때 야산현(野山縣)이 되어 금마군에 속하였다.
고려시대에 낭산현으로 개칭되어 전주에 속했으며, 1391(공양왕 3) 여량감무(礪良監務)가 겸해 다스렸다. 1402년여량현 · 낭산현을 병합해 여산군이라 했고,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여산군의 서이면 · 서삼면 · 서사면이 통합되어 낭산면이 되었다.
대부분 지역이 낭산(朗山, 182m)을 중심으로 구릉성산지를 형성하고, 면의 관개용수를 공급하는 낭산저수지 하류에 충적지가 형성되어 미작농업을 한다. 구릉지는 과수원 · 임야 · 밭으로 이용되고, 취락들은 구릉지사면에 발달하고 있다. 농업이 주산업이고, 쌀 · 보리 외에 사과 · 복숭아 · 땅콩이 재배된다.
화강암 석재를 생산해 국내는 물론 일본 등지로도 수출하고 있다. 바구니를 생산하는 죽제품 생산도 하고 있다. 함열∼여산, 낭산∼금마, 낭산∼여산간의 지방도가 발달해 교통이 편리하다.
문화유적은 낭산리에 낭산산성이 있다. 삼담(三潭) · 호암(虎巖) · 석천(石泉) · 낭산(朗山) · 성남(城南) · 구평(龜坪) · 용기(龍機) 등 7개 리가 있다.
시의 북단에 위치한 면. 면적 31.77㎢, 인구 3,326명(2015년 현재). 면 소재지는 신작리이다. 본래 여산군에 속한 지역으로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북일면 · 북삼면이 통합되어 망성면이 되었다. 망성이라는 명칭은 일제강점기에 면내의 장선리 망성마을에 헌병이 주둔했기 때문에 널리 알려진 것에서 유래되었다.
구릉성산지와 어량천(漁梁川), 여산천 유역의 넓은 충적지로 구성되어 있다. 구릉사면들에 취락이 조성되고 밭을 경작한다. 농업이 주산업이고 벼농사 위주이며, 담배 · 고추 · 생강 등을 생산한다.
면 중심지인 신작리는 강경읍과 접하고 있어 강경읍에 의존도가 크다. 행정구역상으로는 전북특별자치도이나 상업 · 교육 · 문화 등은 충남권에 속한다. 호남선 철도가 면의 북부를 지나고, 익산∼논산간의 국도와 웅포 · 왕궁 · 전주간의 도로가 통과한다.
문화유적은 신작리에 천연기념물인 곰솔이 있다.
신작(新鵲) · 화산(華山) · 장선(長善) · 어량(漁梁) · 내촌(內村) · 무형(茂形) 등 6개 리가 있다.
시의 중앙에 위치한 면. 면적 23.25㎢, 인구 2,856명(2015년 현재). 면 소재지는 간촌리이다. 본래 익산군에 속한 지역으로,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익산군의 율촌면 · 기제면 · 구문천면의 일부가 통합되어 삼기면이 되었다. 삼기라는 명칭은 주산인 삼기산에서 연유되었다.
대부분이 구릉성산지와 기양천(箕陽川) 유역의 충적지로 형성되어 있고, 구릉지는 밭으로 이용되고 있다. 농업이 주산업으로 쌀 · 고구마 · 땅콩 · 고추 · 담배 등을 생산한다. 근래에는 구릉지에서 젖소사육이 발달하고 있다. 웅포∼금마, 회현∼망성간의 도로가 지나고 있다. 상업 · 교육 · 문화적 기능은 익산시에 의존하고 있다.
문화유적은 연동리에 석불좌상, 기산리에 연안이씨 충간공 종중이 보관하고 있는 연안이씨 종중 문적(보물, 1979년 지정)이 있다. 보물인 연안이씨 종중문적이 있으며, 풍속놀이로 기세배놀이가 유명하다.
간촌(間村) · 서두(西豆) · 오룡(五龍) · 연동(蓮洞) · 기산(箕山) · 용연(龍淵) 등 6개 리가 있다.
시의 서북부에 위치한 면. 면적 19.36㎢, 인구 2,149명(2015년 현재). 면 소재지는 장선리이다. 본래 함열군에 속한 지역으로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함열군 동일면 · 북이면이 통합되어 성당면이 되었다. 성당이라는 명칭은 면내의 성당포(聖堂浦 : 聖浦)가 함열 · 용안 · 익산 등 10개 군 · 현의 세곡을 수납해 조운하던 데서 연유하였다.
일치봉(一峙峰, 133m)을 중심으로 한 구릉성산지와 함열천 유역의 충적평야로 형성되어 있다. 구릉지와 평야부의 접촉지점에 취락들이 밀집해 있다. 농업이 주산업이고, 쌀 · 담배 · 땅콩 · 고추 · 생강 등이 주로 생산된다. 최근에는 구릉지를 이용한 한우사육과 양계 · 양돈업도 활발하다.
익산시의 영향권 속에 드나 함열읍에 대한 의존도가 높다. 금마∼성당, 함라∼용안간의 지방도가 개설되어 교통이 편리하다.
성당리는 조선 말기에 김대건신부가 국내에 상륙한 지점으로 유서 깊은 나바위성당이 있다. 천주교 성지 중의 하나이다. 장선(長善) · 와초(瓦草) · 대선(大仙) · 갈산(葛山) · 두동(杜洞) · 성당(聖堂) · 부곡(富谷) 등 7개 리가 있다.
시의 동부에 위치한 면. 면적 36.27㎢, 인구 3,681명(2015년 현재). 면 소재지는 여산리이다. 본래 마한의 지역으로 백제 때는 지량초현(只良肖縣)이라 했고, 통일신라시대에는 여량현(礪良縣)으로 개칭되어 덕은군에 속했다가, 1018년전주의 속현이 되었다.
1391년 감무를 두어 낭산 · 공촌부곡 · 피제부곡을 병합하였다. 1400년여량과 낭산을 합했으며, 1404년에 여산현으로 개칭되었다. 1436년 태종의 비 원경왕후 민씨의 외향이라 해서 군으로 승격되었다.
그러다가 1699년 단종의 비 정순왕후의 본관이라 해서 다시 부로 승격되어 도호부사가 임명되었다. 1895년전주부 여산군이 되었고, 이듬 해 전라북도(현, 전북특별자치도) 여산군이 되었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여산군 청동면, 천서면, 군내면이 통합되어 여산면이 되었다.
천호산 · 용화산 · 당제산 등의 산지가 있으며, 면의 대부분 지역이 여산천유역의 충적지를 제외하면 산지로 되어 있다. 농업이 주산업으로 쌀 · 양파 · 마늘 · 딸기 등을 생산한다. 천호산에서는 석회석을 생산하고 있다. 최근에는 대규모 양계장이 설립되어 있다.
호남고속도로가 면의 중앙을 지나며, 면의 중심부인 여산리는 전주 · 여산 · 강경 · 논산, 여산∼익산간의 도로가 통과해 교통이 편리하다. 문화유적은 호산리에 천호동굴, 여산리에 여산향교 · 동헌 등이 있다. 여산(礪山) · 제남(濟南) · 원수(源水) · 대성(臺城) · 두여(斗餘) · 호산(壺山) 등 6개 리가 있다.
시의 남서단에 위치한 면. 면적 29.52㎢, 인구 8,745명(2015년 현재). 면 소재지는 오산리이다. 본래 백제 때는 소력지현(所力只縣)에 속했던 곳으로, 통일신라 경덕왕 때 옥야현(沃野縣)이 되어 금마군에 속하였다.
고려 초에 전주에 속했고 1176년에 감무가 파견되었다. 조선 말기에 전주의 서일면과 남이면으로 나누어졌으며,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익산군에 이속되었고, 익산군의 서일면 · 남이면과 익산군의 일부가 통합되어 오산면이 되었다. 원래 면의 명칭은 주산인 오산(鰲山)에서 유래된 것으로 오(鰲)자가 오(五)자로 바뀌었다.
대부분 지역이 만경강유역의 충적지역으로 구성되어 있고, 농업이 주산업으로 미작중심의 곡창지대이다. 최근에는 닭 · 오리 · 돼지 등의 축산업도 익산시 근교의 이점을 살려 발달하고 있다.
장항선 철도와 전주 · 익산 · 군산을 연결하는 번영로와 익산시의 우회도로가 지나 교통이 대단히 편리하다. 익산시의 교외지역으로 익산시의 생활권에 들며, 도로변을 따라 서비스업이 발달하고 전북농조 등 농업관계 시설이 유도되고 있다.
목천교를 건너 김제로 통하는 도로도 발달해 있다. 목천교에는 장어집들이 밀집해 있다. 동척촌 등의 지명이 남아 있고 간선수로의 수문들이 설치되어, 일제강점기에 개발된 지역임을 알 수 있다. 오산(五山) · 송학(松鶴) · 장신(長新) · 영만(永萬) · 신지(新池) · 남전(南田) · 목천(木川) 등 7개 리가 있다.
시의 동남부에 위치한 면. 면적 45.75㎢, 인구 5,132명(2015년 현재). 면 소재지는 흥암리이다. 본래 지금의 동봉리 · 동룡리 · 광암리 · 흥덕리 · 구덕리는 우주현(紆州縣)에 속했고 그 밖의 지역은 금마군에 속하였다.
우주현은 백제 때 우소저현(于召渚縣)이라 불렸으며, 통일신라 경덕왕 때 우주현으로 개칭되어 금마군에 영속되었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금마군의 우북면과 익산군의 제석면이 통합되어 왕궁면이 되었다. 왕궁이라는 지명은 옛날 이 곳에 왕궁터가 있었던 것에서 연유되었다.
47%가 임야로 왕궁천과 부상천유역에 충적지와 100m 내외의 구릉들이 혼합되어 있다. 농업이 주산업으로 벼농사와 구릉지에서 축산업과 참깨 · 고추 등의 밭농사와 원예작물생산이 활발하다.
전주∼금마간의 도로변을 따라서 많은 벽돌공장들이 밀집해 있어 양질의 벽돌을 경향에 공급한다. 호남고속도로와 삼례나 익산인터체인지에서 연결되고, 전주 · 금마 · 여산 · 논산, 익산∼봉동으로 통하는 교통이 편리하다.
생활권은 대부분이 전주에 들어가며, 최근에는 온수리에 왕궁온천이 개발되어 주말이나 휴일에는 많은 사람이 찾는다.
문화유적은 왕궁리의 오층석탑 · 모질메산성, 동룡리에 우산정사 · 왕궁지 · 함벽정이 있다. 흥암(興巖) · 광암(光巖) · 구덕(九德) · 온수(溫水) · 쌍제(雙堤) · 발산(鉢山) · 평장(平章) · 왕궁(王宮) · 동촌(東村) · 도순(都巡) · 용화(龍華) · 동룡(東龍) · 동봉(東鳳) 등 13개 리가 있다.
시의 중북부에 위치한 면. 면적 16.66㎢, 인구 1,774명(2015년 현재). 면 소재지는 대조리이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용안군의 일동면 · 이동면 · 남면 · 북면 · 군내면이 통합되어 용안면으로 되었다.
용안군이 용안면으로 격하되어 용안면은 군내에서 가장 면적이 넓은 면이 되었다. 면 관할구역이 너무 넓은 탓에 불편이 많아 1970년용안면의 일동면 · 이동면 지역을 관할하는 용동출장소가 설치되고, 1986년에 용동출장소가 용안면에서 분리되어 용동면이 되었다.
동부의 구릉성산지를 제외하면 대부분 지역이 금강과 부곡원유역의 충적평야지대이다. 구릉성산지에는 봉화산(153m)이 있고, 야산개발로 구릉지도 논으로 개간되었다. 농업이 주산업이고 쌀을 주로 생산한다.
한편, 구릉지에서는 온실재배로 수박 · 참외 등 여름 과실과 채소를 생산해 강경과 대전 등지로 출하한다. 또한 과수원도 개발되어 복숭아를 생산한다. 강경과 함열에 근접해 있어 두 읍의 생활권에 든다.
교통은 호남선 철도의 간이역과 강경과 함열을 왕래하는 시내버스가 있으나 불편한 편이다. 봉화산에 광두원봉수대가 있다. 대조(大鳥) · 구산(九山) · 용성(龍城) · 화실(花實) · 흥왕(興旺) · 화배(花盃) 등 6개 리가 있다.
시의 북단에 위치한 면. 면적 25.58㎢, 인구 2,978명(2015년 현재). 면 소재지는 교동리이다. 본래 용안현으로 고려 중기까지는 함열현의 도내산은소(道乃山銀所)였다. 1321년 이 고장 출신 백안부개(伯顔夫介)가 원나라에 있으면서 본국에 공이 있어 용안현으로 승격되었다.
1391년전주의 속현인 풍저(豊儲)와 병합했다가 1409년함열현과 병합해 안열현이라 하였다. 그리고 1416년함열현과 분리되어 용안현이 되었다. 1895년 전라북도(현, 전북특별자치도) 용안군으로 승격되었고 1896년 전주부 용안군이 되었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일동면 · 이동면 · 남면 · 북면 · 군내면 등이 통합되어 용안면이 되었으며, 1970년 과거 일동면 · 이동면의 전지역을 관할하는 용동출장소가 설치되었다. 1986년 용동출장소가 용동면으로 분리해 나가고, 나머지 지역이 용안면으로 남아 오늘에 이른다.
무학산과 동부구릉지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금강과 부곡천 유역의 충적평야이다. 농업이 주산업으로 미작농업이 중심이다. 취락들은 대부분 구릉지대에 발달하고 있다. 호남선 철도가 지나며, 익산∼논산의 국도가 통과한다. 익산시와 충청남도의 강경읍에 생활권이 의존되어 있다.
문화유적은 금강연안에 조선시대의 조창인 덕성창이 있었고, 교동리에는 용안향교가 있다. 교동(校洞) · 덕룡(德龍) · 중신(中新) · 창(昌) · 용두(龍頭) · 법성(法聖) · 석동(石洞) · 난포(蘭浦) · 송산(松山) · 동지산(冬之山) · 칠목(七牧) 등 11개 리가 있다.
시의 서북단에 위치한 면. 면적 33.01㎢, 인구 1,807명(2015년 현재). 면 소재지는 웅포리이다. 본래 함열군에 속한 지역으로,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서이면 · 북일면이 통합되어 웅포면이 되었다. 명칭은 곰개나루가 중요한 하항이자 면의 중심지였던 것에서 연유되었다.
함라산 · 봉화산 · 일치봉 등 산지가 면을 병풍처럼 둘러싸고 있고, 북서쪽의 금강변을 따라서 긴 충적평야가 형성되어 있다. 농업이 주산업으로 쌀 · 콩 · 고추 등을 재배하고, 최근에는 산록사면에서 축산업과 과수원이 발달하고 있다. 금강하구에는 금강호를 중심으로 하는 어업이 성장하고 있다. 취락들은 하천변에 발달하고 있는 것이 많다.
교통은 불편한데 웅포∼함라를 연결하는 도로와 해안을 따라 웅포∼군산, 웅포∼임피로 연결된다. 옛날에 충청남도 서천군 한산면과 연결되는 나루터(津)인 곰개나루와 서천군 양화면과 연결되는 제성나루가 있던 자리이다. 웅포(熊浦) · 입점(笠店) · 송천(松川) · 고창(古倉) · 맹산(孟山) · 제성(帝城) · 대붕암(大鵬巖) 등 7개 리가 있다.
시의 동남단에 위치한 면. 면적 29.60㎢, 인구 4,983명(2015년 현재). 면 소재지는 춘포리이다. 본래 익산군에 속했던 지역으로 석탄리 · 대장촌리는 옥야현에 속하였다. 조선 말기에 전주 남일면에 속했다가 1913년에 익산군에 편입되었고,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익산군 춘포면 · 두촌면 · 익산면 등이 병합되어 춘포면이 되었다.
그 뒤 1996년대장촌리가 춘포리로 명칭이 변경되었다. 춘포라는 명칭은 면내 인수리 화평마을의 원 이름이 봄개, 즉 춘포인데, 과거 포구로서 번성했던 데서 연유되었다고도 한다. 또는, 주산인 봄개산, 즉 춘포산의 이름이 먼저 생기고 마을 이름이 이를 따른 것이라 해 춘포산에서 연유되었다는 설도 있다.
면의 대부분 지역이 만경강유역의 충적평야지대로 곡창지대를 이룬다. 신동리와 오산리 부근에 약간의 구릉지가 발달하고 있다. 춘포산(48m) 부근과 오산리를 중심으로 취락들이 발달하고 인공제방 축조이후에는 하천유역으로도 취락들이 중앙입지를 해오고 있다.
만경강유역의 용연리 · 춘포리 · 신동리 일대의 소택지들은 만경강의 구하도이고 군 · 면경계로 이용되고 있다. 1925년 하천개수공사에 의한 인공제방 축조이전에 이 곳은 배후습지로 갈대밭이 우거진 노화백리(蘆花百里)를 형성하고 있던 곳이나, 제방 축조 후에 개간된 땅이다.
농업이 주산업으로 쌀농사와 최근에는 익산시의 근교농업지대로 채소재배, 양계 · 양돈 등도 성하다. 춘포리를 중심으로 교외 서비스업이 발달하고 있다. 전라선 철도와 전주 · 삼례 · 동익산으로 통하는 도로가 있다. 익산시의 생활권에 들어가며 일제강점기에는 일인농장주들이 살던 곳이기도 하다.
춘포(春浦) · 덕실(德實) · 삼포(三浦) · 오산(梧山) · 신동(信洞) · 창평(倉坪) · 천서(川西) · 천동(川東) · 쌍정(雙亭) · 인수(仁壽) · 용연(龍淵) 등 11개 리가 있다.
시의 서부에 위치한 면, 면적 22.80㎢, 인구 2,508명(2015년 현재). 면 소재지는 함열리이다. 본래 함열군에 속한 지역으로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함열군의 남이면, 현내면(군내면)이 통합되어 함라면이 되었다.
함라라는 명칭은 함열의 이명으로 일찍부터 사용되어 왔고, 함열군의 군청 소재지가 지금의 함라면 함열리에 있었기 때문에 여기에서 연유되었다. 또는, 함라면의 주산인 함라산에서 연유되었다는 설도 있다.
면내에는 함라산이 있고, 낮은 구릉지와 충적지가 널리 형성되어 있다. 구릉지는 임야와 밭으로 이용되고 동남부의 낮은 구릉지대는 대보화강암이 풍화되어 형성된 것이고, 서북쪽의 산지는 편마암과 편암층을 이루고 있다.
농업이 주산업으로 쌀 · 보리 · 콩 · 고구마 · 고추 등이 구릉지에서 재배되고 축산업도 발달하고 있다. 쑥돌의 생산과 반출이 활발하다. 익산시와 강경읍에 속하는 생활권을 형성하고 있다. 함열(咸悅) · 금성(金城) · 신대(新垈) · 다망(多望) · 신등(新登) · 신목(新木) 등 6개 리가 있다.
시의 서부에 위치한 면. 면적 27.75㎢, 인구 8,157명(2015년 현재). 면 소재지는 황등리이다. 본래 함열군에 속한 곳으로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함열군의 동이면, 남일면이 통합되어 황등면이 되었다. 황등이라는 명칭은 면사무소가 있던 황등리에서 연유되었다는 설과, 주산인 황등산에서 유래되었다는 설이 있다.
면내에는 50m 이내의 낮은 구릉지와 탑천 · 기양천유역에 넓은 충적평야가 형성되어 있어 평야지대는 면 전체면적의 78%를 차지하고 있다. 시에서 농가인구가 가장 많은 지역으로 주산물은 쌀 · 보리 · 콩 · 고구마 · 고추 등이다. 또한 익산시의 근교농업지대로서 무 · 배추 등의 채소재배도 성하며, 양계 · 양돈 · 목우 등의 축산업도 발달하고 있다.
화강암에서 건축용석재를 채석해 가공하는 석재가공업이 발달해 ‘황등석’으로 경향에 널리 알려져 있고, 면내에 많은 석재채석장이 산재하여 2004년 매출액이 981억원(수출 439억, 내수 542억)에 달했다. 호남선 철도와 익산∼논산간의 국도 및 지방도들이 통과해 교통이 편리하다.
황등리에 있는 황등제는 오랜 저수지로 관개용수의 공급원이 되고, 석공예, 황등석의 생산 · 반출이 활발하다. 용산리의 찹쌀엿은 유명하다. 황등(黃登) · 동련(東蓮) · 죽촌(竹村) · 신성(新城) · 구자(九子) · 용산(龍山) · 율촌(栗村) · 신기(新基) 등 8개 리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