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풍천(豊川). 자는 회이(晦而), 호는 강개옹(慷慨翁). 아버지는 임홍정(任弘挺)이다.
1701년 유학으로 있을 때 인현왕후(仁顯王后)가 죽자 그것이 장희빈 일파의 저주 때문이므로, 역적을 벌주고 왕후의 원수를 갚아야 한다고 상소했다가 왕의 노여움을 사 나주에 유배되었다.
그 뒤 1723년 6월 서울로 잡혀와서 그 상소에 신하로서는 차마 입에 담을 수도 들을 수도 없는 흉측한 언사가 많았다는 이유로 나이 70세에 참형되었다.
이 때 그는 결안(結案: 사죄를 결정한 문서)에 응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판의금부사 정법절차에 따라 처형하자는 이태좌(李台佐) 등의 주장에도 불구하고 심단(沈檀)의 요청대로 직단되었다. 뒤에 신원되고 이조판서에 추증되었다. 시호는 충정(忠定)이다.